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실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진술 - 피아니스트 조재혁 리사이틀

글 입력 2022.06.16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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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부터 상상치도 못한 취미를 갖게 되면서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진정으로 몇십 년 동안 험난한 생애를 겪은 사람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별 볼 일 없는 짧은 생애지만 그 생애 동안에도 나는 무수히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올해 들어서 나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단연 클래식을 좋아하게 된 일이었다.

 

지난 2월, 단지 헤르만 헤세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헤르만 헤세가 쓴 음악 에세이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를 읽었다. 해당 책을 읽고 나는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혐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대상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예찬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내 눈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400여 쪽의 책을 채운 헤르만 헤세가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와 그만큼 수많은 예술가를 사랑하는 나 자신도 전보다 근사해 보였다.

   


두꺼운 책이 모두 대상에 대한 애정으로 채워진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 비난과 혐오로 지쳐가던 심신을 위로받을 수 있었고, 헤르만 헤세가 그 유려한 문장으로 예찬한 대상도 사랑할 수 있었다. 그 대상이 바로 ‘클래식’이었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가 확장되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쇼팽, 슈만, 모차르트, 베토벤….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배울 때는 한없이 지루하고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그 이름들에 애정과 관심으로 다가가니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디지털의 발달로 어느 분야든 집에서 양질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세상이고, 그 덕에 수많은 혁신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나는 문화예술 앞에서 아날로그적 태도를 견지한다. 여전히 나는 전자책보단 종이책을 보는 게 좋고, OTT 서비스보단 영화관에 가는 게 좋다. 클래식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몇 개월 동안 여러 동영상도 찾아보고 라디오 스트리밍도 들었지만 실제 연주를 듣지 못했다는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 조재혁 리사이틀’은 이제 막 클래식의 참맛을 깨닫고 뒤늦게 알게 된 ‘좋음’을 주체하지 못해 안달이 난 나의 마음을 잠재울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기회였다. 2022년 6월 8일, 나는 잠실의 롯데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조재혁의 연주를 감상했다. 내가 공연장에 머문 시간은 2시간 남짓이었지만, 내 세계는 2시간에 비할 수 없는 크기로 더욱 넓어졌다.

 

포스터_쇼팽(최종).jpg

   


<프로그램>

 

Ballad No. 1 in g minor, Op. 23

Ballad No. 2 in F Major, Op. 38

Ballad No. 3 in A-flat Major, Op. 47

Ballad No. 4 in f minor, Op. 52

 

-인터미션-

 

Piano Sonata No. 3 in b minor, Op. 58

I. Allegro maestoso

II. Scherzo: Molto vivace

III. Largo

IV. Presto non tanto

 

 

 

연주가 시작하기 전


 

연주회의 주인공 피아니스트 조재혁은 만 5세에 피아노를 시작해 각종 콩쿠르를 휩쓸다 1993년 뉴욕의 프로피아노 영아티스트 오디션 우승을 계기로 뉴욕에서 데뷔했다. 그 후 북미와 유럽, 국내를 넘나들며 독주회, 실내악, 오케스트라 협연 등 다양한 형태로 연주해온 그는 오르가니스트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연주가 시작하기 전, 팸플릿으로 연주자의 정보를 다시 확인하는데 연 60회 이상 무대에 오르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연주뿐만 아니라 청중과의 소통에도 열정적이어서 라디오, 예술의 전당 음악회 시리즈, 아트센터 인천의 마티네 콘서트 시리즈 등 10년 가까이 여러 매체를 통해 클래식을 알려왔다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실력은 물론 성실하기까지 한 예술가라는 생각에 내가 앞으로 들을 연주에 신뢰감이 더해졌다.

 

이번 연주회를 관람하기로 한 이유 중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세트리스트였다. 세트리스트(Setlist)란 음악가나 밴드가 콘서트를 행할 때 연주하는 곡의 목록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번 리사이틀의 세트리스트는 모두 쇼팽의 곡으로 채워졌다.

 

인터미션을 전후로 연주 내내 쇼팽의 곡만 연주한다는 사실에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쇼팽은 내가 클래식의 세계에 입문한 이후로 가장 자주 들은 음악가 중 한 명이다. 세 명의 철학자(사르트르, 니체, 바르트)의 삶에서 음악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룬 책 <건반 위의 철학자>를 최근에 읽어서 더욱 그러했다. 사르트르와 니체는 쇼팽을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며 그의 곡을 연주했을 때만 안정을 느꼈고, 바르트는 슈만을 가장 사랑했지만 쇼팽에 대해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는 물론 저명한 철학자들까지 사로잡은 쇼팽의 음악을 실제 연주로 들을 기회를 어찌 마다하겠는가. 설레는 마음으로 핸드폰 전원을 끄고 연주자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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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를 감상하면서


 

공연은 별도의 설명 없이 담백하게 연주로만 진행되었다. 미리 프로그램 설명을 충분히 익힌 덕분에 무리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음악에 전혀 일가견이 없는 데도 그동안 전자기기를 통해서 들은 연주들과 어떻게 다른지 확연하게 느껴졌다. 공연장 자체가 울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게 쇼팽의 음악에 웅장함을 느끼게 해 연주에 몰입감을 더했다. 그동안 나와 연주자의 사이를 가로막았던 시공간의 벽이 사라지니 마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기분이 들었다.

