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영화]

역사소재 작품에서 기획자와 수용자 모두에게 필요한 자세
글 입력 2023.09.1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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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영화를 보았다. 콘텐츠로 가공될 때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는 소재인 만큼 마냥 영화의 흐름대로 감상할 수만은 없었다. 내 기준에서 역사 왜곡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보여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역사와 팩션(fiction과 fact의 합성어) 그사이 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전개되는 <천문>을 리뷰해 보려 한다.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라는 문장은 역설이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떠오르며 첫 장면이 시작된다.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는 100% 옳은 말이다.

 

실제 허진호 감독과 맥스무비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천문>은 세종이 높은 업적을 쌓은 장영실을 내쳤던 배경에 대한 추측과 상상력에서 시작됐던 작품이다. 세종이 장영실을 내관처럼 가깝게 뒀다는 기록, 자격루를 만들었을 때 기뻐했다는 기록을 읽었다. 두 천재가 만나 신분을 초월하는 신뢰를 가지게 된 과정을 궁금해하며 이야기들을 만들어 나갔다’ 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기록을 읽고 그 곳에서 소재를 끌어와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말을 감독이 직접 한다.

 

‘사실에 기반하여 영화를 만들었다.’와 ‘사실에서 소재를 가져와 이야기를 만들었다.’ 두 문장은 각각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의 재연’과 ‘영화적 재현’은 분명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감상 포인트를 덧붙인다. ‘역사 속 인물인 세종과 장영실을 다룬 이야기지만 현재와 비슷하다. 두 인물이 신하와 임금이라는 신분을 넘어 우정을 쌓는 과정을 관객들이 흥미롭게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사실의 재연이라면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실질적인 업적 위주로 나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군신관계를 넘어선 두 인물의 우정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것은 영화적 재현에 더 가깝다. 더 이상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첫 장면에 나오는 빈약한 문장으로 마지막 엔딩까지 보고 나니, <천문>은 팩션 영화 또는 허구적 이야기를 넘어 역사 왜곡의 문제점을 지닌 작품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상상력이 문제가 아니다. 단지 관객에게 설명이 부족했던 탓이다.

 

 
사료가 빈약할수록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는 식의 사고방식 자체가 상상 예찬 시대의 어두운 단면 아닌가. 이해 없는 상상력, 역사윤리의 닻을 잃어버린 상상력, 사실의 구심력을 잃어버린 상상력은 구심력 없는 원심력의 질주이며 역사적 사건 자체를 역사의 중력장에서 이탈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문학과 사회 2007년 가을호 발췌

 

 

군신관계를 넘어 우정까지는 상상력의 범위라고 할지라도,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건의 순서나 시기를 바꾸었다면 혹은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었다면 상상력이 더해진 왜곡이다.

 

영화의 말미에 장영실이 세종의 한글 발명을 옆에서 보고 이를 몰래 지지하는 내용으로 흘러간다. 과연 장영실이 한글을 만드는 데 기여했는가? 이것은 장영실이 한글 창제와 엮여 있었냐는 질문으로 다시 물을 수 있다.

 

세종과 장영실의 끈끈함을 나타내는 장면으로서는 좋았으나, 사료에 존재하지 않고 검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관객의 상상력을 끌어내는 것까지 좋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들은 은연중에 장영실이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영화를 시작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배급사 롯데엔터테인먼트는 천문 개봉일(2019년 12월 26일) 3일 전 역사 강사로 유명한 최태성을 내세워 ‘천문 길잡이 영상’을 업로드했다. ‘큰별 최태성 선생님도 믿고 보는 [천문: 하늘에 묻는다] ㄱ부터 ㅎ까지 다 알랴줌! 이게 바로 내 귀에 쏙쏙! 내 맘에 콕콕! 족집게 천문 강의 ‘천문 길잡이 영상’ 뚝딱 예습하고! 천문 보러 가자!’ 라는 코멘트와 함께였다.

 

장영실이 1442년 이후 증발하여 기록이 없으며 이듬해 1443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가 우연적 일치인지 연관성이 있지는 않은 지 인과관계적 답을 내릴 순 없지만 이에 대해 관객의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영화의 몰입을 위해 유명인을 내세워 설득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영화 말미에 장영실이 한글 창제를 지지했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무의식적인 설득 장치를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영상을 보지 않고 영화를 시청한 관객들은 인과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천문1.JPG


 

영화가 단순히 어떠한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역사 왜곡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영화는 사람들이 역사적 사건에 좀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확실한 역할을 한다. 다만 재미나 흥미로운 드라마적 요소는 러닝타임 안에서 끝맺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물론 관객들도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시청하는 관객들의 역사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주는 매체 중 하나라면 ‘사실의 재연’ 인지, ‘역사적 소재를 가져와 허구의 상상력에 기반한 이야기’ 인지 더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국내 역사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비록 상업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꼭 봐야 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강요되어 왔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기호로 작동한다. 소비는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어떤 상품을 소비하는가가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가치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한국사회 제12집 1호 발췌

 

 

역사영화의 소비가 개인의 역사의식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이어지는 현대사회다. 물론 단순히 여가 시간을 즐기기 위한 감상에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랏말싸미> 가 역사 왜곡 논란으로 불매운동이 일어났던 사건 등을 생각하면 전자의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역사 영화에 그런 가치를 두는 대중들에게 과연 기획자는 소재를 가져왔다는 말 뒤로 역사왜곡의 책임을 벗어 던질 수 있을까?

 

그렇기에 100% 온전한 ‘상품’으로 내놓은 영화가 아니라면 역사 소재를 기반으로 재구성하였다는 것에서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사료에서 비어있는 부분들을 채우거나, 원래 있던 사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들을 역사적 재연이라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박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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