[에세이] 나를 둘러싼 벽들에게

그림 하나가 떨어지더라도 나는 살아가겠지.
글 입력 2023.11.2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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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미니멀리스트인가요, 맥시멀리스트인가요? 이 질문에 한 번도 단숨에 답을 내놓은 적이 없다. 내 옷장을 열어보면 미니멀리스트가 되기에도, 맥시멀리스트가 되기에도 한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도 당연할 것이, 나는 바다의 모든 것을 속에 가득 품은 한 줌의 물이고 싶다가도, 균질함으로 들어찬 무중력의 허공이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매 분 매 초 이리저리 다른 결정들을 내렸고, 그것들이 이도저도 아닌 것을 만들어 내고, 답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내 방이 2개가 되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나답게 한 곳은 미니멀하게, 다른 한 곳은 맥시멀하게 꾸며볼 것인가?로 시작된 의사결정 항목은 인스타그래머블하게 꾸밀 것인가? 어떤 키컬러를 선정해야 질리지 않고, 이 귀찮은 노동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등으로 이어졌다.

 

귀찮음. 귀찮음이 나에게선 가장 큰 결정의 사유가 된다. 그래서 ‘이 귀찮은 노동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은 오래전부터 부분적으로 대비가 되어 있었다. 실제의 나의 미적 취향인지, 흔하게 구하기 쉬울 것이라는 경제적인 접근인지 알 수 없지만, ‘클래식’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깊은 갈색 계열의 가구들을 모아왔다. 그리고 ‘질리지 않고’를 대비하기 위해 무거운 청록색의 물건들이 덧붙여졌다.

 

그러다보니 미니멀-맥시멀이 중심 질문으로부터 밀려났다. ‘어떻게 기존의 것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해졌고, 내가 골라야 하는 것들은 카페트, 커튼, 빈 벽을 무엇으로 채워 넣을 것인가로 한정할 수 있었다.

 

 

 

갬블러의 삶, 잡지


 

분명히 밀려났다고 생각했던 질문은 다시금 기어 들어왔다. ‘빈 벽을 무엇으로 채워 넣을 것인가?’ – ‘비워두자!’의 옵션이 있었던 것이다.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서는 자신의 공간이 구획되어 있는 것이 좋다. 나는 텅 빈 벽을 바라봤다.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전 세입자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빈 벽. 그리고 다음의 방 주인과도 구별되지 않을 미색의 벽들. 채워보자.

 

다시 한 번, 나는 귀찮음이라는 감정이 인생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100%를 쏟아 넣는 것을 경계한다. –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지만, 그러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나는 원체 멀티태스킹이 힘든, 하나의 일에 집중을 세게 하는 편으로, 시간을 밀도있게 보내면서 인지감정적인 소모가 큰 타입이라 의도적으로 몇 가지를 날림으로 처리하려고 계획한다. (이미 귀찮음을 잔뜩 안은 채) 벽에 뭘 채울 수 있을지 해답을 얻고자 오늘의 집에 접속을 해보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번 연말에 약속이 없어 고민이라면, 벽 한 면을 채우는 것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을 추천한다. 패브릭 포스터, 스티커, 장식장, 선반, 거울, 열쇠걸이, 옷걸이… 방을 꾸며보라고 받은 용돈으로 사람을 고용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벽에 매몰된 삶을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효율적인 방법을 고민했고, 몇 달 전부터 눈에 걸렸던 영어학원 앞 오르막길의 오래된 서점으로 향했다. 오래된 잡지들 사이에서 적당히 내 취향인 것들을 서너권 골랐다. 이제 여기서 다시 적당히 내 취향인 그림들을 골라 마구잡이로 벽을 채울 심산이었다. 꽤 성공적으로 벽 두어개를 채웠고, 이 방안은 나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회사의 파티션을 꾸밀 때 재활용되었다.

 

 

 

나를 둘러싼 벽들에게



가만히 방에 앉아 있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한강으로, 새로운 카페로, 연고가 없는 지역의 호텔로 멍 때리러 다니던 시절들이 무색하리만큼. 하릴없이 가라앉다가도 문 하나만 젖히면 밖으로 나갈 수 있있으므로, 안과 밖의 경계는 명확해졌으면서도 거리는 가까워져서 매번 빠른 속도로 회복하기 시작했다. – 연륜이 쌓여갔기 때문임을 무시하지는 못할테지만.

 

우두커니 청록색 소파에 앉아서, 꽤 마구잡이로 붙인 것처럼 노력한 잡지에서 뜯어낸 그림들을 보면서 내 사고의 흐름을 되새김질한다. 내 단편들이 달랑거리는 벽들을 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관찰한다. 많은 것들을 귀찮아 하고, 그렇기 때문에 효율성을 추구하는, 복잡함과 단순함이 공존하는,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하려고 하는, 갬블링마저도 계획적으로 하는, 클래식을 선호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다시 찬찬히 뜯어본다.

 

좋아하는 벽의 모양새를 꾸며 두고 별에 별 생각을 다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고, 속이 복잡해지면 자동반사적으로 방에 들어가는 습관적이고도 단순한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바다이기도, 허공이기도 하다. 미니멀을 추구하는 순간도, 맥시멈을 추구하는 때도 있다.

 

청록색 소파에 앉아 왼쪽을 쳐다보면 한 쪽 모서리의 테이프가 떨어진 그림이 붙어있다. 테이프를 구태여 벽에 다시 눌러 붙이지 않는, 테이프를 새로 붙이지 않는, 나는 다른 그림들로 내 방이 꾸며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매일 나의 집합을 보면서 잠에 든다. 많은 이들이 나를 어떤 범주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를 하거나, 이미 종속시켰을 것임에도 나는 내가 어떤 요소들의 집합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 잡지의 그림이 어느 때에 선반이 되더라도, 거울이 되더라도, 열쇠걸이가 되더라도, 고용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꾸민 벽을 바라보게 되더라도, 내 사고가 녹아난 나의 집합을 보면서 잠에 들게 될 거다.

 

내가 온전히 비추어보이는 나를 둘러싼 벽들과, 물건들과,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다. 테이프가 모두 떨어져 끝내 바닥에 그림 하나가 나뒹굴게 되더라도, 내 방을 구획하고 있는 하나의 벽이 세워져 있음을 계속해서 사랑해나가겠지. 그렇게 오늘을 살겠지.


 

 

아트인사이트-박나현.jpg

 

 

[박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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