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서브웨이, 캐리어, 오이만두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에서
글 입력 2022.05.2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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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의 끝자락. 나는 라스베가스를 지나 시카고, 지금 뉴욕에 있다. 마지막 여행의 행선지에서 지난 조각들을 모아 짧게나마 적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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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버를 기다리는 호텔 안 벤치에서 우리는 재미있게도 나란히 앉아있었다. 호텔에 들어가면 45달러를 더 내야 한다는 말에, 아예 밤을 지새우기로 한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딱 하루만 묵을 숙소를 예약했는데, 새벽 두 시에 그랜드 캐니언 투어를 맡아주실 가이드님이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그전까지 방에 들어가지 않으면 적어도 45달러를 아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게임을 하다가, 호텔 소파에서 손톱만큼만 남아있던 배터리를 다시 충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금방 허기가 져서 근처 서브웨이에서 채소가 많이 담긴 데리야키를 주문했고, 넘칠 듯한 코크를 들고선 그렇게 다시 그 벤치에 앉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잠도 자지 않고 씻지도 못한 채로 곳곳에 돌아다녔던 일들이 고단하기도 해서, 흔히 말하는 여행의 ‘절망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절망이라는 생각이, 아니 힘이 든다는 생각조차 전혀 들지 않았다. 호텔 1층에서는 누구도 폐인이 아닌 채로 정중하게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했고, 그 속에 소소하게 즐기는 우리가 있었다. 더구나 그동안의 이야기를 곁들여서 서브웨이를 한입씩 베어 먹는 우리도 있었다. ‘그때 말이야’부터 시작해서, 깔깔깔 웃다가 ‘있잖아~ 사실 나는’과 같은 진지한 얘기도 하는. 그런 토크와 서브웨이의 조합은 늘 괜찮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절망이 아니라 고단함까지 아름다워져 버린 낭만을 느꼈다.


며칠 간의 라스베가스 여행이 끝나고 나니, 잠을 푹 자지 못해 그런지 몸이 붕 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쉴 틈도 없이 곧 다음날 시카고로 가기 위해 기숙사의 모든 짐을 정리해 캐리어에 담았다. 이젠 교환학생 생활도 끝이 났다는 생각까지 꾹꾹 눌러 담았더니, 눈물이 수도꼭지처럼 터져 나왔었다. 가족같이 지내던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비행기 안에서 약을 삼킨 뒤 여러 번의 쪽잠을 자며 열을 잠재웠다. 이전부터 이놈의 몸은 항상 골골대는 게 문제였다.


몸도 그렇지만 내 가방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네이비색 이스트팩은 한도 초과 상태였고, 내 캐리어도 불쌍하다시피 겨우 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과 같이, 기어코 바퀴 하나만 남아 버렸고 외면이 거의 다 부서져 있었다. 다행히 짐은 해체되지 않았지만 배기지클레임에서 내 캐리어를 발견했을 때는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G양과 나는 보자마자 ‘풉, 하하하하’ 하고 웃어버렸는데 그건 몇몇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다들 미세하게 웃음을 참은 채로, 내 캐리어를 바라보았고 나는 낑낑거리며 누군가의 친절한 도움을 받아 내려서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기침처럼 새어 나오는 웃음과 민망함을 참고서, G양과 나는 대안으로 청테이프를 꺼내 캐리어에 둘둘 붙이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은 숙소로 가져가야 하니까. 그렇게 테이프를 붙이는 데 여념이 없던 중 초록색 유니폼을 입은 한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우리가 탔던 항공사 직원이었고, 부서진 캐리어에 대한 보상을 하겠다고 했다. 살짝은 웃음이 섞인 공감의 표정으로, ‘지금 테이프 붙이는 걸 그만두는 게 좋겠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고서는 새 캐리어를 곧 가져다주는 게 아닌가. ‘오예!’가 저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퀴 없는 28인치 캐리어를 어떻게 들고 갈지 푸념 섞인 고민을 했는데, 기대하지도 못한 데서 새 캐리어를 쉽게 얻다니 이런 코미디 같은 상황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또 절망이 아닌 희망 섞인 낭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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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시카고는 바람이 많이 부는 도시인만큼 꽤 추웠고, 거리 자체는 자유로웠지만 눈길 닿는 곳마다 깔끔했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도 도시를 닮아, 아늑하게도 잠이 솔솔 왔다. 어찌나 솔솔 왔던지 아마 첫날은 기절한 것처럼 잠만 잤던 것 같다. 걸을 때는 평평한 바닥에서 끼익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옷을 조심히 걸지 않으면 툭 떨어지는 옷걸이 때문에 작은 웃음벨도 생겼다. 둥그런 식탁은 조용히 윤이 났고, 가끔 마주치는 여행객끼리는 섬세한 배려를 주고받았다.


