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통영에 가서야 알게 된 [여행]

글 입력 2022.12.0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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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다가오는 연말에 조바심과 우울함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은 요즘이다. 머리가 크고 보낸 해가 이젠 적지 않건만 유난히 올해에는 12월을 마냥 웃으며 맞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다소 소란스럽고 불안하게 구는 세상 탓일까. 빠르게 지나가 버린 올해를 돌이켜보다 조금 늦은 연초에 다녀온 여행이 떠올랐다. 연초를 기념하러 다녀온 것은 아녔기에 조금은 게으른 마음으로 다녀온 여행이었다. 여행을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은데, 어언 반년도 훌쩍 넘어서야 활자로 남긴다. 그래도 더 많은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적어두는 것이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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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보니 짝꿍과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었고, 제주에서 온 내 친구도 비행기에서 곧 내릴 것이었다. 그리고 공항 바깥에는 짝꿍과 관심사가 꽤 닮아있는 짝꿍의 친구가 우리 셋을 데리러 오고 있었다. 두 번째 통영 여행의 시작이었다.


짝꿍과 나의 욕심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것들은 내 사람들도 겪어보았으면 하는 욕심이 큰 편이다. 짝꿍과의 첫 통영이 너무나도 완벽했던 바람에, 초등학생 시절엔 마트에서 같이 만화책을 읽었고 대학생 시절엔 누룽지탕에 소주를 마시다 냅다 왈칵 같이 울기도 했던 내 오랜 친구를 통영으로 불렀다. 짝꿍도 비슷한 마음으로 거진 인생의 절반을 같이 한 친구를 불렀다. 대뜸 통영으로 놀러 가자는 말에 당황하는 기색 없이 ‘언제’만 물었던 사람들과 우리는, 활기차게 김해 공항에서 통영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오랜만에 본 친구의 엄지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익숙한 물결 모양의 반지가 반가웠고, 꼭 잡은 짝꿍의 손은 따듯했으며 짝꿍의 친구가 챙겨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은 다정했다. 적당한 베이스의 노래가 신나는 기분을 더욱 돋웠다.


점심으로는 유명한 배말칼국수를 먹었고 잠시 들린 편의점에서는 귀여운 강아지를 만났다. 조용한 듯 왁자지껄하게 도착한 숙소에는 없는 것이 없었고, 이에 감동한 우리는 잔뜩 신이 났다. 3월이었으나 밤은 아직 시렸기에 난방을 방방 돌려놓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와중에 짝꿍의 생일을 챙기려 셋이서 은밀한 작전을 펼치느라 애도 먹었다. 그래도 그저 재밌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제주 바다가 아닌 다른 바다를 보고 있는 것이 마냥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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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짝꿍과의 여행에서는 액티비티를 잘 즐기지 않는데, 사람이 넷이나 있으니 괜히 활동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어져서 루지를 타러 갔다. 나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안전 운전을 고집하는 사람이었고, 운전면허도 없다며 어떻게 바퀴 4개가 달린 것을 혼자 타냐던 내 친구는 묵묵히 과속하며 목표지점까지 빠르게 사라졌다. 경쟁에 초연한 성격의 소유자들로 알았던 짝꿍과 짝꿍 친구의 승부욕은 덤이었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뒷모습들을 보며 역시 유유상종이구나 생각했다. 별안간 외로워진 상황에 나는 천천히 내려갔다. 종착지에서 내리자 차가운 바람에 벌그레한 낯으로 들떠 보이는 내 일행이 보였다. 웃음이 터졌다.


다시 차에 올라탄 우리는 바다 가까이 어딘가에 위치한 카페로 향했다.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감풀마저 아늑했다. 친구와 제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남해를 바라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흔히들 에메랄드빛으로 기억하는 제주의 바다와는 다르게 말 그대로 ‘푸르른’ 바다였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짝꿍과 짝꿍의 친구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지만 우리는 창문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 친구는 계속 윤슬을 찍어댔다.


새삼 왜 이제서야 이런 재미난 경험을 해보는 것인지 괜스레 아쉬워졌다. 유럽에서도 홀로 다녔을 만큼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데에 도가 튼 편인 나는, 충동적이고 경험하고 싶은 것들이 워낙 많아 남과 함께하는 것보다는 홀로 다니는 것이 편하다. 다만 같이 있는 사람들을 흘긋흘긋하고 있자니, 가끔은 다른 사람과 시간을 같이 보내도 좋겠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었다. 다행히 놓친 것을 두고 오랜 시간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냥,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됐다, 생각했다. 당장에 새어 나오는 웃음만 즐기더라도 짧은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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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있으면 춥고 햇볕 아래 서 있으면 적당한 날씨였다. 카페는 해만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찬 공기 속에서 기운차게 움직이다 카페에 가만히 앉아있자니 나른했다. 서로를 알아가는 시기의 대화는 산발적이면서도 웃음기가 많다. 해가 뉘엿뉘엿 움직이자 우리는 느릿느릿 일어났다. 밀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하늘과 바다가 시간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바다를 뒤로하고, 우리를 통영으로 이끌고 온 다찌집으로 향했다(해산물과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무조건 추천하는 곳이다). 상다리가 휘어질 만한 상차림에 놀란 우리는 입이 벌어졌다. 생선 가시를 발라주고 잔을 부딪치며 우리는 신변잡기적이기 그지없는 내용으로 시시콜콜 떠들며 웃었다. 오랜만에 여러 사람과 한나절을 보냈음에도 꽤 편안했다.


