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럼에도 ‘삶’이란 ‘여정’을 이어가는 우리에게 - 어디갔어, 버나뎃 [영화]

'나'와 '내 곁의 소중한 사람' 모두를 진정으로 이해하기까지
글 입력 2022.05.0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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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의

스포일러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삶’은 종종 어딘가로 향하는 하나의 ‘여정’으로 비유되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어딘가로 가기 위해 계속 나아가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겨왔고, 잠시 멈춰 쉬거나 경로를 벗어나면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 받기도 한다.

 

하지만 애초에 삶이란 여정은 우리가 머무르고 걸어 온 과정 그 자체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멈추고, 도망치고, 쉬어 가면서 앞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고,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러니 잠시 멈춰 쉬거나 도망가더라도 그것 역시 우리가 소중히 이어 온 여정을 이루는 하나의 발걸음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발걸음이, 혹은 다른 누군가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어디에 멈춰 있는지, 그 발걸음 하나하나를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돌아봤을 때, 우리가 걸어온 발걸음을 통해 조금 더 나아진 자신과 주변을 볼 수 있기를,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나온 발걸음 끝에 그들이 행복할 수 있는 곳에 서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한 사람이 다시 나아가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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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디갔어, 버나뎃(2019)>의 주인공 ‘버나뎃’도 오랜 시간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왔다. 그는 ‘남성 위주의 업계에서 홀로 활동한 젊은 여성’, ‘최연소 맥아더 상 수상자’, ‘녹색 건축 운동의 선구자’로 주목받던 건축가였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거의 20년 동안 창작을 멈춘 채 가족 외의 사람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으며 살아 왔고,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이웃들과는 계속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킨다.

 

 

[꾸미기]스틸컷_버나뎃_선글라스.jpg

 

 

버나뎃의 남편 ‘엘진’은 그런 버나뎃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달아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버나뎃은 오랜만에 만난 동료 건축가에게 자신이 여전히 20년 전 ‘실패’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계속 괴롭다고 털어 놓는다.


 

"있지, 엘진은 내가 아직 LA에서 못 벗어 났다는 걸 몰라."

 

"무슨 뜻이야?"

 

"어젯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어. 잠에 취해서 멍한 상태였지.

그런데 갑자기 온갖 생각이 떠오르더라.

버나뎃 폭스, 20마일 하우스, 철거, 실패.

실패가 내 안에 파고들어서 놓아주질 않아."

 

 

버나뎃은 ‘실패’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버나뎃이 20년 전에 겪은 일은 버나뎃의 잘못은 아니었다. 버나뎃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기에 원하지 않게 너무 큰 관심의 중심에 있었고, 의도치 않게 질투와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재능에 열광했지만, 정작 버나뎃이 어떤 마음으로 건물을 지었는지, 왜 그렇게 지었는지, 또 버나뎃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 명의 예술가로서 또 인간으로서 버나뎃 자체를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렇듯 어쩌면 버나뎃은 끊임 없이 삶의 많은 부분을 ‘무단침입’ 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의 끊임 없는 간섭에 버나뎃이 ‘사유지’, ‘무단침입 금지’ 같은 경고판을 설치했던 것처럼 말이다. 맹목적인 추앙과 시기 섞인 조롱과 괴롭힘 모두 버나뎃의 삶 속에 허락 없이 파고 들어와, 버나뎃과 그의 작품을 망가뜨렸다. 여기에는 그가 ‘남성 중심 업계에서 대부분의 남성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성’이었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게 버나뎃은 창작 현장에서 벗어나 도망쳐 왔고, 사람들과 깊게 소통하고 교류하는 것을 피해왔다. 어쩌면 그것은 버나뎃이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었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는 디스카운팅 메커니즘을 따른다는 말을 아는가?

누가 선물을 줬다고 가정해보자. 그게 마음에 쏙 드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면

처음에는 정말 행복하다. 다음날에도 행복하지만 전날만큼은 아니다.

1년 뒤에는 목걸이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뇌는 왜 이러는 걸까?

살아남기 위해서다. 원래의 것에 익숙해져야만 새로운 위협을 감지할 수 있으니까.

아예 리셋 된다면 좋지 않을까? 이제 인간들은 짐승의 습격을 받을 일이 없으니까. 

이건 분명 뇌의 디자인 상 결함일 거다.

감사함이나 기쁨 대신 위험, 생존 신호나 탐지하다니.

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위험 신호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삶의 아름다움은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아빠도 엄마의 보석 같은 면을 보지 못하게 됐겠지.

 

 

버나뎃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딸인 ‘비’의 나레이션처럼 버나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모든 에너지를 다 써야 했기 때문에, 그들 곁에서 살아가기 위해 위험과 위협에 몰두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버나뎃은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것들에 감동하는’ 사람이었고, 삶 곳곳의 아름다움을 끝내 발견해낸다.

 

 

[꾸미기]스틸컷_버나뎃.jpg

 

 

그리고 버나뎃은 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또 다시 도망친 것일 뿐이더라도, 그 걸음을 내딛기까지 버나뎃이 낸 용기는 단순히 상황에 떠밀렸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었다. 버나뎃은 새롭게 내딛은 발걸음 끝에 자신이 품고 있던 창작욕과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물을 짓던 소중한 마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발견한다.


실패와 위협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 온 그곳에서 버나뎃이 마주한 것은 오랜 기다림이었다. 버나뎃은 오래 창작 현장을 떠나 있었지만, 누구보다 자신이 무언가를 만드는 순간을 오래 기다려 왔던 건 버나뎃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버나뎃이 사랑하는, 버나뎃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런 버나뎃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며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기다려 주었다.

