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효율적인 것으로부터 있는 힘껏 멀어지기 [문화 전반]

모든 것이 쉬워지는 세상에서 어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 되기
글 입력 2023.08.12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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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길거나, 느리거나, 어렵다.

 

그러니까 비효율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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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방영 시간에 맞춰 TV로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한다.

 

OTT 플랫폼에선 한날한시에 전체 에피소드를 공개하는 추세다. 방영 중인 드라마도 OTT 플랫폼에 올라오길 기다렸다가 1.5배 속으로 빨리 보거나 건너뛰기를 하면서 본다고들 한다. 드라마 전체 내용을 한두 시간으로 요약해 주는 유튜브 콘텐츠나 핵심 명장면만 뽑아주는 숏츠가 넘쳐나는 요즘은 애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드라마를 제대로 보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모두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해치우기를 원하는 시대에, 나는 꼬박꼬박 방영 시간이 되면 TV 앞에 앉아서 중간 광고까지 견뎌내며 1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시청하는 걸 더 좋아한다. 이렇게 시청하면 첫 방부터 완결까지 16부작 미니시리즈 기준으로 대략 2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그 기간 동안 극중 인물의 여정과 그 안에서의 성장을 함께하는 게 좋다. 경험상 하루 이틀 만에 드라마를 몰아보면 그 순간 몰입하는 즐거움이 있기는 하지만, 인물이 변화하는 시간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다. 나의 생각과 경험이 깃들 시간조차 없는 것이다. 빠르게 본 드라마는 빠르게 잊힌다. 그래서 나는 옛날 고지식한 방식으로 느리게, 다음 주 내용을 기대하고 예측하기도 하면서, 몇 달 동안 드라마 한편을 곱씹고 음미하는 것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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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한다.

 

실용 지식은 유튜브에서 내로라하는 강사들의 명강의를 통해 편하게 습득할 수 있고, 더없이 재미있고 기발한 이야기들은 OTT 플랫폼에서 클릭 한 번이면 원 없이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영상 콘텐츠에 비하면 책은 훨씬 능동적인 참여를 요구하고, 지식과 이야기를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영감과 지식은 오롯이 내 것이기 때문에 더욱 단단하게 쌓인다. 아무리 공부 잘하는 친구의 깔끔한 정리 노트를 본다고 해도 내가 직접 정리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처럼.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좋아한다. 종이책은 자리를 차지하고, 쉽게 망가지며, 가지고 다니기에도 번거롭다. 관리가 어려움에도 나는 종이책의 물성이 주는 신뢰감을 좋아한다. 내가 책의 어디쯤을 읽고 있는지 느끼면서 남은 쪽수가 줄어드는 것을 감각해야 나의 ‘읽음’이 실존하는 것만 같다. 책이 책장 속 공간을 물질적으로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도 좋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내가 모으고 읽은 책들에서 내 삶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기도 한다. 책장에 쌓인 종이책의 물성만큼 그것들이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든든하게 차지하고 있을 거라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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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

 

클래식은 대개 1시간에 육박하는 시간을 견뎌내야 겨우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위대한 작곡가가 남긴 음악의 선율을 잠자코 따라가야만 맞이할 수 있는 환희와 깨달음이 있다. 이를테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에서 40여 분 동안 켜켜이 쌓여가는 감정을 제대로 음미해야만 3악장 피날레에서 극복과 승리의 희열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그 순간이 되면 그것을 향해 달려온 그간의 과정까지도 모두 사랑하게 된다.

 

이렇듯 기나긴 곡을 차분히 들어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에 클래식 공연은 다소 엄격하고 고지식하다는 인상이 있다. 소리에 민감하게 설계된 콘서트홀에서 마이크 없이 악기의 생소리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실제로 최소 1시간 반 동안의 공연 내내 겨우 숨만 쉬며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한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아야 하는 등 사전 지식 없이는 지키기 부담스러운 규칙도 있다. 나는 이런 클래식의 엄격함과 고지식함을 좋아한다. 위대한 음악에 대한 존경과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감수하는 불편함마저도 클래식을 숭고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바치는 내 시간과 애정은 또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클래식은 어렵다. 가사도 없고 표제도 없기 일쑤며 스토리도 대부분 없어서 처음 들을 때는 참 막연하다. 그러나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클래식 음악 감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유한 경험이 될 수 있다. 나에게 이별곡인 것이 누군가에겐 첫사랑에 대한 곡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음악을 언제, 어디서, 어떤 심리 상태로, 누구와 들었는지에 따라, 나만의 감상과 기억으로 그 음악을 오롯이 품게 된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과 다를 수밖에 없다. 더 애틋한 마음으로 나의 음악을 아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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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느리고, 어려운 것은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모든 것이 빨라지고 쉬워지는 요즘 세상에서는 고지식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미련하리만치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렇게 힘들게 얻은 것만이 자유와 고유성을 주기 때문이다. 

 

자유는 꽤나 귀찮고 번거로운 것이다. 여백이 주어지는 만큼 내가 손수 그곳을 채워야 한다.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야 할지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나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적극적인 탐구 끝에 나의 주관과 감성이 깃든 그림은 세상에 둘도 없이 고유하다. 

 

궁극에는 그 과정에서 쏟은 내 시간과 애정까지도 전부 사랑하게 된다.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 천천히, 어렵게 얻어낸 것들에는 나의 마음이 켜켜이 녹아 있다. 매주 다음 회차를 기다리면서 드라마를 보는 것도, 무거운 종이책을 이고 지고 다니면서 읽는 것도, 클래식 공연에서 잠자코 앉아 실황을 감상하는 것도,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이유다. 

 

그런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이미 여백 없이 완성된 그림에는 만족할 수가 없다. 그런 것에는 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고, 빠르게 익힌 것은 빠르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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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고백하자면, 이런 나에게도 요즘 범람하는 숏츠의 유혹은 매우 강력하다. 읽고 싶은 책을 열심히 쌓아두고서도 말초적인 영상 콘텐츠의 유혹에 빠지는 바람에 책은 한줄도 읽지 못하고 잠드는 밤이 많아지고 있다. 휴대폰을 키고 유튜브 앱을 누르는 순간, 그날 독서는 거의 망한 거다. 짧고 강렬하면서도 쉽고 재미있는 콘텐츠의 세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보다 유혹적이다.

 

그럼에도, 간신히 종이책을 집어들고 읽게 된 날은 ‘역시 이거지’ 싶다. 내가 정말 온 마음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야. 나라는 사람을 가득 채워주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지. 그리고는 하루를 마무리하기 딱 좋은 곡, 이를테면 조성진의 쇼팽 소나타 2번 3악장을 틀고 이불 속에 들어가서 책을 마저 읽다 잠드는 것이다. 

 

나는 계속 애쓸 것이다. 효율적인 것들로부터 나의 자유와 고유성을 지켜내기 위해, 모든 것이 너무 쉽고 빨라지는 세상에서, 어렵고 느린 것을 더 있는 힘껏 사랑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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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연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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