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도둑맞은 비행기 표

키XX컴에 비행기 표와 여행을 몽땅 도둑맞았다
글 입력 2023.11.0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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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 안 했는데?

 

 

막 영월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 서울로 진입하며 일어나는 병목구간 교통 정체의 빨간 파도 가운데에서 최후 통첩을 들었다. 우리 비행기 표가 도둑맞았단다. 나는 별안간 멍해졌다.

 

10여 일 전, 키XX컴을 통해 예매한 비행기 표를 취소했다. 우리는 어쩌면 현대의 서비스를 너무 믿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환불이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라고, 너무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아직 비행까지는 3주의 시간이 남아 있었고, 2~3일 내에 환급되는 대로 새로 예매할 생각에만 들떴다. 환불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다.


우리 비행기 표는 실체 없이 분해됐다. 키XX컴, 이 자식들... 예매 취소 시 환불수수료가 100%라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아직 3주나 남아있다고, 우리가 빠진 그 자리로 얼마든지 새 고객을 받아볼 수가 있다고. 우리 비행기 표는 예쁜 코팅지에 인쇄되지도 못한 채, 데이터 쪼가리에서 무 無로 돌아갔다. 실체 없는 약속에서 또 다른 약정 속으로 사라졌다. 92만 원이 단 1분 안에 사라졌다. 이런 순 사기꾼놈들. 기어이 너희가 그걸 다 먹어버리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걸 사기라 불러볼 수 있을까. 이런 데까지 구석구석 꼼꼼하게, 나의 반문하는 습관은 뻗댄다. 그래, 사기라고 굳게 생각해버리고 말기엔 여전히 찝찝한 부분이 남아 있지. 그들은 세부 조약에 '고객에 의한 예매 취소 조항'을 넣어두었고, 우리가 예매한 saver 유형의 비행기 표는 환불이 제한적이라는 내용은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다음에나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유형도 상황은 매한가지였는데, 어떤 유형은 10유로만 환불해준다 하고 그마저 그들의 바우처로만 환불받을 수 있으며, 최대 3~6개월이 소요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키XX컴으로 예매하지 마세요.


다른 이들의 후기에는 이렇게도 적혀 있다.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보딩패스에 적혀 있는 시간이 아닌" 비행기를 타게 될 불가피한 경우에도 환불이나 보장이 안 되고, 항공사 측의 실수로 성과 이름이 뒤바뀐 탓에 탑승수속이 어려운 경우에도 환불이나 보장이 안 된다. 심지어는 항공사 측 사정으로 비행기가 취소되는 경우에도 환불이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키XX컴으로 예매하지 마세요.

  

그냥, 그렇게 적혀 있었다. 속도 편하지. 적어두면 그만이라니. 대표 홈페이지의 환불 안내에 적혀 있는 상냥한 문구들이 역겨웠다. "환불이 어려우실 수도 있어요." 마치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자기들을 변호하는 인상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세상은 늘 이런 식이지. 대외적인 명분은 충분하다. 자기들은 이미 상기 내역을 전부 공지했기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며 따지는 손님에게는 규정상 어쩔 수 없다고 말할 것이며, 도대체 왜 안된다는 거냐고 묻는 손님에게는 내부 방침상 알려 드리기가 곤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객 콜센터라는 아이디어를 발명한 놈은 하여간 대단한 놈이다. 내가 접하게 될 상담원들은 성난 분노를 받아내는 방파제이고, 이런 의사결정을 한 놈들에게는 한 톨의 목소리도 닿지 않겠지. 그래, 세상은 늘 이런 식이야. 이용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이용하되, 그 대가와 책임에 있어서는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하고 숨을 수 있으면 얼마든지 숨지.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야.


