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감정 보증서 [사람]

어쩌면 그건... 나의 강점일 수도?
글 입력 2022.08.23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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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언가를 '좋아한다'라고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나 혼자 머릿속으로 돌려보는 나만의 프로세스가 있다. 총 3단계로 이루어진 이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1단계 : 이 감정이 진심인가? - 좋아한다는 마음의 실체에 대해 곰곰이 들여다본다. 단순히 스쳐 지나갈 호감을 좋아한다는 마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또 의심 해본다. 결국 좋아하는 게 맞다,라는 판단이 내려진다면 2단계로 넘어간다.

 

2단계 : 좋아하게 된 기간이 얼마나 됐는가? - '좋아함'이라는 감정에 대한 검증이 끝나면 내가 이 대상을 좋아하게 된 기간이 어느 정도가 되었는지 살펴본다. 이 단계에서 내가 잡고 있는 기준은 약 '한 달'이다. 한 달 동안 계속 보고 싶다든가, 자기 전에 자꾸 생각이 난다면 해당 단계는 무난하게 통과가 가능하다.

 

3단계 : '대상'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 나를 툭 치면 백과사전처럼 대상에 대한 정보를 줄줄 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샅샅이 알고 있어야 내가 남들에게 이 대상의 매력 포인트가 무엇이며, 어떤 점을 중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확신을 가지고 남들에게 소개(혹은 추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3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나는 그제야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참... 피곤하게 산다,는 말이 내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아직도 회자되는 유명 드라마 속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 해!"라는 대사처럼, 나는 왜 좋아한다는 마음을 이렇게 어렵게 말하는 걸까?

 

*


학창시절에는 그저 '같이 있으면 편안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졸업 후 돌이켜보니 '아마 내가 그 애를 좋아했던 것 같아'라고 괜히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그 아이를 떠올리곤 한다. 친구들이 '이 정도면 너 @@@ 좋아하는 거 아니야?'라고 물어올 때도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라며 내 마음의 크기를 축소시켰다.


"어떤 거 먹을래?"라며 나의 의견을 물어오는 사람들에게도, '아무거나', '난 딱히 싫어하는 음식이 없어서 괜찮아'라는 손쉬운 회피법으로 내 마음을 드러내는 데에 한 발 물러났다. 딱히 내가 싫어하는 음식은 없어도, 내키지 않았던 음식은 분명 있었으면서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난 매사에 '나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적었다. 아니, 부족했다. 앞서 이야기한 프로세스를 돌려보기 시작한 것도 이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난 뒤부터였으니까.

 

내 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철저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 나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해당 프로세스를 만들어 냈다. 적어도 이 단계들을 모두 통과한 마음이라면(!)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내 '감정 보증서'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발급되는 나만의 감정 보증서는 한편으로 나의 기질적 측면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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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수준이 아니라 내가 건널 다리에 행여 금이라도 가 있지는 않은지 몇 날 며칠을 확인하는 스타일로, 정신을 차려보면 내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돌다리 건너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점은 내게 있어 늘 못마땅한 나의 단점 중 하나였다.

 

그런데 며칠 전, 친구들과 재미로 기질검사를 진행한 뒤 읽어 내려간 해설지에서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내 결과는 '신중형 패턴의 원칙주의자'로 나왔는데, 나의 행동 강점이 바로 이 타고난 신중함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한다'라고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그 말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도 일정 부분 부여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있어 신중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단계를 걸쳐 나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고, 이 과정을 통해 검증된 이 마음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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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비롯된 신중함은 나의 또 다른 강점임이 틀림없는데, 왜 나는 자꾸 '자기 확신 부족'이라는 단어로 나의 강점을 가려 바렸을까?


이제 나는 내가 무언가를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남들보다 로딩 시간이 조금 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가끔은 나의 길어지는 로딩 시간 때문에 종종 남들과 타이밍이 어긋날 때도 있긴 하지만, 그 부분까지 나의 단점으로 끌어안아 나 자신을 더 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나의 이 감정 보증서의 힘은 꽤 강력해서, 주변인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맛집이나 애정하는 공간, 인물 등을 영업할 때면 높은 확률의 성공을 자랑한다.

 

그럼 그냥 이거면 되는 거 아닐까? 누가 그랬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고. 더군다나 그 '누군가'가 나라면? 그건 너무 손해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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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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