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혐오에 맞선 오늘을 함께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세리머니 - 조우리 장편소설 ‘오늘의 세리머니’ [도서]

‘언젠가’가 아닌, ‘오늘’의 승리를 위해
글 입력 2023.05.2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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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동성 파트너(배우자)를 국민건강보험법상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동안 동성 커플들은 오랜 시간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로 함께 해왔음에도, 비슷한 수준의 관계를 맺어 온 이성 파트너들이 갖는 연금, 상속, 의료 등의 제도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성 파트너로서 원고가 건강보험 상 ‘피부양자’라는 공식적 지위를 부여받게 된 이번 판결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비록 판결문에서는 법률상의 이유로 ‘동성 간의 사실혼 성립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동시에 사회 보장의 영역에서 ‘성적지향’을 이유로 차별이 이루어져서는 안됨을 명확히 하였다는 점에서 판결의 의미를 더했다. 여전히 두터운 편견과 혐오의 벽은 제도 안으로더 다양한 관계가 들어오고 인정받는 것을 막고 있지만, 막상 그것의 기저에 있는 두려움이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러한 ‘오늘’의 ‘승리’를 마주할 때마다 씁쓸히 깨닫는다.


그 실체 없는 두려움에도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버린 혐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시스템을 상처 입히고 취약하게 만들었는지, ‘언젠가’를 기약하며 그럼에도 ‘오늘’의 작은 ‘승리’를 축하할 때마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하고 막막해지기도 한다. 조우리 작가의 장편소설 <오늘의 세리머니>는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에 공감하며 ‘언젠가’라 상상했던 것들을 바로 ‘오늘’로 끌어내 우리 앞에 보여준다.


어쩌면 한 번은 마주쳤을 법한 두 명의 지방공무원에게서 시작되는 <오늘의 세레머니> 속 이야기는, 혐오의 실체를 과감하고 유쾌하게 관통해 보여주면서도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안의, 또 우리 곁의 혐오와 그 기저의 두려움을 제대로 마주하며 ‘언젠가’에 다가가는 ‘오늘’에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오늘의세리머니_평면.jpg

 

 

 

두려움을 먹고 자란 혐오에 맞서, ‘오늘’을 함께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세리머니’


 

조우리 작가의 장편소설 <오늘의 세리머니>는 모든 행동이 구설에 오르는 작은 도시 ‘하주시’의 공무원으로 살아가며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 ‘도선미’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조금의 ‘다른’ 삶도 허용하지 않는 보수적인 가족과 고향의 커뮤니티에서 도망쳐 하주시에 왔지만, 이곳에서도 연인인 ‘은경’과 데이트 한 번을 하지 못할 정도로, 레즈비언인 도선미에게 오롯이 자신으로 살아가고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그렇게 폐쇄적인 사회와 혐오가 부추기는 자기검열 안에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입힐 수밖에 없었던 선미는 연인인 은경과 헤어지고 하주시청의 가족관계팀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은경과 헤어졌던 크리스마스 날, 레즈비언 전용 클럽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이가경’을 다시 만난다.


이가경은 부모님께 커밍아웃했던 날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일상이라는 던전을 헤매는’ 친구들을 적극적으로 지탱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가경은 선미에게 자신의 고모인 ‘이순영’의 부탁을 함께 들어줄 것을 제안한다. 그 제안은 50여 년 가까이 고모의 연인이자 가족으로 살아온 ‘송미영’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꺼내놓은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그들을 ‘진짜 부부’로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실제로 2022년 가족관계등록 전산시스템이 바뀌며 부부가 동성일 경우에도 혼인신고가 가능해졌다. 비록 이후 절차에서 불수리 처리가 되지만, 선미와 가경은 이 불수리 절차를 뛰어넘어 시스템 상의 입력과 기록, 최종결재와 혼인관계증명서 발급을 마친다. 그러나 팀 내의 월 점검과 가정법원에의 제출까지 모든 단계가 성공해 버리는 것은 그들의 계획과는 어긋난 일이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요?"

이가경이 물었을 때는 20쌍의 혼인신고를 수리한 무렵이었다.

가경의 질문이 자신들이 벌인 일에 대한 후회나 회의의 표현이 아니라는 걸,

선미도 같은 마음이어서 알 수 있었다.

"그러게. 정말 이래도 되나 싶게, 아무 일도 없네."