 

친구가 보낸 느닷없는 '큰일났다'라는 메시지 한 줄에서, 나는 이미 여기까지의 모든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고 혹시나 하며 기대하던 이변은 없었다. 급하게 환불에 관한 조항과 리뷰를 찾아보기까지의 내 작은 수고스러움들은, 촌각에 예기한 상기 최악의 상황을 되짚으며 확인해나가는 일에 불과했다. 화가 났다, 많이. 눈동자로는 불길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나의 형제는 어찌할 줄을 몰라하며 난처해한다, 메시지의 메마른 언어로도 충분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도 이미 그가 우려하던 것들이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원망이다. 사정은 이렇다. 친구가 일본 여행을 가자고 했다. 5년을 거의 붙어 다닌 친구, 나의 형제,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우리는 여행다운 여행 한번 가지 못했다. 나는 아쉬움을 토로했고, 친구는 큰맘 먹고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했다. 내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일본, 그 친구는 예전에 일본을 여러 번 갔고 일본어에도 아주 능통하다. 자기가 다 알아서 맛있게 쌈 싸드릴 테니 따라만 오라고 말해주었다. 나로서는 두 번째 해외 여행. 나는 매우 흥분했고 그 녀석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했다. 


처음에는 3박 4일 일정의 후쿠오카를 계획했다. 하지만 친구에게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여행이 2박 3일로 줄어들었고, 짧아진 일정만큼 우리는 비행기 시간에 더욱 민감해진다. 6년 만의, 그것도 두 번째 해외 여행이잖아. 나는 시어머니처럼 깐깐해지기 시작했고, 그걸 알고 있었다. 출발이 오후 2시인데, 복귀가 오전 10시라니. 이래서야 일본을 하루밖에 볼 수 없잖아, 그건 너무 아쉽다고. 비행기 표도 그렇게 싸지 않았다. 꼬박 하루 둘러보는데 왕복 38만 원이라니. 그렇게 며칠을 더 나은 시간대의 항공편이 뜨기를 바라며, 회사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몰래 핸드폰을 뒤적거려 물색하다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로 한다. 오사카였다. 


오사카행 비행기는 더 좋은 시간대의 매물이 있었다. 오전 7시 출발, 오후 4시 복귀인데 가격은 41만 원 선이니, 이 정도면 흡족하다. 회사에서의 내 자리는 사장님 상무님 바로 앞 자리인지라, 모니터를 바라보는 시선의 궤적을 유지하면서 발권을 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친구에게 82만 원을 송금했다. 그러나 송금을 하는 도중에 그 비행기 표가 매진되었다. 친구는 급해진 마음에 카톡으로 상황과 의견을 나눌 새도 없이, 다른 표라도 일단 잡아두겠다는 심산으로 예매를 강행한다. 오전 07시 출발, 오후 6시 복귀, 인당 46만 원, 도합 92만 원, 문제의 그 표다. 



예매를 하고, 친구는 카톡을 날렸다. 우리가 찜한 비행기는 매진되었고, 일단 급한 마음에 비슷한 조건의 표를 예매했단다. 나는 조금 찝찝했다.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는데, 나는 돌다리를 서른 번 두들기다가 차라리 돌다리를 가라앉히는 타입인지라, 어딘가 불안했다. 친구는 만약 나와 의견이 다를 경우 예매취소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하지만 비행기 예매에 얽힌 악명을 들은 바 있거니와, 환불에 대단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아는데... 아직 기다릴 시간은 3주가 넘게 남은 반면, 얼리버드로 싸게 가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애매한 시간대. 혹여 못 가게 되더라도, 다음이 있지 않은가. 너와 함께라면 일본이건, 강원도건, 심지어 서울 안에서도 우리는 즐거울 수 있다. 만약 좋은 비행기 표를 찾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이걸 빌미로 삼아 다음의 여행을 더욱 기대할 수 있다. 더군다나 오사카 왕복 46만 원이면 그렇게 좋은 가격대도 아닌걸. 내가 깐깐한 탓이 컸지만 여러모로 더 좋은 기회와 판단이 있을 수 있고, 이미 늦은 판국에 우리는 느긋하게 선택키로 했다. 친구는 곧바로 예매를 취소했다. 이 모든 게 1분 안에 일어난다. 