 

클래식 연주회를 감상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작년 9월, 힉엣눙크 페스티벌의 한 프로그램인 <람메르무어의 루치아>가 처음이었는데, 영화나 연극, 뮤지컬처럼 늘 서사가 있는 공연 예술만 즐겼던 나에겐 낯선 경험이었다. 어떤 예술이든 명확한 주제 의식을 갖고 파악해야 속이 후련한 나에게 오로지 감미로운 선율만이 가득한 클래식의 세계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대체 이 감상을 뭐라 서술해야 할지 몰라 인터미션이 되기 전까지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클래식에 대해서 작은 생각의 변화를 겪은 나는 이번 연주회에서는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편하게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사전에 정보를 많이 찾아본다고 해도 이제 막 클래식에 입문한 내 귀에 사소한 디테일이 들리진 않을 것이다. 평론가처럼 음악을 분석하는 대신에 편하게 내가 지금 이 현장에 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화려한 볼거리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콘텐츠만 즐기다가 큰 무대에서 피아노 한 대와 한 사람만 등장하는 공연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시선을 빼앗길 여지가 적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주자의 손끝이나 자세 등을 집중해서 바라봤는데, 극의 분위기와 건반의 위치에 따라 자유자재로 자세를 바꾸는 모습이 마치 음악과 하나가 된 것처럼 보여서 인상적이었다.

 

1부에서 연주한 쇼팽의 발라드 제1~4번은 따로 나뉜 곡이라 중간중간에 공백이 있었는데 2부 프로그램인 소나타는 한 번에 30분 동안 긴 호흡으로 연주되었다. 1부에서는 ‘이 곡이 1번이구나’, ‘이제 3번 곡 차례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명확하게 파악하는 재미가 있었다면 2부에서는 ‘이제 알레그로 악장이 끝났을까?’라고 어림짐작하는 재미가 있었다. 대사도, 가사도 없이 악기 소리만 들리는 클래식 연주가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나갈 줄은 몰랐다.


 

 

연주가 끝나고 난 뒤



공연이 끝나고 복습의 의미로 그날 들은 쇼팽의 음악을 감상하며 집으로 갔다. 좋아하는 쇼팽의 음악이 더 늘었다는 기쁨과 함께 나보다 훨씬 쇼팽을 사랑했던 철학자들에게 쇼팽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시 찾아보았다.

   


“그러나 쇼팽은 마치 달의 뒷면처럼 니체가 이 세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낭만주의의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울하고 병적인 것에 탐닉하는 낭만주의 특유의 멜랑콜리아에서 쇼팽만큼은 예외였다.”

 

- <건반 위의 철학자>

 

 

<건반 위의 철학자>를 읽는 내내 추상적인 개념을 언어화하는 게 직업인 그들이 가장 비언어적인 예술, 클래식을 사랑하는 아이러니가 마음에 들었다. 나 역시 습관적으로 모든 관념을 언어화하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나 현상도 어떻게든 의미를 해석하려 하고 나만의 언어에 가두려고 했다. 때로는 언어에 담기지 않는,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것들이 있다. 그날 내가 피아니스트 조재혁의 연주를 들으면서 느낀 감정이 그랬다. 습관적으로 지금의 감상을 뭐라 서술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쇼팽의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건반 위의 철학자>에서 제일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슈만과 쇼팽, 바그너, 비제, 라벨 그리고 쇠베르크, 디지 길레스피, 팝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 고백이며 혐오하는 것은 전쟁을 선포하는 일이다. 이 이름들은 나의 신체가 세계와 타인에, 시간과 공간에 관계하는 실존적 방식이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사랑과 혐오는 내 실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진술이다. 

 

 

‘사랑과 혐오가 실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진술’이라니. 최근 몇 년 동안 나만의 취향을 발견하고 알리는 데 열중했던 나를 위한 문장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날 나는 클래식에 대한 나의 사랑을 발견했다. 그 덕에 나의 실존은 깊어졌고 내가 존재하는 세계도 넓어졌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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