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잘하는 게 뭐냐고 물으신다면 [영화]

<말아>, 김밥으로 그려낸 희망 한 스푼
글 입력 2023.06.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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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달리 하는 일 없이 집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백수 주리의 집에 갑자기 부동산 직원이 찾아온다.

 

동네에서 김밥집을 운영하는 엄마가 몸이 편찮으신 외할머니를 간호하는 동안 주리에게 가게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으나 주리가 쉽게 승낙하지 않자, 주리의 자취방을 부동산에 내놓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결국 주리는 엄마가 없는 동안 혼자서 김밥집을 도맡아 운영하게 된다.

 

엄마는 떠나기 전에 주리에게 가게 운영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주고, 반찬과 김밥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주리는 엄마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김밥을 말아보지만, 역시 처음 싸보는 김밥은 한 번 만에 쉽게 말리지 않는다.

 

주리는 한소리를 하는 엄마에게 투덜거리면서도 집에 가서 계속 김밥을 마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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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민승 감독의 영화 <말아>는 처음에 엄마의 부탁을 귀찮아만 했던 주리가 막상 홀로 김밥집을 운영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잔잔히 보여준다.

 

그동안 살면서 김밥 싸는 법도 몰랐던, 다 터져서 볼품없는 김밥만 만들던 주리는 어느새 먹음직스러운 김밥을 말아낼 수 있게 되었고, 가게를 찾는 손님들과도 밝게 소통하며 김밥집에 대한 애정을 키워나간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과 실연의 아픔으로 무기력하게 집 안에만 콕 박혀 있던 주리는 엄마 대신 김밥집을 운영하면서 삶에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특히 그에게는 새로운 두근거림이 찾아온다. 김밥을 먹으러 와서 매일 접시에 단무지를 남겨놓고 가는 취준생 이원에게 관심이 있었던 주리는 우연히 그를 고사장까지 스쿠터로 태워다주면서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와 함께 김밥 배달을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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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주문 손님에게 김밥을 배달하기 위해 두 사람은 계획에도 없던 등산을 하게 되지만, 산꼭대기에 올라가 마주하게 되는 탁 트인 도시의 풍경은 답답한 집과 답답한 마스크, 답답한 마음을 한순간에 잊게 해주는 듯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시원한 산의 공기를 마시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곱슬머리의 부피를 작게 만들기 위해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전날 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고심해서 산 주리의 이만 원짜리 꽃무늬 블라우스, 그리고 매번 록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던 이원의 처음 보는 파란 체크 셔츠는 이날을 기다렸을 두 사람의 마음을 풋풋하게 드러낸다.

 

우연히 겹친 컨버스 하이는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흐르고 있는 분홍빛 기류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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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지키기 위해 김밥을 말다가 새로운 사랑을 찾고, 김밥 배달을 하다가 산 정상에 오르게 되는 주리. 인생이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주리의 하루에 일어나는 작은 변화의 순간들은 주리의 삶을 어디론가 조금씩 이끌어나가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가게로 다시 돌아온다. 어느 날 갑자기 가게를 내놨다는 엄마의 말에 주리는 자기도 이제 취직을 준비할 테니 김밥집을 그만두지 말라고 말한다. 엄마의 정장을 빌려와 집에서 온라인 면접을 보는 주리. 역시나 이 또한 처음에 김밥을 말 때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스펙도 부족하고, 준비된 것도 별로 없지만 일단 부딪혀 보는 주리의 모습이 참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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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랑 운전 말고 잘하는 게 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다 “저는 김밥을 잘 말아요.”라고 대답하는 주리의 모습이 생각난다.

 

이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저녁에 밥을 먹고 그릇을 닦다가 문득 “난 설거지를 잘하지.” 하고 주리처럼 대답해보는 상상을 했다.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없어도, 남들의 눈에는 부족해 보여도 희망을 품고 당당히 매일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의 길에도 빛이 들 거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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