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현신하는 예술가, 그의 몸을 파헤치다 ②

관조의 역설을 보여주다
글 입력 2023.09.0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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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방가르드', '한국의 실험미술'이 요 근래 미술계의 파란이다.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져서인지, 가치를 아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선전 덕분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미술을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로 '실험미술'이 자리잡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다.


주류에 대한 반동, 반동에 의한 먹이사슬의 재조정과 그로 인한 혼돈. 이 일련의 과정은 문화권, 정치 형태, 산업 사회 등 인간 군상의 여러 형태를 가리지 않고 적용할 수 있는 사회 변동의 원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현상을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미술이다.


오늘 짚고 싶은 바는, '한국'에서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왕성히 활동했던 예술가들 중 한 인물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들이 담고 있는 사회적 가치이다.


대한민국은 국가 주권의 침탈과 이념에 의한 민족 분열이라는 두 번의 거대한 시련을 지나 비로소 설립된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다. 주장하는 자가 힘을 얻을 수 있고, 국민의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드디어 권리를 되찾은 국가의 주인이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단히 강한 국민 주권이 보장되는 환경이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한국의 국민은 또다시 누군가의 간섭을 받고, 힘 있는 자들로부터 억압을 받아야만 했다. 의지와 권리는 늘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갈피를 잃은 사회는 혼돈스러웠다.


1960-70년대는 군사 정권이 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 정부는 '민족성'을 국가의 지향으로 삼는다. 외세의 간섭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국가의 힘을 강성히 하겠다는 취지였다.


정부의 의지와 취지는 한국의 급진적인 경제 성장을 낳았지만, 그 외 국민의 모든 권리를 억압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국민은 1960년 4월 19일 이후 얼마 있지 않아 또다시 수립된 독재정부에 의해 무력감을 느꼈다.


국가에서 미술을 지원하기 위해 개최하던 '국전'-한국 국내 작가들의 활동과 작품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시상하던 일종의 미술대회-의 심사 기준도 정부의 경향을 따랐다.


국전의 심사 경향 고착화는 한국의 미술을 부흥하던 이전 국전의 역할과 목적을 흐렸다. 서구의 것과 관련이 있는 미술적 경향은 국전에 의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대상의 묘사, 민족적인 주제만이 국전의 수상을 받았다. 국민의 미술 향유를 보장하는 유일한 통로였던 국전은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억눌린 시대 상황, 거듭되어 온 피지배. 한국의 작가들은 새로운 것을 탐구했지만 '한국성'이라는 슬로건 아래 짓눌려야 했다.

 

*

 

독재 정권 치하의 모든 체계와 관습을 탈피하고자 한국의 작가들은 실험적인 미술을 행한다. 서구에서 두 번의 크나큰 전쟁 이후 모든 지성 구조와 사회적 관습을 벗어나 새로운 체계를 정립하고자 아방가르드가 출현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의 아방가르드. 지금의 우리는 그 시절 그들의 시도들을 '한국의 아방가르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 또한 그들이 가진 정체성을 아방가르드라 정의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의 'AG', 즉 아방가르드 그룹은 미술인들이 모여 만든 그룹이었다. 그러나 단지 화가들만의 모임은 아니었다. 문학가와 평론가를 포함한 여러 예술인들이 힘을 합치는 장이었다.


아방가르드 그룹의 구성원들은,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그림을 그려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는가 하면, 아예 세상의 요구로부터 유리된 예술을 통해 관중들의 잔잔한 의식 속에 물음표를 던졌다.


그리고 그 주요 구성원 중엔 이번 시리즈의 주인공인 '이건용' 작가도 포함되어 있다.


캔버스를 벗어나야만 미술의 전위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시도를 사회적 시선이나 체계에 굴하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의지 자체에 큰 가치가 있다. 한국은 캔버스 위, 또는 그릴 수 있는 대상 위에 작품을 구현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시간동안 미술 표현의 정론으로 여겨왔다. 몸으로 행위하는 미술,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일시적으로 만들어내는 해프닝 미술은 당대 한국인들에게 다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이건용 작가는 기존 미술계의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신체를 활용한 여러 예술가들 중 하나다. 눈에 띄는 특이한 점은, 그가 시도한 것이 미술 밖에서 미술을 바라보고자 한 의도였으나 미술을 관통했다는 점이었고, 세상과 유리된 철학과 의견을 작품에 담았지만 세상의 눈을 잡아 끌 수밖에 없을 만큼 도발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이건용 화백, 바디 스케이프.jpg
@갤러리 현대

 

 

그의 대표작으로도 불리는 '신체 드로잉' 연작은 그가 '미술을 미술 밖에서 바라보고자' 한 시도이다. 그는 신체의 기능을 제한하는, 즉 눈을 가리거나 팔의 가동 범위를 제한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신체와 평면이 맞닿는 형상을 만든다. 이러한 시도는 역설적이게도, '그리는' 행위 자체에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미술이 해 왔던, '생각하고 그리는 것'의 부작용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 형성되는 소통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는 '사유'의 중점화.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아카데미즘과 사상들이 가려왔던 진짜 '그리기'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저 그리고, 그 것의 의미를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소통하며 각자의 새로운 의견을 형성하고. 이 일련의 과정으로부터 창출되는 미술의 가치를 이건용의 '신체 드로잉'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시도는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기도 한다. 위에서와 같이 '신체 드로잉' 연작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명확하다.


'신체 드로잉' 작품은 작가의 신체 '제한'을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당시 정부는, 국민의 활동 범위를 제한하고 미술의 발전 방향을 돌려 '한국성', 또는 '민족성'의 확립을 도모했다. 이건용 작가가 그리기 위해 '제한하는' 방법,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은밀하지만 대담하다고 느껴질 법한' 소통의 형식은 당시 정부의 입장에서 불온한 정서를 조장하고 그들의 행태를 꼬집는 행태로 간주된다.


이건용 작가는 정권의 의심을 받아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고,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그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기도 한다. 그가 시도한 것은 세상에 실질적으로 말하거나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시위' 행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열정적인 투쟁의 현장 속에서, 팔짱 끼고 그저 관조하다가 내뱉은 한 마디. 그리고 투쟁하던 양측이 모두 조용히 그를 응시하게 되는 현장을 체험하는 듯하다.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원하는 바도 없어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확실히 가지고 있던 '주체성'. 그것이 바로 이건용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다음 챕터에서는 서구에서 그를 주목하게 된 과정을 톺아볼까 한다.

 

 

[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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