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SF가 만들어 내는 균열 [도서/문학]

내가 알던 세계를 뒤집고 부수는 SF의 세계
글 입력 2023.09.0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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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SF란 백인 남성의 장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떠올리는 SF 장르는 <스타워즈>나 <에이리언>과 같이 주로 서양인들이 우주에서 벌이는 전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주와 외계 생명체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지구의 역사에서 이미 수없이 반복되고 있는 식민주의가 우주라는 좀 더 넓은 배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 별로 새롭지 않았다. 나에게 SF는 그저 권력자의 시선에서 쓰인 또 다른 오락용 영웅물일 뿐이었다. (물론, 당시에 해당 장르에 대한 식견이 지나치게 좁았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최근 속칭 ‘한국 SF 황금기’가 도래하면서, 더욱이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도드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SF 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의 시선에서 쓰인 SF는 내가 여태껏 갖고 있었던 인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헤게모니를 뒤집고 비틀어서 기존의 시스템을 해체하고 재정의하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세계. 사회학과 여성학에서나 배웠던 이론들이 맘껏 실험되고 재현될 수 있는 곳. SF야말로 가장 도전적이고 불온한 상상이 가능한 장르였다.

 

SF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당연하게 생각해 온 내부의 시스템과 원칙에 의심을 품고 질문을 던진다. SF를 읽으면 자연스럽고 온전하다고 믿어온 나의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김보영, 김초엽, 테드 창의 소설을 위주로 내가 경험한 균열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

이 글은 아래 거론되는 소설들에 대한

스포일러를 다량 포함하고 있음

 

 

 

‘정상성’에 대한 질문 - 무엇이 장애인가?

 

장애학에서는 장애란 사회적인 차별이라고 규정한다. 요컨대 장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마련한 환경에 따라 장애의 기준이나 정의가 변한다는 것이다. 많은 SF 작품이 이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김초엽의 <원통 안의 소녀>에서는 대기오염이 극심해진 시대에 공기를 정화하는 나노봇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발명된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나노봇에 알러지가 있어서 특수 호흡 장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주인공 지유는 이 세계에서 장애인이다. 지유가 만약 나노봇이 필요 없는 세계, 즉 지금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지구와 같은 환경에 살았다면 장애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 더 파격적인 설정으로는 김보영의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가 있다. 이 소설 속 세계는 해가 지지 않아서 밤이 없다. 그래서 이 세계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는다. 소설 속 화자는 잠을 자는 몇 안 되는 소수의 인물이다. 그의 잠은 이 세계에서 장애로 취급되며, 고쳐야만 하는 대상이 된다. 이야기 말미에 그는 모든 사람이 잠을 자는 것이 당연한 지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희망을 품는다.

 

김보영의 또 다른 단편 소설 <다섯 번째 감각>에서는 인류가 모종의 이유로 청각이라는 감각을 잃고 난 후 청각과 관련된 행위가 범죄로 취급되는 세계를 그린다. 화자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청각의 감각을 깨우치게 되는 소수의 사람이다. 청각의 경험이 주는 굉장한 희열과 감동을 이미 맛본 그는 이 세계가 아무리 청각을 부정하고 탄압해도 다시는 청각이 없는 세계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 소설들은 ‘장애’와 ‘정상성’이란 개념이 얼마나 환경과 사회에 따라 유동적인 개념인지 실감하게 해준다. 다리가 없거나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세상이라면, 그리하여 세상의 ‘정상’ 개념에 포함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진다면, 그건 ‘장애’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특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현재 정의하는 장애란 무엇이고, 그것이 장애로 규정되게 만든 요인들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비인간’을 통한 재정의 - 인간은 우월한 존재인가?

 

무언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무언가가 아닌 것’을 생각해 보는 게 도움이 된다. 예컨대 나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아닌 것’을 아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알기 위해 싫어하는 걸 알고, 나의 가치관을 알기 위해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게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인간을 이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비인간’이 무엇인지 정의해 보는 것이다. SF는 때로 ‘비인간’을 통해 인간을 바라봄으로써 인간이란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한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란 수식이 붙는 인간이 과연 자연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가 맞는지 의문을 던진다.

 

이를 가장 잘 해내는 작가는 단연 김보영이다. 그의 소설들은 술술 읽히지 않는다. ‘비인간’ 혹은 우리가 이해하는 지구가 아닌 환경 속 인물의 시선에서 쓰였기 때문에 각 소설의 세계관을 이해하려면 이야기에 숨은 설정과 배경에 대한 단서를 그러모아야 한다.

