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실내악, 세밀한 불꽃을 날리며 타오르는 정열 : 트리오 콘 스피리토 창단 15주년 기념 음악회

글 입력 2023.11.1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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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공연을 감상하는 일은 낙엽을 세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낙엽이 어깨 위로 떨어지는 순간, 이름 모를 나뭇잎이 성큼 다가온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이 아직 상강의 영역을 다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트리오 콘 스피리토'의 공연이 그러했다. 15년간 멤버 교체 없이 쌓아 올린 화음이 내 모든 감각을 일깨워 여러 번 곱씹을 순간을 선사했다. 연주자들은 낙엽을 잔뜩 묻힌 발걸음을 전부 태워 오선지를 빼곡히 채웠다. 가자. 실내악의 숲으로.

 

 



[Program]


W. A. Mozart - Piano Trio No. 6 in G Major, K. 564

 

R. Schumann - Piano Quartet in E flat Major, Op. 47 (Guest Viola 최은식)


M. Ravel - Piano Trio in a minor, M. 67





첫 곡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6번 K. 564.프로그램 북의 설명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활동 당시에 엄격한 실내악곡에 새로운 표현력을 지닌 악기 '피아노포르테'를 사용해 실내악에 친화적인 성격을 더했다고 한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첫 곡은 실내악과 친해지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1악장은 피아니스트 진영선의 경쾌한 피아노 연주로 시작해 바이올리니스트 정진희와 첼리스트 정광준이 흐름을 이어갔다. 특히 묵직한 첼로의 선율이 피아노의 통통 튀는 음색과 바이올린의 명료한 음색 모두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늦가을에 깊이를 더했다.


이어지는 2악장은 단일 주제와 6개의 변주로 구성되어 있어 듣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피아노가 먼저 연주를 시작하면 바이올린이 변주하고, 뒤이어 첼로가 변주했다. 그 이후는 여러 차례 재밌는 변화를 주는 식이었다. 마지막 3악장은 론도로 생동감을 유지하며 끝이 났다.


*


두 번째 곡은 슈만 피아노 4중주 Op. 47. 비올리스트 최은식이 합류해 시적인 이미지를 빚어냈다. 흑갈색의 원목 서랍장에서 오래된 은제 거울을 꺼내는 듯한 도입부가 인상적이었다. 


1악장은 첼로와 비올라의 묘한 화음으로 서문을 열었다. 현성부의 화음에 피아노가 응답하고 점차 느려졌는데, 페르마타 이후 연주자들은 박자를 바꾸어 곡에 몰입했다. 특히 피아니스트 진영선이 한 음도 놓치지 않고 건반을 질주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2악장은 스케르초로 시작, 피아노와 첼로가 빠르게 휘몰아치며 관객의 몰입을 높였다. 3악장은 2악장과 달리 가곡 풍의 선율이 서정을 빚어냈고,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코스모스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모습을 그리게 했다.  


드디어 4악장, 트리오 콘 스피리토의 경쾌한 울림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산뜻하게 시작했지만, 곡의 진행은 가볍지 않았다. 무어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강렬한 감정을 선명하게 전달하는 비올리스트 최은식의 모습은 잊기 어려울 것 같다.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자신을 불태웠던 바이올리니스트 정진희도. 악장의 끝은 금색의 섬광.


*


마지막, 라벨 '피아노 3중주 M.67'. 무섭도록 섬세하고 음악을 트리오 콘 스피리토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복잡한 리듬을 유려한 선율로 그려냈다. 거미줄에 맺힌 아침 이슬을 발견하고 숨죽여 놀라게 되는 것처럼. 15년간 쌓은 호흡이 허상이 아님을 여기서 다시 깨달았다. 


1악장은 더 까다로워진 기교, 날카로운 피치카토와 부드러운 왈츠가 번갈아 등장했다. 울창한 검은 숲 한가운데 있는 호수와 그 위를 감도는 무거운 공기의 흐름, 여릿한 면사포와 예리한 칼날을 오가는 피아니스트 진영선의 연주가 매력적이었다. 2악장은 1악장에 비해 조용하고 정적인 연주와 갑자기 폭발해 심하게 요동치는 연주가 교차하며 진행됐다. 청록을 가르는 빗방울이 머리 위로 튀었다. 이토록 생생한 연주라니. 


3악장에서 연주자들은 앞선 악장과 다르게 저음역을 나직하게 주고받았다. 삐걱거림 없이 음이 뒤틀려 계속해서 끝도 모를 심해로 가라앉는 듯했다. 마지막 4악장에서 아주 가는 별의 파편과 휘몰아치는 폭풍우가 뒤섞였다. 피아노의 몽환적인 선율과 끓어오르는 격정이 현을 모조리 뜯어내고 쏟아지다 연주가 끝났다. 쏜살같이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


트리오 콘 스피리토의 연주는 성글지 않았다. 대책 없이 타오르는 불길도 아니었으며 무섭도록 냉정한 살얼음도 아니었다. 15년 동안 긴밀하게 합을 맞춘 견고함이 빛을 발하는 연주였다. 생동감 넘치는 모차르트로 시작해 깊은 서정의 슈만을 지나 라벨에 이르러 관현악과는 다른 실내악만의 다채로움을 선보였다.


매년마다 늦가을이 찾아오면 이들을 떠오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주 가까이서 생생히 모든 음을 들었던 시간을, 그들의 대체 불가능한 호흡을.

 

 

[이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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