열 번째쯤이면 걸릴 줄 알았다. 들키고, 추궁당하고, 대가를 치를 줄 알았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 

바깥은 몰라도 내부가 이토록 조용한 건 다행이라기보단

오히려 화가 나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겐 온 생애를 걸쳐 간절했던 일이

어디에선가는 무관심 속에 묻힐 뿐이라니.

- p.201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선미와 가경이 느꼈던 감정의 소용돌이 속 인상 깊었던 것은 ‘분노’였다. 누군가를 해치고 공격하고자 하는 분노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간절히 원했던, ‘언젠가’를 기약하며 포기하고 숨겨왔던 바람이 사실은 어쩌면 너무 쉬운 것이었다는 허무함과 억울함에서 온 분노였다.

 

 

"그날 법원에 갔을 때, 동성 결혼은 민감한 사안이라고,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을 들었어.“

선미의 말을 듣던 가경은 '혼란'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몇 번 소리 내어 발음해보았다.

"그런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

폭우가 쏟아지거나 불벼락이 내리꽂히는 일은 없었다.

땅이 꺼지거나 바다가 마르는 일도 없었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졌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었고,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잠을 자고 잠에서 깨고 몸을 씻고 밥을 먹고 거리로 나왔다.

선미는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죄와 벌을,

단죄와 속죄를 다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 p.168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편견 때문에 더 다양한 관계와 정체성을 인정하고 제도 안에서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금기시해 왔다. 이 금기 뒤에는 금기가 깨질 경우 바뀌게 될 기존의 권력과 질서-그것이 정당한지와는 별개로-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변화가 이루어질 때마다, 이러한 금기를 깨는 것이 막상 기술적으로는 너무 쉬울 수 있고, 혐오가 부추겨온 두려움에 비해서는 새로운 질서와 힘의 균형이 우리의 일상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도 봐왔다. 어쩌면 지금 ‘사회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사안 혹은 언제 이루어질지 요원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며 미루고 감추고 외면해 왔던 일들을 제대로 마주하고 바꾸어내는 것 역시 소설 속 언급처럼 ‘그저 어떤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질 뿐’인 일일 수 있다.

 

지칠만큼 변하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체념했던 소설 속의 선미와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지 못했던 슬픔과 후회를 꾹꾹 누르며 살아온 가경은 자신의 자리에서 제도에 도전하며 처음으로 자신 안의 분노를 인지한다. 비록 이들의 행동이 직업윤리 상 잘못된 일이라고 해도,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선미와 가경이 느낀 감정에 공감하며 이들을 통해서야 ‘부부’가 될 수 있었던 101쌍의 부부가 했던 결심에 연대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이들과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살아가고 사랑할 수 없도록 그들을 억압하고 자기검열의 늪으로 빠뜨린 혐오가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 안에서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 <오늘의 세리머니>는 거창한 구호나 막연한 희망이 아닌, 실제로 매일의 일상 속에서 혐오와 그 기저의 두려움을 조금 더 가까이 마주해 온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삶을 보여주며 우리 안의, 또 우리 곁의 혐오와 두려움을 돌아보게 한다.

 

 

화가 나는구나. 화가 나서 그랬구나. 이가경은 새삼 생각했다. 자신의 화에 대해서.

 그리고 깨달았다. 아주 오랫동안 화가 나 있었구나.

화가 난 채로 살고 있었던 거구나. (...)

사라져 버린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해주지 못한 말. 보여주지 못한 세상.

이가경은 더 이상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얼굴이 따라왔다.

- p.225

 

 

물론 분노만으로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사회를 당장 바꾸어내기는 힘들고, 가시화 투쟁만으로  구체적인 변화의 프로세스와 그 이후의 시스템까지 논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거창한 말들로 ‘언젠가’를 기약했던 것들을 바로 ‘오늘’의 일로 끌고 오는 힘이 된다.


그렇게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외면해 왔던 것들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우리는 혐오와 그것의 기저에 있는 두려움에 ‘승리’할 수 있는 ‘오늘’을 함께 만들어 간다. 이러한 승리를 축하하는 ‘오늘의 세리머니’가 소설 속 가경의 말처럼 ‘일상의 던전’을 헤메는 우리 모두에게 ‘회복 물약’이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여전한 오늘’에 너무 지치기보다는, 그럼에도 함께 만들어낸 ‘오늘의 승리’를 축하하며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김효중 PRESS 태그.jpg

 

 

[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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