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후기, 그게 뭔데, 어떻게 쓰는 건데 [문화 전반]
-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독후감 쓰는 것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별것 없었다. 쓸 말이 없어서다.
학창 시절의 독후감은 어느 정도 그 포맷이 정해져 있다. 책을 읽게 된 동기 2줄, 줄거리 10줄, 읽고 난 감상 3줄. 그렇게 총 15줄 정도를 채우면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힌다.
이 중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사실 그대로를 쓰면 되고, 줄거리는 좀 귀찮긴 하지만 적당히 정리해서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건 마지막 3줄이다.
10권의 책을 읽으면 그 중 '감상'에 쓸 말이 생각나는 책은 2권이 될까 말까였다. 따지자면 적중률이 형편없이 낮은 쪽이다.
어린 시절엔 이것이 글솜씨가 부족해서, 생각이 모자라서일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좀 나아질까 했건만, 오히려 과녁은 더 작아지기만 해서 적중률은 저하되는 수준이 아니라 수직 낙하했다.
수많은 책이, 공연이, 영화가 나를 스쳐지나갔지만, 남는 게 없는 기분이었다. 뭐라도 적어 보려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가 괜한 시간만 허비하는 일이 많아졌다.
많은 사람이 극찬하고, 후기를 남기고 있는데 나 혼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다. 다들 할 말이 많은데 나만 없다는 건 내가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썩 두렵지 않다. '후기'를 대하는 내 마음가짐이 달라졌으므로.
그전까지 후기는 항상 작품 전체를 '통달'해야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을 짚어 내고, 그 부분에 대한 감상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건 시험공부에 가깝지 않은가? 다음 중 이 작품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은 어디인가, 에 대한 대답이 후기는 아닐 텐데. 후기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3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단 한 문단만이라도, 100분이 넘는 영화에서 단 한 장면만이라도 나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면 그만이다. 그것이 그 작품 전체의 주제를 관통하는 부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한 문장, 한 대사여도 내게 와닿았다면 그 순간 '쓸 말'은 넘친다. 와닿았다는 것 자체가 내 마음속 서랍의 문을 한 개 이상은 열었다는 뜻이기에.
'쓸 말'이 없다는 것은, 그 작품이 다른 이들에게는 가 닿았을지언정 나에게는 오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부분에서 나에게 오지 못했는지를 주제로 생각해 본다면, 또 쓸 말은 생긴다.
나에게 후기란, 무엇이 나에게 왔고 무엇이 오지 않았는지를 정리하는 과정이다. 철저하게 나를 중심으로 한, 오히려 그 작품을 이용해 '나'를 알아보는 데 가까운 작업이다.
그 누구도 무언가의 절대적인 이해자가 될 수 없다. 모두가 각자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후기 역시, '객관적인' 삼인칭 관찰자 시점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 좀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얼마 전 쓴 후기를 들여다본다. 작품에 대한 내용은 없고 내 이야기만 줄곧 써두었으면서, 마지막에 가서야 작품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전체적인 주제라고 하기도 어려운, 작은 소제목 중에서도 또 작은 부분이다.
이게 후기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이렇게 생각한다. 그 작은 부분이 있었기에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그 부분이 없었다면 이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을 테니 이 글의 근원은 저 작품이 맞고, 그렇다면 이건 후기다.
다음 후기는 또 얼마나 내 얘기로 가득 차 있을까. 무엇이 왔고, 무엇이 오지 못했을까.
후기란 생각보다 즐거운 글쓰기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절대로 쉽지는 않지만.
[유지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