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하는 세상 – 연극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

글 입력 2023.06.24 12:2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포스터]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jpg

 

 

작년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초연된 바 있는 연극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이 올해는 제44회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으로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작품의 배경은 기후 위기가 인간의 사회정치체계를 바꾼 2060년대 근미래의 모습이다. 거듭되는 팬데믹으로 국가는 비공식적으로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정부가 있는 그룹인 ‘국가’는 빈부격차에 따라 1구역과 2구역으로 나뉜다.


1구역에서는 인공지능로봇 A·I·R(Artificial Intelligence Robot) (약칭 에어)가 인간이 기피하는 자리를 대신하며 인간과 함께 존재한다. ‘네크’는 통상 2구역에 해당되며 정부의 일부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모여 사는 대표적인 커뮤니티 그룹으로, 에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실망을 느껴 국가를 벗어나려는 인간 ‘이나’와 자아를 지녀 실험 대상이 될 위기로부터 도망친 에어 ‘지니’는 국가의 손이 닿지 않는 3구역에서 만나게 된다. 3구역은 사실상 국가가 자연재해를 관리할 수 없는 국가 바깥의 방치된 지역으로, 자연과 가까운 삶을 추구하는 선주민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사진 유한솔] (2022 공연사진-4)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jpg

 

 

이나와 지니가 처음 만났을 때 둘은 서로를 경계한다. 그러나 새가 먹다 남은 사과를 이나가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지니는 곧 경계심을 풀게 된다. 새가 먹던 사과인 것을 알고 이나가 사과를 독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듯이, 지니는 그러한 판단을 내린 이나가 위험하지 않은 존재라고 인식한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도록 설정된 비인간 지니 역시 이나에게 위험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주변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둘은 소소한 삶의 터전을 꾸려가며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더 이상 인간들과 살아갈 수 없다는 마음으로 국가와 네크를 떠난 이나가 ‘인간과 같이’ 자의식이 있는, 즉 ‘인간다움’을 가진 에어 지니와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세상에 다양한 가지각색의 인간상이 있음에도 이나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인간 전체에게 환멸을 느낀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아마 지니가 뒤늦게 이해했던, 인간들이 때로 침묵의 순간을 보이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변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대로였을 때, 기대가 깨졌을 때 사람들이 침묵을 하듯이, 그녀가 살아오면서 겪은 숱한 실망감이 인간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침묵 상태로 바꿔버린 것 같았다.



[사진 유한솔] (2022 공연사진-2)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jpg

 

 

지니는 동물어 학습 능력에 특화된 로봇이다. 이나는 지니에게 동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려달라고 하지만, 지니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음에도 인간의 말로 번역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동물들만의 고유한 소통 방식이 인간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인간 중심적 사고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나는 자신의 반려 앵무 BA가 생태교란종으로 지정되며 국가 내에서 키울 수 없게 되자 함께 살 방법을 찾기 위해 국가를 떠날 정도로 BA를 아낀다. 그럼에도 이나는 계속 자신의 말을 하려고 -심지어 인간의 언어로- BA와 대화를 시도하는 반면, 지니는 ‘들으려고’ 대화를 한다.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을 떠나서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른 것인데, 이는 인간 간의 소통에 오류가 발생하는 양상과도 비슷하다.


조만수 드라마터그의 글처럼, 커뮤니케이션이란 나와의 대화가 아니라 타자와의 대화이다. 타자의 언어를 읽는 것은 타자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마음, 즉 타자의 욕망을 읽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이나(인간), 지니(로봇)가 BA(동물) 간의 대화 상황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하는 세상에서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진 유한솔] (2022 공연사진-1)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jpg

 

 

무대 위 컨덕터와 디오라마는 첨단 기술 사회인 작품 속 ‘국가’의 통제와 감시를 상징하며 세계관의 이미지를 한층 강화한다.


디오라마는 풍경이나 그림을 배경으로 두고 축소 모형을 설치하여 특정한 장면을 만들거나 배치하는 것이다. 컨덕터는 배우가 연기하는 동안 계속해서 그들의 동선과 일치하게 레고를 움직이며 디오라마를 운용하며, 이는 무대 화면에 노출된다. 


지니가 사실 자의식에 의해 스스로 도망친 것이 아닌, 개발자들이 실험을 위해 풀어놓은 것이라는 내용이 나올 때 뒤에서 레고를 조작하던 개발자들의 존재감이 돋보이며 위압감과 긴장감이 연출된다. 



[사진 유한솔] (2022 공연사진-3)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jpg

 

 

또 하나의 인상적인 무대 연출은 가끔 배우들의 연기를 실시간으로 촬영한 영상이 화면에 송출되던 것이다.


초반에는 모든 게 인간의 통제와 계획 아래 있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를 비추는 CCTV 같은 영상이 나온다. 하지만 지니가 BA의 이야기를 듣고 BA가 마침내 울부짖으며 힘찬 날갯짓을 할 때 카메라는 BA를 올려다보는 구도로 촬영한다.


이러한 구도의 변화는 비인간의 존재성을 부각하며 인간과 비인간을 동등한 지위에 놓아보려는 시도 중 하나처럼 보였다.



[사진 극단 이와삼] 장우재&정진새 스몰토크 1.JPG

 

 

작품의 온라인 프로그램북에는 월간 극단문의 정진새 연출가와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의 장우재 작·연출가가 나눈 대담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관객들이 SF 연극에 흔히 기대하는 무대기술을 이용한 스펙터클, SF 연극과 다른 일반적인 SF와의 차이, 팬데믹 이후의 SF 연극이 담아내고 있는 것 등 장르에 대한 의미 깊은 대화들이다.


이에 더해 배우가 시도할 수 있는 다양한 연기의 방향성과 연극에서의 휴머니즘과 기승전결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많으니, 작품 관람 전후로 확인해보기를 권한다.

 

 

 

송진희 컬쳐리스트.jpg

 

 

[송진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