 

이제 버나뎃은 새로운 곳을 향해 자신의 여정을 이어간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한 실패이든, 갑자기 찾아온 불운이든, 수많은 이유로 더는 나아갈 힘을 잃었을 때, 우리는 잠시 멈추고 무언가를 피해 도망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겪는 고통이나 아픔을 합리화하고 축소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계속 나아가는 것을 멈추고 도망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그들을 비난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런 시간들이 어쩌면 더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한 기다림의 과정 일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기다림 역시 우리를 아름다운 풍경으로 데려다 주는 ‘삶’이란 여정의 일부가 된다.

 

어쩌면 오랜 기다림에 지쳐있을 당신의, 또 우리의 여정이 버나뎃의 여정처럼 그럼에도 계속되길,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끝내 스스로를 지켜낸 우리가 ‘위협의 신호’가 아닌 ‘삶의 아름다움’을 더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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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여정’을 지키는 일


 

영화 속에서 엘진은 이웃과 잘 지내지 못하고, 항정신성 약품을 모아두고 있는 버나뎃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상담 전문가를 만나 버나뎃의 입원을 이야기하는 등 문제를 해결하고 도움을 주려고 한다. 하지만 버나뎃의 본심이나 사실과 다르게 과장되고 왜곡된 부분이 있었고, 버나뎃은 엘진의 ‘도움’을 피해 떠난다.

 

버나뎃이 떠나고 비와 여러 이야기를 나눈 후 결국 엘진은 버나뎃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문제라고 여겼던 것을 비에게 고백한다. 엘진은 버나뎃을 사랑했지만, 세심하지 못했던 그의 애정은 결국 버나뎃을 창작의 현장보다는 집 안에, 가족 안에 더욱 묶어 두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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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엄마를 망친 것 같다. 예술가인데 창작을 그만두게 됐잖아.

그렇게 둬선 안 됐는데."

 

"왜 그냥 두셨어요?"

 

"모르겠다. 방법을 몰랐던 거 같아.

엄마같이 천재적인 예술가를 이해하는 방법 말이야. 엄청난 일이거든,

난 로봇이나 만질 줄 알았지 네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어."

 

 

어쩌면 당연하게도, 남극의 수많은 유빙들처럼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보거나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작은 부분일 수 있다. 그것이 아무리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엘진은 딸이 태어난 후 버나뎃에게 ‘성 버나뎃’ 목걸이를 선물한다. 18가지 계시를 받았던 성 버나뎃처럼 건축가 버나뎃도 2개의 멋진 건물을 완성했으니 앞으로 16개는 더 멋진 건물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엘진은 의도하든 않았든 딸이 태어나기까지 버나뎃이 겪었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하지 못했고, 비와 버나뎃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와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버나뎃은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동료에게 이 목걸이 이야기를 하며 나머지 16개의 계시를 모두 뭉친 존재가 딸인 비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버나뎃에게 비는 ‘전부’가 된다. 비 역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엄마라고 이야기한다. 비는 영화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버나뎃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자신의 전부로 두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희생’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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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봤는데, 제가 16가지 계시를 다 차지할 순 없어요."

 

"그래, 아직 많은 계시가 남아 있어."

 

 

영화의 후반부, 버나뎃을 찾아 남극기지를 찾아 온 엘진과 비는 다시 성 버나뎃 목걸이를 버나뎃에게 건네며 자신들이 버나뎃의 전부를 차지할 순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남극기지를 만들기 위해 오랜 기간 남극점에 머물러도 되겠냐는 버나뎃의 물음과 결심을 지지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은 ‘숭고함’으로 이야기되고, 그것의 가치를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상적인 사랑이란 ‘제로섬(zero-sum)’이 아니라 ‘포지티브섬(positive-sum)’의 관계가 아닐까? 자신을 희생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하며 함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통해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한 '나'를, 그리고 '너'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긴 시간과 수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진실은 복잡한 법이란다. 상대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어."

 

"당연히 복잡하죠. 복잡하다고, 아빠가 상대의 마음을 속속들이 모른다고,

노력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제가 노력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요."

 

 

버나뎃이 떠난 직후 버나뎃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엘진에게 비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일은 당연히 복잡하지만, 노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종종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채 상대방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 하면 당황하며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으며 곁에 있기 까지는 오랜 시간 많은 대화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거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걷는 길을 바라보며 그저 곁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일 것이다. 멈추거나 달아나더라도, 다시 나아가겠다고 결정하더라도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서 함께 기다려주겠다는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말을 적는 것은 조심스럽다. 하지만 이는 신도, 전문가도 아닌 그저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며 곁에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기도, 그런 우리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에서 비와 버나뎃은 함께 차를 타고 가며 신디 로퍼(Cyndi Lauper)의 ‘time after time’이란 곡을 부른다. 이 곡의 가사를 보며 서로의 곁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기다려 준 버나뎃과 비의 관계가 잘 녹아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한 발자국을 나아가든 잠시 멈춰 섰든 또 다른 곳을 향해 달아났든, 어떤 형태로든 삶을 지켜낸 대견한 당신에게, 그리고 그 곁을 지켜낸 또 다른 당신에게 이 곡의 가사 일부를 남겨두고 싶다.

 


당신이 길을 잃고 돌아보면 항상 내가 있을 거야

(If you're lost you can look and you will find me)

언제까지나

(time after time)

 

당신이 넘어지면 잡아 줄게 난 기다릴 거야

(If you fall I will catch you I will be waiting)

언제까지나

(time after time)

 

 

 

김효중 태그 .jpg

 

 

[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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