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로부터의 여행

글 입력 2023.06.17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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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이후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혼자 어딘가로 떠난 적은 있지만, 여행이라기보다는 친구를 만나러 타지에 간 것이었고, 도착 후 모든 시간을 친구와 함께 보냈다. 홀로였던 시간은 이동시간뿐이었다.

 

어딘가로 떠날 때, 비행기보다는 기차를 선호하고, 기차보다는 버스를 선호한다. 이동시간조차 여행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도착해서 노는 것부터가 여행의 시작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가는 동안의 설렘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하고, 이 또한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서울을 자주 갔었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혼자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어 쏠쏠했다. 사실, 버스가 기차보다 편하게 갈 수 있어서 좋은 것도 있다. 버스 안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고, 졸리면 눈을 좀 붙인다. 잠에서 깨어나면 커튼을 걷어 바깥 구경도 하고,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곱씹어 보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이런 순간들이 도착해서 노는 것보다 좋을 때도 있었다.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다양한 관계들을 마주한다. 좋은 영향을 받을 때가 많지만, 원하지 않는 호의와 관심은 가끔 나를 지치게 만든다. 대화 소리가 소음으로 느껴질 때도 있고, 관심과 걱정으로부터 오는 말들이 귀찮게만 느껴질 때도 있다. 아마 관계에 대한 권태로부터 오는 감정이다. 그럴 때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과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 강하게 든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지내기 때문에 혼자일 순 없다. 혼자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원했다.

 

자연을 좋아하는 나는, 여행 얘기가 나오면 매번 이 말을 반복한다. ‘초록색이 많은 곳으로 떠나고 싶어!’. 그래서 2023년 2월 무작정 강릉으로 떠났다. 제주도와 강릉 사이에서 고민을 꽤 했다. 제주도는 장롱면허인 내가 여행하기엔 힘들 것 같아서 강릉을 택했다. 부산에서 강릉까지 가는 데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버스뿐이라 흔쾌히 같이 떠나줄 사람이 없는 이유도 있었다.

 

5시간 30분이라고 적혀있었지만 차가 막히지 않는 탓이어서인지 4시간 정도 걸렸다. 가는 동안 앞서 말한 나만의 버스 루틴을 즐겼다. 세세한 계획을 짜면 거기에 맞추려고 노력할 것 같아서 나의 계획은 ‘힘쓰지 말기, 노력하지 말기,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하고 싶은 거 다 하기’였다. 숙소에 도착 후,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침대에서 좀 뒹굴거리며 늦장을 피우다 나와 버스를 타고 강문해변으로 갔다.

 

부산에 사는데도 불구하고, 강릉 바다에 대한 로망이 컸다. 언제부터인지, 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우거진 수풀을 지나, 발을 움푹움푹 먹어 들어오는 드넓은 모래사장을 걸으니 눈앞에 수평선으로 쭉 뻗은 바다가 나를 반겨줬다. 순간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고,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도 사치라고 느껴져, 에어팟을 귀에서 뺀 채 끊임없이 걷고 또 걸었다. 밝았던 하늘은 금세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조금씩 사라져 갈 때 나도 돌아갈 준비를 하며 걸어왔던 길을 한번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던 모래사장엔 내 발자국이 길게 찍혀있었다. 내 생에 최고의 순간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아마 누군가와 함께 왔더라면 그렇게 추웠던 날, 그렇게 오래 걷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근에 아는 동생이 강릉 여행지를 추천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딱 한 번의 여행이었고,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내가 행복해 보였나 보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나도 가끔 권태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의 환기가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위해,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서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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