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데이비드 호크니 & 브리티시 팝아트 展

태양이나 죽음을 오랫동안 볼 수 없음을 기억하세요
글 입력 2023.04.0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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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DDP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동대문까지는 지하철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그런데도 가장 최근 DDP에 갔던 게 무려 6년도 더 전 일이었다니. 새삼 시간은 너무 빠르고 나는 너무 바쁘게 살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동대문을 찾은 이유는, DDP에서 7월 2일까지 열리는 데이비드 호크니 & 브리티시 팝아트 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글은 전시를 보며 들었던 세 가지 생각을 중심으로 작성되었으며, 관심이 생긴다면 직접 전시회에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호크니 포스터_세로형.jpg


 


첫째, 대중문화, 도전인가 순응인가?


 

이 전시에서 대중문화가 소개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당시 인디팬던트 그룹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영국의 팝 아티스트들은, 동시대 유행하던 영국 록 밴드 음악의 앨범을 작품에 차용하거나 직접 앨범 아트를 제작하는 등 대중문화와의 적극적인 협업을 이루었다.

 

도전적인 팝 아트와 대중문화라니, '대중문화'라는 단어가 지니는 부정적 함의에 너무도 익숙해 있던 나는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대중문화라고 하면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동질적인 유치한 유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품 소개 글을 읽어 보니, 당시 영국의 대중문화, 특히 록 장르는 통속성이 아닌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을 드러내는 장르였다고 한다. 그러한 성격이 팝 아트의 지향성과 맞아떨어졌기에 서로 다른 두 장르 간의 협력이 가능했다.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대표적인 문화 이론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대중문화는 그저 문화산업일 뿐이며 동질적 문화상품의 끊임없는 재생산이 향유자를 수동적으로 반응하게 만든다는 아도르노식 입장이 한 축이라면, 다른 한편에 있는 것은 대중문화는 일반 대중을 문화적 수용의 주체로 만들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혁명의 자극제 역할을 한다는 벤야민식의 입장이다. 

 

당시 영국의 대중문화가 벤야민의 이론에서처럼 기능했다면,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어떠할까? 처음 내가 떠올렸던 부정적 이미지처럼, 대중문화는 그저 통속적이며 사회적 안도감과 자극제를 제공하여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게끔 하는, 일종의 상업에 불과한 것일까? 대중문화라는 용어가 지니는 모호성과 그 의미의 변화를 떠올리면서, 쉬이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을 고민할 수 있었다. 


 

 

둘째, 예술, 어려운가 쉬운가?


 

예술은 마치 짝사랑 상대 같아서, 너무나 좋아하면서도 결코 편하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애의 마음이 알고 싶어서 미리 인터넷 창에 팝아트를 검색하고 전시회장 벽면에 붙어 있는 작품 소개 글을 뚫어져라 읽어보지만, 솔직히 가끔씩은, '뭐야...? 뭘까...? 뭐지...?'하는 마음이 들어 답답해진다. 그 애의 말 한 마디에 가능한 모든 의미를 부여하듯이, 작가의 붓칠 한 번에도 뜻이 있겠거니 해석해 보려 하지만, 진실한 속내는 오직 작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이 모든 게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품에서 작가가 의도한 단 하나의 해석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지만, 사실 팝아트와 같은 현대미술은 그러한 절대성에 대한 반발로 탄생한 것이 아닌가. 기성 예술의 지나친 경직성과 절대주의를 타파하고자 실험적인 형식으로 도전한 게 팝 아트인데,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나의 눈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기성의 것이었다. 

 

어쩌면 조금 더 자유분방해질 필요가 있겠다고, 정답을 찾으려는 시도를 내려놓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함께 전시를 관람한 친구는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다. 어쩐지 미대생다운 해석을 해 줄 것 같아서 기대했는데, 다른 모든 설명보다도 그 애의 입에서 가장 자주 나온 문장은 '이거 정말 재미있다'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해석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작품을 즐기는 걔의 그런 태도야말로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정말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정답을 찾으려는 머릿속 이성은 쉽게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빠르게 회전하는 생각 탓에, 정작 그 작품을 본 뒤의 내 감각에는 무뎌지기 마련이다. 재미있다, 예쁘다, 청량하다, 삭막하다. 이제부터 작품을 대충 보겠다는 비뚤어진 다짐이 아니다. 대충이 아니라, 솔직하게, 창의적으로, 다방면으로, 머릿속 이성 외에도 나의 감각 기관을 적극 활용해서 작품을 느껴야겠다고 생각했다. 

 


 

셋째, 눈, '있는 그대로'라는 건 존재하는가?