혼자가 익숙하고 편한 성격이라지만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 있다 보면 같이 있는 것도 익숙하고 편할 때가 있다. 하교 후 얼음땡 놀이를 할 적부터 수많은 야자 시간까지 같이 보낸 애들이라 그런 걸까. 언제부터 혼자가 편했던가 생각해 보면 가끔은 아리송하다. 남의 몫을 책임지기란 쉽지 않음을 알았을 때일까, 제 몫도 해오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알았을 때일까. 사람을 잃는 것은 꽤 쉬우며 한 달을 내내 앓아도 쉽사리 떨어지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적일까.

 

혹은 이유 없는 미움이 넘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았을 적일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즐기기에도 짧은 시간을 타인과 함께하느라 포기하는 것이 싫어진 어느 날부터였을까, 아니면 그냥 혼자 살다 보니 혼자가 편해진 걸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나 문득 궁금할 때가 있다. 언제부터 혼자 책임지고 혼자 움직이는 것이 편했던 걸까. 나는 분명 사람들과 항상 붙어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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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게 먹고 마시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돌아왔다. 한창 파릇파릇 힘이 넘치는 청춘의 나이인 이삼십대는… 절대 그냥 잠들 리 없다. 피자를 주문한 우리는 짝꿍의 친구가 가져온 보드게임을 시작했다. 워낙에 전략 게임에 약한 나는 매번 잔꾀를 걸리기 십상이었고 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건 안타깝지만 내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도긴개긴으로 실점하던 우리는 두 번째 보드게임에서도 패망한 반면 짝꿍과 짝꿍의 친구는 독심술에 능력이라도 있는지 수를 읽어내는 정도가 무서운 수준이어서 이길 깜냥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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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과일과 케이크를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짝꿍의 생일을 축하했다. 처음으로 축하한 짝꿍의 생일이었다. 해맑게 웃는 낯이 어여뻤다. 앞으로도 오래 축하해 주겠다고 홀로 다짐했다. 그러다 또 잡담을 나누다 보드게임을 하다 마시다 웃다 물어보고 놀리고 파인애플과 딸기를 먹었다. 친구와도 이렇게 편하게 입고 식탁에 앉아 마시며 떠든 적이 있던가.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슬슬 미워지기 시작했다.


둘째 날에는 전날보다 해가 강해 바깥에서 시간을 보냈다. 피랑을 오르고 이순신 공원을 돌았다. 미끄럼틀을 탔고, 빙빙 돌아가는 이상한 놀이 기구도 탔다. 시래깃국을 먹고 라떼 위에 재미난 문구를 적어주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해저터널을 따라 걸었고, 파란 철지붕이 올라간 집들이 늘어선 골목을 걸었다. 이런 날이 또 올 수 있을까 생각하니 바닷바람에 실려가듯 흘러가는 시간을 잡고만 싶었다. 하지만 불가항력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낫기에 폰을 주머니 깊숙이 넣어두고 걸었다. 구름이 두터워지자 이따금씩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걷고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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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곳을 걸은 여행이었다. 걷는 내내 무수한 대화가 오갔고 추운 날씨에 비해 속은 갈수록 따듯했다. 보이지도 감각되지도 않는 작은 배려가 모여 하나의 다정이 되는 법인데, 모든 순간이 부드러웠던 오후였다. 분명 수많은 배려와 생각이 오갔기에 그저 안온한 시간으로 기억하는 것일 테지.


욕심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던 만큼 많은 것을 겪게끔 함께 걷고 싶은 마음이었다. 재밌다며 꼬드겨 데려왔으니 응당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좋아했던 풍경 속에 친구와 함께 있으니 좋았고, 짝꿍도 그래 보였다. 우리네의 친구들도 그래 보였는데, 굳이 말로 물어 확인하지는 않아서 확신은 못하겠다. 그래도 다음을 기약했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많은 것이 변화를 앞둔 듯한 기분이었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재미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각자 나름의 풍부한 시간을 보냈으리라 위안 삼으며 친구가 탑승한 제주행 비행기에 손을 흔들었고 짝꿍의 친구가 차를 끌고 사라지는 뒷모습에 손을 흔들었다. 친구가 눈물 흘리는 척 셀카를 보내왔다. 남은 짝꿍과 나는 깍지 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문득 이 손을 잡고선 마추픽추든 루앙프라방이든 루체른이든 어디든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 박준, <환절기>,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中

 

내가 살아온 세계의 일부와 앞으로 살아갈 세계의 일부가 마주했던 그날, 내 세계가 퍽이나 굳건하고 애틋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통영에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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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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