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21세기의 연금술 - 분자 조각가들

글 입력 2023.05.0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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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경험하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의약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을 느낀다. 특히 한창 백신을 맞던 시기에는 각 백신 회사의 이름, 장단점과 함께 내가 맞는 백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정리된 정보가 사람들 사이에서 돌아다니곤 했다.


코로나로 의약품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긴 했지만, 사실 우리는 그 전부터도 이미 갖가지 약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머리가 아플 때는 진통제를 먹고, 치과에서 치료받으며 국소마취제를 투여받는다. 지금은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세상에 없던 물질 덕이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현대 과학과 의술의 발전 결과라고 생각하면 경이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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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조각가들』은 의약화학자인 저자가 의약품의 만들어지는 과정과 역사를 전문가가 아닌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게 엮은 책이다. 가정상비약으로 자리 잡은 타이레놀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코로나19 치료제가 에이즈 치료제의 영향을 받았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러한가, 수면제 과량복용은 어떻게 자살을 연상시키게 되었나 한 번쯤 궁금해한 적이 있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약이란 기본적으로 우리 몸에 들어가 유의미한 작용을 할 때 비로소 약으로 인정받는다. 화학자들이 하는 일은 그 유의미한 작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화학물질을 만드는 일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말하자면 화합물에 원자를 붙이거나 제거하고, 새로운 분자를 연결하기도 하며 나름대로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책은 이 과정을 분자를 조각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지극히 과학적인 단어인 '분자'에 예술에 가까운 단어인 '조각'이 결합한 '분자 조각가들'이라는 제목은 그렇게 탄생했다. 익숙한 두 단어의 생소한 결합은 의약화학자가 하는 일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미켈란젤로가 최고의 원석을 고르기 위해 로마 근교의 대리석 산지를 돌아다니고 잘 손질된 조각 기구와 함께 작업장에 들어선 것처럼, 나는 좋은 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시약 회사 홈페이지를 돌아다니고 플라스크와 시약을 가지고 실험대 앞에 선다. 그리고 하루하루 열심히 분자를 다듬는다. 나는 분자 조각가다.


9p

 


'의약품 개발'이라는 전문적인 분야를 '분자를 조각하는 일'로 바라보면 어려운 내용도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책은 지금과 같이 정교하고 체계적인 연구개발법이 정착되지 않아서 많은 부분을 우연에 기대야 했던 시대의 의약품 개발 이야기로 시작해 가장 최신 기술로 만들어지는 오늘날의 의약품까지 다룬다. 분자를 조각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자연에 이미 있는 물질을 모방하거나 인간의 인체유래물을 기반으로 화합물을 만들기도 하고, 더 나아가 아예 주어진 물질 없이 처음부터 새로운 화합물을 창조하기도 한다.


관련 분야의 문외한으로서 모든 장이 새로운 앎의 연속이었는데, 책을 읽으며 여러 사례 속에서 발견한 공통점 몇몇이 있다. 첫 번째. 생각보다 많은 의약품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책에서 이를 두고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고 표현한다. ‘우연히 찾아온 행운’이라는 의미다. 푸른곰팡이에서 유래한 페니실린이 대표적인 예다.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은 우연히 실내로 들어온 푸른곰팡이가 뚜껑이 열린 샬레에 들어가 균을 죽이면서 발견되었다.


지금은 대표적인 가정상비약인 타이레놀의 주성분 ‘아세트아미노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아세트아닐라이드’ 역시 세렌디피티라 할 수 있다.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어떤 기능을 하는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 약은 한 프랑스 의사가 우연히 나프탈렌 대신 잘못 처방하면서 해열 효과가 알려졌다. 아직도 타이레놀이 신체에 해열, 진통 효과를 보이는 기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집에 있는 약이 달리 보인다.


두 번째. ‘나쁜 화합물’은 없다. 모든 화합물에는 각각의 기능이 있을 뿐, 이 기능이 어디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지난날 심각한 부작용으로 폐기 대상이던 약이 오늘날 불치병의 신약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책에는 꽤 나온다. 4장 ‘물질을 창조하다’ 전체에 걸쳐 나오는 ‘페노바르비탈’이 대표적이다. 


한때 부작용 없는 획기적인 수면제로 각광 받던 이 의약품은 기형아 출산이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견되어 판매가 중단된다. 하지만 훗날 해당 약물이 부작용을 일으켰던 방식과 동일한 이유로 한센병과 다발골수종에 효과가 있다는 게 알려지며 2018년 기준 의약품 매출액 2위를 달성하기에 이른다. 

 

암 치료를 위해 개발되었지만 미미한 효과로 관심 밖에서 벗어났던 ‘지도부딘’도 뒤늦게 빛을 본 의약품이다. 실패작으로 여겨지던 이 화합물은 20여 년 뒤 에이즈 치료제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지도부딘이 가진 역전사효소 억제 기능이 암세포를 박멸할 수는 없지만, 에이즈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데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많은 실패가 지금의 안전한 의약품과 효율적인 개발법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페노바르비탈에 기형아 출산이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임산부와 태아에 대한 안전성을 확인하는 과정은 의약품 승인에 필수 사항이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안전과 관련된 상당 부분이 한 개인의 판단에만 달려 있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의약품 개발 단계와 승인 과정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정착한 것이다.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브루스 메리필드 역시 펩타이드를 합성하기 위한 5년의 단순노동 끝에 단백질 합성의 시간을 크게 단축시키는 고체상 합성법을 개발한다. 이후 고체상 합성법은 단백질 합성만이 아니라 DNA 합성에도 사용되며 보다 효율적인 의약품 개발에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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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화학자의 기원을 연금술사로 본다. 지난 200여 년간 빠른 속도로 발전한 의약품 개발 일대기를 읽다가 그 시작에 해당하는 연금술로 돌아오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금을 만들기를 소망했던 연금술사들은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새로운 물질을 향한 열망과 그것을 만들기 위해 하나씩 확립해 나간 연구법, 거기서 얻은 지식은 후대 화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의 허황되어 보이는 시도 역시 새로운 미래를 여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의약품 개발은 점점 가속도가 붙는데, 우리는 어디까지 기술을 허용할 것인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진통제가 있는 세상에서 살기 시작한 이상 진통제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듯이, 한 가지 의약품은 이제 전 세계를 바꿀 만한 파급력을 지닌다. 자연에 있는 모르핀을 모방하려다 헤로인이라는 마약이 만들어진 것을 떠올리면 의약품 개발에는 분명히 명과 암이 공존한다.

 

오늘날 인류는 일상 속 크고 작은 불편함부터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일까지 다양한 화합물로 통제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직도 기전조차 밝히기 어려운 자연의 화합물이 수없이 많은 상황에서 그것을 조정하기 위한 물질을 또 개발하는 것은 어디까지가 '괜찮은' 걸까. 그 어느 때보다도 의약품의 편의를 크게 누리는 시대의 사람이면서도 가장 최신 기술이 소개되는 6장까지 읽고 나면 질문하게 된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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