 

칸트 원문을 읽은 적은 없지만, 이 한 문장만은 자주 듣곤 했다. 인간은, 물자체를 결코, 붙잡을 수 없다. 이러한 인식론적 한계는 예술가에게 있어서 너무나 치명적일 것이다. 그 무엇도 볼 수 없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그려내고 디자인하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그러한 한계를 일찌감치 확인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표현한 작가다. 그의 작품 중에서는 아래와 같이 한 대상의 모습을 분절적인 프레임으로 이어 붙인 형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 피카소 같기도 하고, 몸은 앞을 머리는 옆을 향하는 이집트 그림 같기도 하다.

 

이런 작품을 보고 있으면, 하나의 사진이었다면 결코 포착하지 못했을 각 신체 부위의 독특함을 확인하게 된다. 눈, 코, 입,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한 명의 인간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각기 독립적인 특징을 지니는 존재들이며, 이 모든 것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다. '하나의 본질'을 구하려는 시도는 그 외의 세분화된 부분을 종종 지나치게 만들며, 그 모든 다양성은 총체성 하에 포섭된다. 따라서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는, 이미 존재하는 인식론적 한계를 더욱 부추길 뿐이며, 호크니의 이 같은 실험적인 형식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 대상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당장 사진 속의 남자만 해도 열두 칸짜리의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과연 이 남자의 단일한 본질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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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언제나 움직인다. 눈이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눈이 움직일 때 내가 보는 방식에 따라 시점도 달라지기 때문에 대상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실제로 다섯 명의 인물을 바라볼 때 그곳에는 1천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있는 그대로'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회화에서는 있는 그대로 보려고 사용하는 도구들 때문에 결국 눈을 속이게 되죠. 글쎄요, 이 시가 제 머릿속에 아이디어를 불어넣었고 그냥 되는대로 드로잉을 그려내기 시작했어요.

 

 

호크니는 Pearblossom Highway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캘리포니아주의 교차로에서 거의 800장의 사진을 찍으며 8일을 보냈다고 한다. 여러 시점에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그는 기성 예술과는 달리 인식론적 한계를 극복하거나 무력화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 한계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다. 

 

호크니가 물에 대해 가진 지대한 관심 역시 이러한 관점의 방증으로서, 그는 물이라는 소재의 가장 매력적인 면으로 항상 변화하고 움직이는 점을 꼽는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물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물에서 가장 잘 드러날 뿐이다. 또한, 그는 물은 '어느 지점'을 볼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라며, 반사된 부분이나 물 표면을 보다가도 갑자기 물속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역시 물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경험을 통해 내재한 혹은 그 자리에서 선택한 관점으로 대상을 보게 되고, 이에 따라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관찰이 가능하다. 

 

일례로 작품이 전시된 다른 작가 앨런 존스의 경우, 주로 여성의 나체와 같이 에로틱하고 페티시즘적인 요소를 작품에 가미하곤 했다. 이에 여성을 성적으로 묘사하고 대상화한다는 비판이 일자, 앨런 존스는 오히려 여성을 비인격화하는 병든 사회를 냉소하려는 시도였다고 답한다. 여성도, 여성을 그린 그림도, 어떤 관점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르게 표현된다. 누군가에게 여성의 누드는 그저 '야한' 상품에 불과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주체성의 표현이듯이. 

 

 

 

태양이나 죽음을 오랫동안 볼 수 없음을 기억하세요



단 하나의 본질은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문장만 그대로 두고 보면 왠지 부정적이다 못해 슬픈 말들이다. 우리의 인식론적인 한계는 비극인가?

 

그렇지 않다. 호크니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행복이고 발견이었다. 그림 속 한 남자의 12가지 서로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1초 만에 변하는 물의 연속성을 관찰한다.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이전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본다. 

 

또한, 호크니는 이렇게 말했다. 관두는 건 그만하거나 거부하는 게 아니다. 다른 곳을 보고 싶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호크니는 '있는 그대로'를 부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보는 전부가 가짜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변화하는 다채로운 수많은 조각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조각을 볼지 선택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의 폭을 넓혀 주는 게 예술의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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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라는 건 없다. 그 말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모습은 수많은 조각 중 하나이며 그것은 언젠가 변하거나 사라진다는 뜻이다. 만약 무언가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대상에 그저 익숙해진 채 '언젠가 또 볼 수 있겠지'하는 안일한 안도감에 빠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정된 상실은 대상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마치 1월 1일 일출을 바라볼 때와 같다. 1월 1일, 그것도 2023년의 1월 1일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리고 바닷물에 반쯤 잠겨 호박색으로 빛나는 햇살도 당장 몇 분 뒤면 하늘 높이 둥둥 떠올라 사라질 것임을 알기에, 그렇기에 우리는 더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일출을 바라본다. 그 순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여기도 저기도 모조리 눈에 담으려는 듯. 

 

그렇기에, 우리가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건, 어쩌면 행복한 일이다. 그러니, 태양이나 죽음을 오랫동안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는 편이 좋겠다.

 


 

김채영 컬쳐리스트 태그.jpg

 

 

[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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