 

항공 산업은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걸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스카이스캐너로 찾아낸 피치 항공사의 비행기를 예매하자니, 뚱딴지같이 키XX컴이 사이에 끼어 있었다. 스카이스캐너는 단순하게 항공권의 조회와 색인을 도와주고, 키XX컴이 발권대행을 맡으며, 비행기 운행은 피치 항공에서 하는 구조인가. 스카이스캐너 덕분에 항공권을 한눈에 조회하고 쉽게 예매할 수 있게 되었지만, 각 플레이어들의 조약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은 뒤로 미뤄졌다. 딱히 우리의 해이함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편리함이 가지는 그늘이자 이면일 뿐. 그렇게 쉽고 편하게 만들어뒀는데, 예매할 적마다 '홈으로 가기', '구글에 항공사 검색하기', '조약 사항 검토하기'라는 번거로움을 반복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예매취소를 해두고 우리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주말엔 요즘 폭 빠진 문래동을 다시 찾았고, 너무도 멋진 카페를 발견했다. 그 카페에서도 우리는 일본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사카에서 교토가 얼마나 걸리는지를 알아보기도 했고, 비행기 표도 새로 알아보았다. 오사카행은 일전의 46만 원짜리보다 좋은 조건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친구는 삿포로행이 얼마인지를 찾아보았다. 왕복 84만 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나는 홋카이도에 대한 동경이 크고 친구는 그걸 잘 알고 있다. 홋카이도에 대한 나의 막연한 동경은 '오겡끼데스까-'로 유명한 영화 러브레터에서 시작된 것 같다.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연출되던 눈 덮인 평원, 오타루 시는 삿포로에 바로 접붙어 있다. 뿐이랴, 내가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과의 몇 안 되는 추억도 삿포로에 얽혀 있었다. 정말 별것 아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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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사랑을 했다'라고 느껴본 적은 단 두 번이다. 한 번은 첫 여자친구에게, 그 다음은 삿포로의 그녀에게. 지독한 짝사랑이었지. 그 사람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이후로도 만 2년을 꼬박 그리워했으니. 그녀와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삿포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건 그녀와 나눈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는데, 중급 일본어 강의의 기말고사를 마치고 난 다음, 나는 친구들과 광장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더랬다. 이제 이 강의를 끝으로 나는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끓는 마음에 급발진하려 했으나 다른 여사친 한 명이 나를 말렸다. 그 사이에 끼인 자신이 난처해진다고, 그녀와의 희미한 연이 자기에게 있으니 방학 때 한번 자연스럽게 자리를 추진하겠노라 말하며 나를 다독였다. 


중급 일본어 강의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나의 형제, 그리고 알며 지낸 지가 꽤 된 같은 과 여 후배, 그리고 나, 우리는 한 학기를 내내 붙어 다녔다. 한 학기 내내 우리의 입을 오르내린 것은 나의 짝사랑 이야기였다. 기말고사가 한창인 중임에도 우린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험기간을 까먹고 있었다. 그리고 웃고 떠들던 우리들에게로 갑자기 그녀가 다가왔다. 나는 멀리 시야를 가리는 모퉁이로 그녀의 실루엣이 등장하자마자 그녀를 알아보았다. 정말로 사랑이란 신기하지, 거긴 온통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말이다. 딱히 영화에서 말하듯이 빛이 나진 않았지만, 나는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쪽으로 눈을 두고 있지 않았는데도 말이지. 


그리고 그녀가 다가왔다. 친구들은 흥미진진하다는 입꼬리를 억지 감추며 숨죽였다. 여 후배와 연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인사를 건네기 위해 온 것인가. 그녀는 우아하게 다가와 자기도 잠시 끼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의 형제는 상석을 내어주며, 나보다도 기뻐했다. 한 학기 내내 우리가 그렇게 즐거워 보였다며, 친해지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노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에 대해 소개했다. 그녀는 일어일문학과 소속이고 편입생이라 학교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으며 테니스 동아리 부회장을 맡고 있고 운동과 맛집과 여행을, 무엇보다 해외여행을 좋아한다.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다, 국내여행 위주로만 다녀서 그렇지. 나는 언젠가 삿포로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자기가 가본 곳 중에는 삿포로가 가장 아름다웠고 다들 겨울 삿포로를 추천하지만, 자기는 여름 삿포로를 꼭 추천한다고, 자기한테 연락을 주면 가볼 만한 곳을 잔뜩 알려주겠노라고, 삿포로를 말하는 동안 그녀의 눈은 반짝였고 나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연은 거기서 끝이 나고, 정확히는 도둑맞았고, 여 후배와의 인연도 끝나고 말지. 뭐, 시시한 이야기다. 


