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적 겨울을 기다리며 [문학]

김상혁, <불과 행운> 외
글 입력 2023.08.24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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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듯 햇볕을 내던지던 하늘이 잔뜩 굳은 얼굴로 며칠째 비를 뿌린다. 입추가 지나고 처서, 끝날 것 같지 않은 여름의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하늘을 올려다본 인류의 지혜 덕분인지, 땅을 내려다본 하늘의 자비 때문인지, 어쨌거나 인간이 구획한 절기에 맞춰 하늘이 제때 몸을 비트는 것은 언제나 놀라운 일. 지독한 여름의 무더위 속 땀에 절어버린 몸은 이제 짧은 가을을, 그리고 다시 겨울을 기대한다. 매정한 추위와 함께 겨울이 오면 오늘의 무더위를 그리워할 일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또 겨울을 기대하고, 어떤 시인은 겨울의 풍경으로 충만한 시를 쓴다.

김상혁의 시 몇 편을 읽는다.

 
공원에 다 같이 모이니 좋구나, 힘 난다, 누가 놓았는지 모를 모닥불이 타는데. 흙더미에 파묻힌 손목 당겼더니 죽음이 벌떡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듯, 살아서 모이니 좋구나, 가족처럼 흥이 난다. 아무것도 아니어서 즐겁고 불안한 시절 숲속에 버려두고. 길고 넓은 포장도로 건너오며 다 잊으니 좋다, 연말 아스팔트 깨는 드릴처럼 신이 난다. 한밤 모여서 불을 쬐니 좋구나, 같이 먹으니 모처럼 기운 난다.

- 「불과 행운」 중에서
 
 
사람들과 공원에 모여 “누가 놓았는지 모를 모닥불”을 쬐는 화자는 “힘”을 내고 있다. 야외에서 불을 피우고 있으니 겨울일 것이고, 모이는 것으로 힘이 나니 추운 날씨일 것이다. 쌀쌀한 겨울이지만 화자는 어쩐지 한껏 신이 난 모습인데, “즐겁고 불안한 시절”마저 “버려두”고, “돌아갈 생각”마저 “잊으”면서 사람들은 한데 모여 체온을 나누기 때문이다. 매섭게 추운 겨울, 화자에게는 누군가와 함께 “모여서 불을 쬐”는 것이 “죽음”마저 극복할 수 있는 위대한 행위로 느껴진다. 이러한 공동의 “기억은 다 같이 착해”지고, 축적된다. 

추운 겨울 한데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온기로 사랑을 채우는데, 이 행위는 사람이 사람의 체온마저 미워하게 만드는 다음해 여름 더위를 극복할 힘을 쟁여두는 장면처럼 보인다. 이처럼 시인에게 겨울의 미덕은 체온의 공유가 가능해진다는 사실일 테다. 그러나 겨울을 사랑하는 시인도 그 차가움과 코끝을 베는 날선 공기 자체를 무시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시인은 겨울이 두루 체온을 나눌 수 있는 포근한 계절임을 믿지만, 체온을 나눌 수 없는 외로운 이에겐 두려운 계절이라는 사실 역시 정확히 인식한다.

 
겨울 같은 사람이
빛나는 밤이 있나

나 건드리기만 해봐
내 새끼 잘못되기만 해봐

칼 같은 마음 칼날부터 쥐고 걷는
겨울 같은 사람이 빛나는 밤길도 있나

- 「겨울 같은 사람이 빛나는 밤」 중에서
 

해가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겨울에 어떤 이의 외로움은 한결 깊어진다. 시인은 겨울의 그 어둠 속을 간절히 관찰하면서 “겨울 같은 사람”들을 발견한다. 남을 찌르진 못해 “칼날부터 쥐고” 자신의 손을 상처내면서도 그 “칼 같은 마음” 차마 내려놓을 수 없는 이들. 예컨대 함께 ‘모닥불’을 쬘 수 없어 “겨우 살아 있는”, 그래서 겨울에 특히 추워지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시인은 대답이 명쾌할 수 없는 “가난한 생각”을 여러 번 던진다. 겨울에도 “별처럼” 밝은 따스함을 “들이미는 어둠”이 존재하는지. “겨울 같은 사람이 빛나는” 그런 어둠이 있긴 한 건지. 시인의 고민은 그런 어둠을 찾아 우주까지 날아간다.

 
공포가 깊고 슬픔이 얕아서 도망치는,
겨울 같은 사람 빛나는 우주가 있나

검은 생활을 올려다보는 겨울 같은 사람이
빛나는 더 짙은 밤이 남아 있나
 

슬픔보다 “공포가 깊”어 “도망치는” 어두운 이들을 빛내기 위해 차라리 겨울밤보다 더 “짙은” 우주의 밤으로 상상을 뻗치는 이런 시는 겨울에 유난한 별자리처럼 빛난다. 누군가의 “검은 생활을” 따뜻하게 내려다보고, 그들을 품어줄 광활한 우주를 “올려다보는” 시인의 시선을 사랑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어쩐지 시인 자신은 자책감을 느낀다.

 
사랑이 충만했으나
그의 잠은 깊었으며, 막 깨어나 주변을 둘러보았으며,
그는 별빛 아래서 여전히 어리둥절함을 느낀다.

수많은 사람이 편의점 앞에 버린 오물들 쌓여 나무에 열이 올랐으며,
뿌리가 다 상하도록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며, 늦은 오후에 그는
빛살에 뒤엉킨 구름이 이 세계를 구원할 커다란 발을 내밀어줄 것만 같다.

- 「지구」 중에서
 
 
시인은 너무 늦게, 잠에서 이제 “막 깨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던 자신의 느림을 탓한다. “사랑이 충만”했으나 시간의 어긋남은 치명적이어서 누군가는 이미 “뿌리가 다 상하도록” 방치된 것. 그렇게 자신의 늦음을 깨달은 시인은 “어리둥절”하며 “세계를 구원할 커다란 발”을 기다릴 뿐이다. 허탈한 마음에 “듣고 싶은 말이 없”고 “마음을 다해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도 없”게 되어버린 시인은, 처절한 반성의 시간을 갖기 위해 고행의 길로 나아간다.

 
생각하며, 종일 폭우였으나 죽은 나무에서 쏟아지는 검불을 밟고 더 나아갔으며,
목마르고 배고팠으나 수많은 진열장을 그저 지나쳤으며, 막 태어나 울음이 터진 자기 아이를 어서 가서 안아주리라 마음먹는다.
 
 
“폭우” 속에서 “검불을 밟고 더 나아가”면서, 목마름과 굶주림을 참고 음식이 쌓인 “수많은 진열장”을 “그저 지나”치면서, 시인의 험난한 반성이 도달한 곳은 사실 “모두의 주머니 속에서” “조심스럽게” 굴러가는 우리의 “지구”이다. “실은 어둡고 조용한 그의 방”이다. 계절이 바뀌듯 우리의 온기도 위기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겨울의 모닥불처럼 “울음이 터진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주겠다는 마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원의 전부라는 것. 우리의 행성은 그런 사소한 따뜻함으로 계절을 견뎌 겨우내 살아간다는 것. 그런 인식 하나는 분명 겨울의 매서움을 한 꺼풀 벗겨낸다.

계절의 감각을 뒤바꾸는 것 또한 시가 하는 일이다. 물리적 거리 너머 시적 거리에서 여름은 차갑고, 겨울은 오히려 따뜻하다. 그런 겨울을 시인과 함께 기다리면서, 서늘한 여름의 끝자락에 안녕을 고한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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