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동화 같은 만남 [영화]

글 입력 2023.10.0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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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추석 연휴 동안 넷플릭스에서는 네 편의 단편영화가 공개되었다. <백조>, <쥐잡이 사내>, <독>,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이다. 생각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포스터는 예고편을 시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어딘가 특이한 파스텔톤 색감에 정갈하고도 좌우 대칭적인 구도, 그리고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동화 같은 분위기를 선사하는 익숙한 느낌. 감독의 이름은 웨스 앤더슨이었다. 그리고 이 네 편의 이야기는 로알드 달의 단편 소설집으로부터 나온 이야기였다.


이름만 봐도 대표작이 바로 떠오르는 두 사람의 특별한 만남, 그 만남이 이루어진 네 편의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하나의 작품에 깊이 들어가 본다.

 

 

 

백조 


 

동화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음에도, 전달하는 내용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것이 로알드 달의 이야기가 주는 매력이었다. 이 매력에 웨스 앤더슨 특유의 미장센이 더해지니 밝으면서도 심오한 느낌이 생겨났다. 네 편의 이야기 중에서 <백조>가 특히 그런 오묘함을 많이 담고 있다. 제목부터 하얗고 밝다. 등장하는 모든 배경 역시 밝은 톤을 유지하고 있고, 특정 시퀀스에서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다소 암울하다. ‘어니’, ‘레이먼드’라는 두 명의 소년이 ‘피터 왓슨’이라는 어린 소년을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내용이다. 괴롭힘의 정도가 상당해 잔인하다 느껴질 정도이다. - 여기서 웨스 앤더슨은 이 잔혹한 폭력을 절대 시각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내레이터이자 어른이 된 피터 왓슨이 담담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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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소년은 그들의 마지막 폭력 수단으로 ‘라이플총’을 사용한다. 죽은 백조의 날개를 잘라 피터 왓슨의 등에 달아준 뒤 높은 나무에 올라가게 해 총을 쏘는 것이었다. 총은 어린 소년의 허벅지에 명중했고, 그렇게 백조가 된 소년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붙잡고 있던 가지는 부러지고 만다.


여기까지의 상황만을 봤을 때는 ‘소년이 추락했을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겠지만, 잠깐의 블랭크 이후에 나오는 로알드 달의 내레이션은 그 뒤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어떤 이들은 궁지에 몰려 더 감내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그대로 꺾이고 무너져 포기한다.

하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아도 어째선지

절대로 꺾이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은 전쟁 중에도 평화로울 때도 눈에 띈다.

불굴의 의지를 지닌 그들은 고통이나 고문에도

목숨이 위험해져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어린 피터 왓슨도 그런 사람이었다.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애쓰는 동안

자신이 이길 거라는 확신이 문득 찾아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호수에 밝은 빛이 물결치고 있었고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빛은 그를 손짓해 부르며 끌어당겼다.

피터는 그 빛을 향해 몸을 던지며 두 날개를 활짝 폈다.

 

그날 아침 마을 상공을 나는 거대한 백조를 봤다는 이가 세 명 있었다.

교사, 잡화점 지붕 타일을 교체하던 작업자, 그리고 근처 들판에서 놀던 소년.



피터가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나뭇가지에서 바로 떨어졌다면, 그는 호수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피터가 발견된 장소는 본인의 집 뒤뜰이었다. 즉, 피터는 추락한 것이 아니다. 피터의 의지로 잠시나마 하늘을 날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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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 소설은 로알드 달이 신문 기사에서 접한 실제 사건에 모티브를 두고 있으며, 30년간 아이디어 북에 담아두고 있던 이 사건을 1976년 10월에 소설로 각색해 집필했다고 한다.

 

이렇게 두 명의 예술가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만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대로 표현했다. 그 덕에 우리는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잠시 작품 안에 남아 피터 왓슨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가 "절대로 꺾이지 않는 이들" 중 하나였음에 안도할 수 있었다.


아동 · 청소년 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로알드 달이 신문에서 처음 이 사건을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문득 궁금해지는 작품이었다.


*


<백조>를 비롯한 네 편의 단편영화를 볼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빠르게 넘어가는 해설을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희곡의 3요소가 서술자 한 명의 입으로 전달되다 보니 모든 요소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다소 바쁘게 느껴질 수 있다. 한 템포라도 놓친다면 극을 따라감에 있어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생길 수 있기에 유념해야 한다. (필자도 이 점 때문에 같은 부분을 몇 번 돌려본 적이 있다.)


또, 서술자가 극에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이다. 원작의 형태가 소설인 만큼, 영화를 ‘읽는’ 것처럼 감상하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싶다. 모든 대사를 책 읽듯이 말하고 있음에도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제 연극 무대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세트와 배우들의 과하지 않은 담백한 연기가 어우러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배경음악 없이 모든 오디오가 오로지 등장인물의 목소리로만 가득 차 있고, 전체적으로 빠른 속도의 전개로 인해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다고 말해두고 싶다. 하지만 <백조>는 17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탁월한 영상미와 가볍지 않은 주제 의식을 잘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웨스 앤더슨과 로알드 달이 만나 만들어 내는 신비로우면서도 깊이감 있는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볼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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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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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브륄
    • 요즘 넷플릭스에서 킬링타임용 영화 위주로 추천을 해줘서 색다르고 해석의 여지가 있는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이 글을 보고 딱 알맞는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내용을 기대하면서 영화를 즐길 수 있을지 명확하고 간결하게 적어주신 것 같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영화 추천 하나 받아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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