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나는 여전히 갈색 색연필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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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토끼 반 시절 그림 그리기 시간. 원하는 소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창작 수업이었다.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있던 나는 여행에서 봤던 해바라기를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색칠하던 중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색다르게 표현하고 싶었던 나는 갈색 색연필로 점을 하나씩 찍어 흙의 질감을 표현해냈다. 사실주의 기법에 잔뜩 몰두하고 있던 그때, 같은 반 애 하나가 내 그림을 보고 물었다.
뭘 그리고 있는지, 왜 흙을 그렇게 그리는 건지 의아하다는 투였다. 굳이 꽉 채워 색칠하지 않고 점을 하나씩 찍는 건 시간 아깝다는 식의 품평도 늘어놓았던 걸로 기억한다.
괜히 부끄러워진 나는 이미 빼곡히 쌓인 그림 흙을 갈색 색연필로 빈틈없이 메 꿔버렸다.
이십 년도 지난 지금도 그 일이 가끔씩 떠오른다. “내가 알아서 할게” 한마디를 야무지게 건네고 내 마음대로 해바라기 그림을 완성 했더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완성할 수 있는 아이로 커왔더라면…이라는 상상은 줄곧 나를 따라다닌다.
뒤를 향하는 시선, #추진력
나는 뒤를 자주, 많이 돌아본다. 토끼 반 시절부터 지금의 그 모든 순간들은 모두 내 양손에 들려있다. 그 시간을 안고 살아가는 만큼 후회도 생각도 많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있으면 온갖 부끄러움과 회환, 자기 연민, 자조, 때로는 기쁨과 행복까지 폭넓은 감정이 파도처럼 나를 거세게 찾아온다.
누군가는 말한다. 자꾸 뒤를 돌아보는 습관은 사람을 한자리에 머물러 있게 한다고.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뒤를 돌아보는 시선이 오히려 나를 더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고. 그것도 더 나은 방향으로.
토끼 반 시절에 대한 후회는 나를 좀 더 창의적이고 도전의식 강한 어른으로 만들었다. 대학시절엔 창업을 해 잠깐이나마 대표가 되어보기도 하고, 각종 공모전에 겁 없이 도전해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거머쥐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
‘부끄러운 것‘보다 ’포기하는 것’에서 오는 자괴감이 수십 배는 더 크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나에게 후회란, 추진력이기도 하다.
서른이 넘은 지금도 해보고 싶은 게 수십가지이고, 나는 여전히 갈색 색연필을 들고 열심히 흙을 그리는 중이다.
#더 잘해내고 싶어요
약 6년 전 병아리 직원 시절, 새로 부임한 대표님과 개별 면담을 진행했다. 성과만큼 직원들의 꿈과 목표에 관심이 많았던 대표님은 나에게 어떤 ’나‘가 되고 싶은지 질문했다.
곰곰이 생각하다 내뱉은 답변은 지금 내가 생각해도 참 욕심이 많은 것 같다. “장녀이자 언니, 손녀, 직장인, 친구 등 지금 제가 위치한 타이틀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고 싶어요.“ 대답을 들은 대표님이 ‘대단한 꿈이네. 쉽지 않을 텐데’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세상은 만만치 않고 내 뜻대로만 되는 건 별로 없었다. 예상을 비켜가는 것들을 쫓다가 다시 붙잡아와 내 품에 가둬도 어디론가 날뛰어 가는 상황이 반복됐다. 어쩔때는 헛웃음이 나오고, 어쩔때는 버스 창밖을 보다 눈물이 주륵 흐르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그때 대표님께 말한 내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의 나는 몇 년 전의 나보다 더 능숙하고, 침착하게 상황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또 내 운명인 것과 아닌 것에 대해 어렴풋이 구분할 줄 아는 식견도 장착했다. 안 되는 것에 도끼질하는 수고는 덜어도 된다는 뜻이다.
얼마 전에 몸소 깨달은 게 있다. 운 좋게 만나는 우연인 줄 알았던 행운도 사실 다 내가 만들어 가는 것. 그 사실이 요즘 나에게 가장 큰 힘을 준다.
내가 행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어떻게든 나한테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이, 해낼 수 있음에 그저 고맙다.
나는 지금보다 더 잘해내고 싶고, 그렇게 할 거다. 욕심 많고 마음 바빠 보여도 나름 자주 뒤에도 돌아보며 차근차근 신중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중이다.
나는 오늘도 열심히 후회하고, 도전하고, 다시 나아가서 내가 원하는 ‘나’와 반갑게 마주 볼 준비를 한다. 예쁘게 완성될 내 해바라기를 상상하며.
[김민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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