어느 날 밤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처럼 노르스름한 불빛 아래 핑크색으로 물든 버킹엄 분수로 달려가 구경했다. 이후 바쁘게 놀고 나서 뜨끈한 한식을 먹고 싶던 우리는 H 마트를 들르기로 했는데, 여기서 실수로 구매한 오이만두 때문에 얼마나 또 웃었는지 모른다. 하필이면 만두 앞에 붙은 ‘오이’라는 글자를 G양과 나 또한 보지 못하고 사 버렸던 것이다. “너 이거 봤어? 이거 오이 만두래…” 둘 다 오이를 잘 못 먹었기 때문에 ‘오이’라는 단어를 주방에서 발견했을 때 소리를 질러버렸다. 마치 어릴 적 문방구에서 뽑기를 했다가 좋아하는 캐릭터 대신 매력적인 악당이 나온 느낌이다. 그래도 다행히도 감기 때문인지 오이 향이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말 코미디 아니냐며, 웃음과 같이 먹었던 오이만두는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

 

사실 자정 넘어 바람이 들어오는 벤치에서 먹는 서브웨이, 바퀴까지 부서진 캐리어, 취향이 맞지 않는 오이가 섞인 만두는 완벽에 가깝도록 깔끔하게 떨어지는 여행은 아니다. 어딘가 부족하고 흠이 많은 일들이지만, 오히려 더 여행을 사랑스럽고 재미있게 느끼게 해준다. ‘우리 그때 기억나? 너 캐리어 부서지고, 왜.. 오이향 나는 만두 있잖아.’라고 말하는 미래가 곧 그려질 듯하다.


그래서 여행에 있어서 절망편은 없는 듯하다. 날씨가 흐리면 흐린 대로, 잠을 자지 못하면 자지 못한 대로. 만두인데 오이 향이 좀 나는 채로. 가끔은 이렇게 오이 만두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색다른 재미 요소가 들어가 있는 것뿐이다. 오로지 주인공인 여행자가 현재를 배경으로, 상황에 집중하며 절망을 느낄 새도 없이 희망 섞인 낭만을 느끼는 편만 등장한다.

 

지금은 ‘뉴요커들은 뉴욕을 안전하게 지킨다’는 말이 쓰인 메트로 카드를 들고 기차를 탄다. 잔잔히 오가는 스몰톡, 창문 속에서 초록으로 우거지는 빗방울을 듣고 바라보며, 이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뉴욕을, 이곳의 낭만을 조금 더 깊게 맛보고 싶다는 상념에 빠져든다.

 

 

P.S.

며칠 전 G양이 식당에서 받은 포춘 쿠키 안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Experience is what you get when you don’t get what you want.” (경험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얻는 것이다) (이후 찾아보니 Randy Pausch의 저서, The Last Lecture의 한 구절에서 비롯된 듯하다) 아마 이 보물과 같은 문구가 지금껏 여행의 타이틀이 되리라. 그리고 어김없이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해준 G양에게 사랑을 담아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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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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