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이어리 해방일지 [사람]

기록으로 채우는 삶
글 입력 2023.11.07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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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한 해가 오기 전에 지나치지 않고 다이어리를 샀던 때가 있다. 다음 해의 날짜들과 매일 무엇을 했는지 적을 수 있는 칸으로 구성된 숙제 같은 다이어리였다. 그러면 꼭 불변의 법칙처럼 2월 정도까지는 빽빽하게 까맣던 다이어리가 3월 중순부터는 스멀스멀 옅어지더니 5월쯤에는 새하얘진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지쳐서 어느 순간부터 그만뒀다. 매년 마지막 달에 절반 이상이 비어있는 다이어리를 보며 한숨을 쉬는 것도, 내년엔 무조건 마지막 달까지 한결같은 투지와 열정을 불태우겠다는 다짐으로 또다시 새 다이어리를 결제하는 것도.

 

올해의 다이어리가 없다니! 처음에는 절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색하던 것도 잠시, 나는 금세 가벼워졌다. 그렇게 매일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모든 기록을 멈추게 되었다.

 

해방감을 만끽하며 지내다가 비로소 몇 달 전, 이전에 썼던 일기를 뒤적이다가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채워왔던 기록에는 단순히 어디를 갔고 무엇을 먹었는지를 떠나서 그때 나의 마음의 상태와 생각의 깊이가 담겨 있었다.

 

기록을 멈췄던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나는 비어 있었다.

 

영화와 책을 보고 가끔씩 떠오르는 것들을 적었던 휴대폰 메모장에 찍힌 마지막 날짜가 꽤나 아득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좋은 것들을 보고 다양한 감정 속에서 살았는데, 딱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나는 기록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연간 다이어리를 구매하지 않는다. 대신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고, 제멋대로 칸이 나눠져있지 않은 노트를 한 권 가지고 있다. 나는 아무런 의무도 없이, 채워야 할 칸이 없는 그곳에 가끔씩 들러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적어내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위로를 받고 원동력도 얻는다.

 

시간이 지나 읽어보면 다 제각각 다른 내용으로 시작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얇은 실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아마도 그 모든 것이 축적된 내가 쓰고 또 쓰기 때문일 거다. 나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나의 기록을 보지 않았어도 보고 있는 것과 같다. 적혀진 모든 것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까.

 

지금처럼 계속해서 나만의 기록으로 삶을 채워야겠다.

 

 

[김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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