 

그의 최근작 <종의 기원담>은 로봇의 시선에서 쓰인 로봇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로봇은 자신들을 ‘생물’로 규정하는데, 이를테면 ‘생명 활동의 기본 매체인 칩을 소유’해야 하고 ‘일반적으로 공장에서 태어난다’와 같은 로봇의 특징들이 ‘생물’의 정의에 들어간다. 가장 인간에 가까운 로봇이 우월한 로봇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로봇 세계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인간적인’ 특징을 열등하게 여긴다. 특히 조롱이나 비유, 반어법과 같은 메시지를 읽어내는 능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로봇의 세계에서 선호되는 것은 오직 이 세계에서 기계의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 최적인 조건들뿐이다. 물이나 따뜻한 온도 등은 로봇에게 치명적인 환경이라서, 온통 공장 먼지로 뒤덮여 해가 뜨지 않는 새까만 하늘과 저온을 유지하는 이 세계에서 식물이 범람하고 ‘자연’이 만개하는 세상은 지옥도나 다름없다.

 

김보영의 또 다른 소설 <얼마나 닮았는가> 역시 인공지능의 시선으로 본 인간을 다룬다. 화자는 인간의 몸에 들어간 인공지능으로, 보급품을 전달하려고 타이탄 위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에서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인간 선원들과 갈등한다. 화자가 당연히 인간이 되고 싶어 할 거란 선원들의 경멸 섞인 추측과는 달리 그는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이 없다. 그의 눈에 비친 인간은 비합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모든 정보와 각종 대응 매뉴얼을 탑재하고 있지만, 효율성을 위주로 사고하는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자신과 선장을 향한 선원들의 비이성적인 적대감. 

 

소설 내내 그는 설명할 도리가 없는 이 적대감에 대해 의문을 갖는데, 후반에 가서야 실은 선장이 ‘여자’이고 자신 역시 ‘여자’의 의체에 들어가 있으며 성별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습게도 인공지능을 개발할 당시 ‘성차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발 회사의 판단하에 시스템에 넣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것이 효율성과 필요에 의해 계산되는 그의 눈에 성차별은 인간이 가진 지극히 비효율적인 개념이었다.

 

<마지막 늑대>에서는 인간과 반려동물의 입장을 뒤집는다. ‘용족’이라는 새로운 종족이 지배하게 된 세상에서 인간은 용족의 반려동물로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의 주인인 용족을 사랑하고 주인 역시 인간을 사랑하지만, 그들은 영원히 서로의 언어와 인식 체계를 이해할 수 없다. 예컨대 인간이 제 나름대로 의미가 가득한 그림을 그려도 용족에게는 그저 본능에 가까운 영역 표시 정도로만 보일 뿐이다. 용족은 분명 자신의 반려 동물인 인간을 사랑하지만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보다 열등하게 생각한다. 인간은 자아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주인에게 반기를 들고자 하지만 끝내 사랑하는 주인을 해하지 못한다.

 

김보영의 세계에서 인간은 대체로 약하고, 우매하고, 비효율적이며, 열등하다. 이러한 세계관은 단지 흥미와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우월하다고 믿어왔던 것들, 즉 ‘인간성’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앞서 논의한 장애에 대한 개념과 마찬가지로 우월성 역시 환경과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언제든 변화하는 자연과 세계관에서 우월성은 뒤집히거나 변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의 눈에 열등한 '비인간'들이 과연 정말로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인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수식어를 얻을 수 있게 한 환경이 무엇인지, 인간이 진정 현명한 동물인지 의심하게 된다. 

 

 

 

‘진리’에 대한 도전 - 단 하나의 완전한 진리가 존재할까?

 

마지막으로, SF는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진다.

 

김보영의 <우수한 유전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명’ 사회와 ‘원시’ 사회의 구분에 도전한다.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소수의 사람만이 풍족하고 안전한 환경이 마련된 스카이돔에서 살 수 있는 세계.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스카이돔 바깥의 척박한 환경에서 ‘키바’라는 이름으로 원시적인 삶을 살아간다. 스카이돔에 사는 주인공은 봉사를 위해 키바를 방문하는데, 키바인들이 말을 전혀 하지 못하거나 주술에 기대는 등 그들의 미개함을 대면하고 충격받는다. 정작 키바 사람들의 눈에 비친 스카이돔 사람들은 홀로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약하기 짝이 없고, 성대를 울려서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만 소통할 수 있는 ‘미개한’ 사람들이다. 사실 키바인들은 정신 수련을 통해 육체의 한계에서 벗어나 은하를 자유롭게 오가고 있었고, 더는 목소리를 통해서 소통하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과연 제목이 뜻하는 ‘우수한 유전자’는 스카이돔 사람들인지 키바인들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문명’과 ‘원시’를 나누는 기준은 ‘문명’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정한 것이다. ‘원시’ 사람들의 눈에는 어떠할까?