이 모든 걸 직접 목격한 나의 형제로서는 내가 얼마나 삿포로를 동경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아는 수밖에. 이제야 그녀를 떠나보냈고 더는 예전처럼 추억하지 않지만, 그 후로도 장장 4년을 더 붙어 다닌 그로서는 내가 얼마나 오래 가슴앓이를 했는지를 모조리 겪었으니까. 나는 그녀를 추억 속으로 아주 보냈지만, 언젠간 꼭 삿포로에 가겠노라고 생각하고 있다. 거기 이르러 이 서사가 충분히, 그리고 완전히 끝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삿포로는 이제 여행지 이상의 것, 젊은 날의 싱싱하고 푸른 추억, 그 상징이 되어 있었다. 말로는 조금 쓸쓸했지만, 우리 셋은 그 학기 동안 정말로 행복했고 서로를 의지했다. 공강의 외로운 시간이면 언제나 서로를 찾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다람쥐길부터 중앙도서관 앞까지, 모조리 함께였다. 중앙도서관 앞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나눴던 수많은 이야기들은, 이제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풍경만큼은 얼마든지 기억할 수 있다, 아련함. 삿포로는 나의 그녀와 불같이 일렁이던 짝사랑의 강렬함과 이제는 멀어진 여 후배와 아직까지도 곁을 지키는 내 형제와 우리의 따뜻했던 추억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 대학교 막 학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후회와, 후회와, 가을이다. 그리고 키XX컴 이 자식들이 그걸 빼앗아버렸어, 이 놈 자식들, 내 추억의 서사에 똥칠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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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는 연중 비행기 값이 비싸다. 그래서 이 정도 가격이면 매우 훌륭한 편이지. 우리는 새로운 항공편에 하트를 누르고 흡족해했다. 자리도 널널하구만 그래. 그리곤 잠시 추억에 빠져 황홀한 상태에 머물렀고, 그러는 중 카페 한 귀퉁이의 밴드셋 앞으로는 인디 여성 듀오가 공연을 준비했다. 예기치 못한 것들이 더얹어주는 설렘, 알앤비 박자를 타며 내 가슴은 뛰었다. 우리는 알앤비를 좋아하거든. 가창은 훌륭했고 선곡도 빼어났으며 우리는 더없이 좋은 관객이었다. 관객은 우리뿐이었지만, 단언컨대 우리가 8인분 만큼은 호응해주었다. 자신을 보컬리스트라 칭한 두 공연자도 우리에게 감사를 표해주었고, 서로 짧고 간명하고 상쾌하게, 그날의 즐거움과 감사의 인사를 나누었다. 모든 게 이상할 정도로 훌륭했고, 방심하리만치 즐거웠어. 그래, 세상은 결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지. 제기랄, 개똥 같은 머피의 법칙, 내 빌어먹을 염세가 또다시 근거를 집어먹으며 타오르는군. 


내 형제, 나의 가장 비밀한 부분까지 모조리 알고 있는 그에 대해 원망이 생겼어.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솔직한 편이라, 그 감정을 묵살하지 못하지. 네 초조함은 그런 나를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우리는 카카오톡의 차가운 벽을 가운데에 두고 생각하지. 너는 나를, 또 나는 그런 너를. 조금만 더 신중해 주었더라면... 기우 杞憂란 일어나기 전까지는 지나침이나,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필연이 되어, 단단한 후회의 증거가 되어버리곤 하지. 말하자면, '내 그럴 줄 알았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거야. 이때 우리는 조금 더 깊은 후회와 죄책을 겪어야 하겠지. 

 


그렇지만, 뭐 어떻게 하겠어. 일은 벌어졌고 답은 정해졌으며, 우리에게 남은 것은 받아들임의 문제일 뿐.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어려움이겠지만 별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하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찌할 텐가, 길은 한 가지로만 나 있음을 안다. 결국엔 정해진 것이었던 양 받아들일 때까지, 또 얼마나 우리의 가슴은 빨갛게 분노를 토해야만 할 것이고, 시간과 망각의 축복이 이 감정을 삭혀줄 때까지 우리의 가슴은 뜨겁게 소리치며 파르라니 헤져갈 것인가. 최근 들어 나는 이런 게 모조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염세는 세상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하여 거꾸로 드는가. 


