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디스토피아에 피어난 공존의 가능성 – 연극 ‘태양’

우리는 모두가 다를 게 없는 같은 인간이기에 상생해야 하는 법
글 입력 2023.02.2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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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 연극 태양_포스터(2.3-26).jpg


연극 <태양>이 2021년의 초연에 이어 올해 2월, 국립정동극장에서 재연으로 다시 관객들을 만났다. 경기 아트센터, 경기도 극단과 국립정동극장이 공동 기획 및 제작한 작품으로, 일본 극작가 마에카와 토모히로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태양>은 바이러스로 인해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된 두 갈래 인류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과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을 비추며, 동시에 갈등이 만연한 현시대에도 공존의 가능성이 존재하는지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

본 글은 연극 ‘태양’의

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극의 배경은 21세기 초, 의문의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 인구가 급감한 상황에서 두 계급으로 나누어진 인류의 갈등이 드리운 이분법적 세계를 비추고 있다. 무대 곳곳과 천장에 멋대로 널브러진 쓰레기와 가구들,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조명 등 디스토피아적인 연출은 바이러스가 덮친 시대의 암울함과 절망을 나타낸다. 


감염자들 중 기적처럼 바이러스 항체가 생긴 이들이 우월한 신체를 가진 신인류로 부상하면서 인류의 계급이 나뉘게 된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신인류 ‘녹스’는 자외선에 취약해 태양을 볼 수 없고 밤에만 생활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젊고 강한 신체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강점을 이용해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고 밤이 지배하는 세계를 만들어 간다. 


반면, 신체적 이점을 차지한 녹스의 부상으로 태양 아래에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빼앗기게 된 보통 인간들은 쇠퇴한 구인류가 되어 간다. 구인류는 골동품을 의미하는 멸칭 ‘큐리오’로 불리며 노화와 소외 및 차별 속에 고통받는다.


큐리오가 모여 살던 마을에서 녹스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 후, 거주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며 마을에는 왕래가 잦아들었다. 녹스와 다른 이들에게 거의 격리되다시피하며 소외된 큐리오의 마을에는 이제 열 명 남짓의 구인류만이 남게 되었다.


연극은 사건이 발생한 날로부터 약 10년 이후, 큐리오 마을의 봉쇄 조치가 해제되고 다시 녹스와 큐리오의 왕래가 시작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갈라진 두 인류가 과연 같은 하늘, 그리고 같은 태양 아래서 조화롭게 공존하고 공명하는 미래를 그려갈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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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와 큐리오, 크게는 두 갈래로 인류가 나뉘었지만 현대 사회의 모든 인간이 서로 다르듯 큐리오 사이에서도 개인의 생각과 지향점을 기준으로 인물들의 유형이 갈림을 알 수 있다. 녹스가 되거나 그들의 삶에 녹아들어 문명을 누리길 원하는 큐리오와, 태양을 잃고 밤의 인간이 된 채 녹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삶을 원치 않는 큐리오가 있다.


녹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큐리오를 그저 낡고 쇠한 인류라 여기고 그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녹스가 잃게 된 태양과 생명력을 가진 큐리오를 동경하고 그들과 조화롭게 공존하길 원하는 녹스도 비록 소수이지만 존재한다.


물론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존재하지만, 작중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큐리오보다 녹스의 삶을 우월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젊음, 힘, 물질, 권력, 문명, 이성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며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애쓰는 동시대의 현실이 무대 위 인물들의 모습에 투영된다.


의무 교육, 경제 활동 등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기회에서 점점 소외되고, 추첨을 통해 녹스가 될 수 있는 기회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고립된 채 살아가야 하는 큐리오의 모습은 두 인류가 이상적인 형태로 공존하는 세계의 불가능을 보여주는 듯하다. 현저한 권력과 힘의 차이로 인해 녹스와 큐리오 간의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극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분된 세계의 모습보다는, 녹스 ‘후지타’와 큐리오 ‘데츠히코’ 간의 우정이 보여주는 공존의 가능성과 일말의 희망이라고 생각된다. 어린 나이의 데츠히코는 녹스를 동경하며 추첨 기회만을 기다리지만, 구인류 마을의 검문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후지타에게는 큐리오와 녹스가 다를 바 없는 같은 인간일 뿐이다. 


후지타가 생각하는 태양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해가 뜨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식물과 동물이 자라는 자연 현상 모두 태양과 생명력이 존재해야만 발생 가능하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데츠히코가 홍차 찻잎 농사에 능한 이유 역시 태양 덕분이고, 농사를 비롯해 빛을 볼 수 있기에 큐리오만이 보고 가질 수 있는 생명의 힘과 감성 및 예술 정신이 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문명을 누리는 생활을 영위하며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데츠히코에게 후지타의 생각은 그저 복에 겨운 소리일 뿐이지만, 녹스에게 없는 것은 큐리오에게 있고 큐리오에게 없는 것은 녹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후지타는 두 인류가 화합하기를 순수하게 바란다.


‘인간은 태양을 등지고 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녹스 ‘카네다’ 역시 후지타처럼 큐리오의 존재가 가지는 삶의 가치를 인정하는 인물이다. 태양은 빛과 생명의 근원이기에 인간은 태양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는 녹스가 큐리오보다 우월한 것 같지만, 사실 태양과 생명력을 잃은 녹스는 큐리오의 아이들을 입양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며 기생하고 있는 것은 녹스임을 밝힌다.


우리는 후지타와 카네다를 통해, 녹스와 큐리오가 동등한 존재이며 서로 상생하고 공존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극의 초중반부에는 녹스가 큐리오보다 우월한 인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말에 다다를수록 실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낮과 밤, 빛과 어둠, 젊음과 늙음, 이성과 감성, 그리고 자연과 문명 모두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그리고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큐리오를 존중하며 다양한 삶의 조화를 바란 후지타와 데츠히코의 우정이 상징하는 것처럼, 녹스와 큐리오 모두 같은 인간이기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공존을 꾀해야만 하는 것이다.


연극 <태양>의 무대 위에는 우리가 알던 세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쓰레기 더미와 인간이 아닌 기계처럼 말하고 움직이는 녹스의 낯선 모습만이 자리한다. 마치 현실을 벗어나서 SF 세계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그저 공상과학 혹은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작품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곱씹다 보면, 녹스와 큐리오의 삶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꽤 근접하게 맞닿아 있음을 금세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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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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