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간의 욕망을 조명하는 작은 방주 [미술/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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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도입
사진과 영상은 예술작품의 모든 것을 담아내진 못하지만, 사람을 전시로 이끄는 힘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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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선을 잡아끈 것은 최우람 작가의 작품, <원탁>이었다.
단 하나의 머리를 욕망하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18명의 지푸라기 인간들이 날 전시장으로 이끌었다. 육중한 원탁을 짊어지고 의미 없는 사투를 벌이는 지푸라기 인간들과 그들을 농락하듯 유유히 곡선을 그리는 ‘머리’의 존재. 정교한 설계와 퍼포먼스, 내포된 의미는 분명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원탁>만 바라보고 간 자리에서 최우람의 다른 작품에 매료될 줄은.
전시장을 벗어나고도 한동안 머릿속을 점령했던 존재는 바로 최우람의 <작은 방주>, 바로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메인 작품이다.
Artwork. 인간의 욕망을 조명하는 작은 방주, 최우람 <작은 방주>
생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뒤바뀌는 듯한 감각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은 바로 ‘공간’이 갖는 마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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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람 작가의 <작은 방주>가 놓인 전시장 또한 공간이 갖는 마력을 영리하게 이용한 곳이었다. 거대한 <작은 방주>를 마주한 순간, 세상이 뒤바뀌는 듯한 아득함을 느꼈단 의미다.
최우람의 <작은 방주>에는 정 중앙의 커다란 <등대>, 정반대를 가리키는 <두 선장>, 그리고 제각기 다른 각도와 높이로 움직이는 35쌍의 노가 있다. 폐종이로 만들어진 35쌍의 노는 작품 가동의 시작과 끝을 제외하곤 다양한 각도와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춤을 추듯 오묘한 감상을 선사한다.
이는 버퍼링이 걸리듯 부자연스러우면서도 거대한 규칙 속에 갇힌 듯 일정해 보이기도 한다. 이는 호흡할 때 갈빗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기도 하고, 고래가 헤엄치듯 느릿한 몸짓을 담아낸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중앙의 선장들은 생물의 심장부가 되고, 35쌍의 노들은 갈비뼈가 되어 호흡 과정을 나타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작은 방주>가 차지한 공간을 ‘현실과 모순된 욕망이 겹쳐지는 곳’이라는 해설을 참고하면 감상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일상에서도 머릿속을 점거했던 생각의 일부다.
발상을 바꿔보자면 이와 같다. 35쌍의 노는 ‘개인’을 형상화한 것이고, 개인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욕망하기에 제각기 다른 각도와 높이로 움직이게 설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저마다 다른 것을 욕망하는 35쌍의 노를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선장의 역할이다.
그러나 <작은 방주>에는 공교롭게도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두 명의 선장이 있다. 질서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선장들이 오히려 혼란과 무질서를 불러오는 현장, <두 선장>이다.
Depth. 선택을 상징하는 두 명의 캡틴, <두 선장>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오래된 속담은 어쩌면 이 작품에도 적용되는 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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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배에는 단 한 명의 선장만이 있다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배에 두 명의 선장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방주에 올라탄 두 명의 캡틴은 ‘선택’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진리라고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 반대를 가리키는 선장들은 은연중에 한쪽을 선택하길 이야기하고 있다. 매트릭스 속 빨간약과 파란약처럼 이성과 감성, 낮과 밤, 모든 상반되는 것들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상황에 몰입해보면 두 명의 선장이 줄다리기하듯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욕망하는 35쌍의 노가 물결치듯 움직이는 방주의 한 가운데, 선택을 상징하는 두 명의 캡틴. 항해의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Plus. 힘없이 매달린 천사, 최우람 <천사>
천장에 매달린 금빛의 천사, 세 개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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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작은 방주>에서 뒤로 세 걸음 물러서면 시선을 끌어당기는 작품이 하나 있다. 레진과 24K 금박으로 만들어진 작품 <천사>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제공하는 해설을 찾아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매달린 천사가 사실은 작은 방주의 뱃머리 장식이었다는 점이다. 예로부터 신적인 존재가 항해하는 배를 지켜주는 모티브는 꾸준히 있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도 해신 포세이돈이 항해하는 배들을 지켜준다는 믿음부터 천사나 인어 같은 인외의 존재가 배를 육지로 인도한다는 설화 등이 그 예시다. 조명 아래 세 개의 그림자를 흩뿌리는 <천사> 또한 배의 안전과 순항을 기원하는 조각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는 어쩌다 뱃머리를 떠나 조명 아래 전시된 것일까?
구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가늠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뱃머리에 있어야 할 <천사>의 이탈이 혼란을 일으켰을 거란 점이다. 어쩌면 천사의 실종이 두 명의 선장 중 진짜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천사>는 거대한 방주의 방향성 상실을 나타낸 존재, 혹은 욕망의 희생양을 나타낸 존재일 수도 있다.
직접 눈부시게 빛나는 천사상을 마주하게 된다면 이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십 수백가지의 생각들이 떠오를 것이라고 자부한다.
END. 글을 마치며
거대한 35쌍의 노를 움직이는 <작은 방주>와 그 위의 <두 선장>, 그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천사>까지. 작품을 만나러 온 걸음이 전혀 아깝지 않을, 진귀한 전시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이 글이 누군가를 전시장으로 이끌 하나의 설렘이 되길 고대한다.
[최현서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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