나는 화가 날 때면 차게 식는 버릇이 생겼어. 내가 아주 좋아라하는 몇 안 되는 습성이지. 불같이 뜨거운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언제나 타고 난 자리에 후회의 재를 남기곤 하지. 나는 후회가 지겨워, 싫은 게 아니라, 지겨워, 너무 많이 했어. 또 불길에 정신을 잃고 휘청이는 동안 네게 나를 퍼붓고, 단 하룻밤의 잠을 기점으로 감정은 옅어지고,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고... 너는 용서하고, 우리 사이에 잠깐의 어색함과 억하의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너는 그걸 외면하고 안아들려 하겠지만, 나는 외면하려는 너의 노력과 그럼에도 완전히 지워낼 수 없는 까만 감정의 흔적을 맡아버리고, 내 예리함은 원치 않는 동안에도 그것을 잡아채버리고, 잊어버리지 못하고, 불편해하고,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필요한 필연한 시간, 오로지 그때 필요한 것이란 시간뿐이라는 사실을 겨워내고, 네게 재차 용서를 구하고, 그럼으로써 너의 노력을 무색한 것으로, 의도치 않게, 그러나 이미 그러한 의도가 함의로써 정해져 버린 용서를 구하고, 너는 괜찮노라, 괜찮음을 더욱 애써야 하겠지. 지겨워. 바깥을 향하여 뻗어 나가던 염세는, 오래고 오래어 지루한 것이 된 나머지 이제 내 심장을 향하여 독한 냉소를 퍼붓는다. 화내서 뭐하게, 바뀌는 것 없잖아. 지겹다고, 감정의 이 필연한 연쇄가. 욕은 키XX컴에다가만 하자. 나는 화낼 곳과 내 감정의 가늠쇠가 향할 방향을 정해두고 네게 전화를 건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서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담배 하나를 다 태우기 전에 생각을 정리한다. 우리, 욕은 키XX컴에다가만 하자. 곁가지로 자꾸만 뻗어 나가려는 생각은 차갑고 날카로운 가위로 몽땅 잘라내 버릴 거야. 그리고 분노를 치워버린 다음에도 남아 있는 아쉬움은, 다른 여행을 생각하며 덮어버리자고. 그건 지워낼 수도 잊어낼 수도 없는 거니까. 너는 그걸 잊으려 노력하겠지만, 나는 그게 잘 안돼. 나는 내게 지나치게 분명하거든. 하지만 덕분에, 나는 그걸 상쇄할만한 더 커다란 무언가를 꾀한다. 우리의 여행이, 삿포로가 가지는 상징은 더욱 커지는군. 좋아, 나는 이걸 낭만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을 겪고 지나온 사람처럼 지금을 바라볼 거야.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 친구. 

 

야- 그때 우리 비행기 표 사기 먹고, 응? 나는 영월에서 막 복귀해서 피곤하고 정신없고, 니 막 불안해서 나한테 사과하고 그랬었는데, 오히려 좋아. 우리는 늘 그랬듯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히려 좋아. 그러면 명료해지는군. 이제 좋을 일을 생각해야겠어, 무얼 하면 반드시 좋을 것인지를 생각해야겠어. 더욱 첨예하게, 완벽하게, 모든 예상과 계획이란 일어나기 전에는 언제나 기우라는 불완전함과 함께 있으나, 그것을 필연으로 만들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해야겠어. 나는 이런 일에 능통하지. 그리고 그건 친구, 역설적으로 나의 오래된 냉소 덕분이라는 것을 알아주어. 너는 나를 조금 더 알게 되었을까. 모쪼록, 좋은 밤 되라구. 다한. 


 

p.s. 여러분 절대로 키XX컴에서 항공권 예매하지 마세요. 


p.s. 2 스카이스캐너로 예매할 때도 발매대행사를 꼭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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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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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P모군
    • 이 글의 글감을 제공한 본인입니다. (...) 일본과 여행이 그에게 지니는 의미를 누구보다 안다고 자신했고, 그래서 더더욱 이번 여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 먼저 또 자주 가본 사람으로서 - 완벽에 가깝게 책임지고 싶었던 나의 정성이 도리어 화를 일으킨 꼴이 되어버려 멋쩍기 그지 없군요. 역시 세상에 순전히 선의와 정성과 마음으로 되는 일만 있는 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키XX컴에서 비행기표 알아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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