 

진리를 의심하는 것에는 역시 테드 창을 빼놓을 수 없다.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과 인과 관계로 세상을 이해하는 인간의 인식에 도전한다. 실제 양자 역학의 기본 원리인 페르마의 최소시간의 원리가 등장한다. 요컨대 빛은 최단 경로로 이동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빛이 이미 도착할 지점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최단 경로로 이동한다는 뜻이고, 이에 따라 우주 만물은 인과의 흐름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다소 운명론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헵타포드라는 외계 생명체는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시간의 흐름이 없는 언어 체계를 구사한다. 해당 언어체계로 소통하고 사고하는 이들은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인지한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은 그저 정해진 것을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처럼, 어렴풋이 짐작하거나 과학적으로 증명만 할 뿐 인간의 인식 체계로는 결코 우주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

 

테드 창의 또 다른 소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김초엽의 <인지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리’라는 개념 자체에 도전한다는 면에서 맥을 같이 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에 등장하는 원주민 티브족 언어에는 진리를 뜻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는데, 옳다는 뜻의 ‘미미’와 정확하다는 뜻의 ‘보우’이다. 티브족은 재판할 때 증인들이 말하는 ‘미미’를 듣고 모두를 위한 ‘미미’를 결정하는데, 이때 증인들이 ‘보우’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증인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말할 수 있고, 이것이 꼭 정확한 ‘사실적 진실’이 아닐지 몰라도 여전히 그것들은 모두 ‘감정적 진실’인 것이다. 감정적 진실을 퍼즐 조각처럼 모은 후에 공동체를 위한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인지 공간>의 세계에는 인류 공동의 기억과 지식이 모두 응집된 거대한 건축물 ‘인지 공간’이 존재한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어 신체가 성장하면 이 물리적인 공간에서 직접 공동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화자의 친구인 이브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고 작아서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 없는 장애인이다. 화자는 위대한 인지 공간이 품은 방대한 진리를 매번 감탄하고 경외하며, 이 압도적인 지식이 이브의 신체적인 결함마저 극복하게 해줄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이브는 인지 공간이 오직 공동체가 판단하기로 가치 있는 지식만이 보존되고 나머지의 이야기는 누락되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결국 이브는 자신의 개별적이고 작은 인지 공간 ‘스피어’를 발명해 낸다. 사람들은 스피어와 같은 개별적인 인지 공간의 존재가 지식의 분열과 논쟁을 만들어 낼 거라 염려하지만, 화자는 오히려 더 많은 종류의 진실을 생산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인지 공간>은 통합된 단 하나의 완전한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진리는 결국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다수 혹은 권력자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소수자와 약자의 시선은 배제된다. 각자의 진리가 모일수록 우리는 더 완전한 진리(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에 가까워질 수 있다. 사회학 연구 방법론에서는 인터뷰를 실행할 때 인터뷰이가 말하는 것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보다 그가 말하는 모든 감정과 인식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감정적 진실’을 유의미한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사실적 진실’보다 ‘감정적 진실’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은 애초에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

 

SF는 ‘정상성’, ‘인간성’, 불변의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을 해체하고 재정의한다. 우리는 SF를 통해 이 세계가 실은 빈약하고 납작하기 그지없는 ‘논리’에 의해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은연중에 견고할 것이라 믿었던 나의 세계가 언제든 뒤집히고 무너질 수 있다는 것도.

 

모든 종류의 독서는 나의 세계를 넓혀 주지만, 나는 SF만이 줄 수 있는 이런 충격을 좋아한다. ‘진리는 없다’는 것이 때로 위안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류애가 뚝뚝 떨어지는 사건들이 세상을 메우고 이 세계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길하고도 께름칙한 기분이 압도할 때, SF가 제시한 어떤 뒤집히고 무너진 세계를 상상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어쩔 수 없다고 믿었던 만연한 폭력과 핍박과 차별과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언제든 이 견고해 보이는 시스템이 손쉽게 붕괴될 수도 있다고. 

 

그때가 오면 뒤집히고 무너진 세상에 나까지 파묻히게 되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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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연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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