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낯선 단어로의 초대 [도서/문학]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단어의 집』을 읽고
글 입력 2022.04.3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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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 보면 단어 하나로 고민하게 될 때가 많다. 심지어는 조사 하나를 쓸 때도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비교해 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이래서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라는 말이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토씨 하나에 어감이 달라지기도 하고, 문장 전체가 어색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만큼 글을 쓰는 데 있어서 단어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단어는 말을 이루는 최소 단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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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단어의 집』에 눈길이 간 것은 그래서였다. 기대하는 마음으로(사실 내가 어떤 기대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을 펼쳤을 때, 목차를 보고 다소 의아했다. 낯설어서인지 대부분 투박하고 건조하고 차가워 보이는 단어들로만 빼곡히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담은 단어들이니 문학적이고 서정적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프롤로그를 읽고 나서는 생각이 바로 바뀌었다. "목차만 보아서는 감이 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세상에 이런 단어가 있었나 싶고, 조금도 시적이지 않은 목록이라 여겨질 수도 있겠죠. 사실은 일부러 그런 단어들을 골랐어요." 그리고 순식간에 궁금해졌다. 왜 그 단어들이 선택되었는지. 그 단어들이 대체 어떤 집을 가지고 있길래.

 

"단어의 집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 단어의 집은 문턱도 없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여기 이곳 놀이터에서 저와 함께 단어를 골라보시겠어요? 제게는 이렇게 다가온 삶의 비밀이 당신에게는 또 다른 색과 무늬로 번져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작가의 말에 '네, 그럴래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처음에 느꼈던 투박함과 건조함과 차가움과는 달리 너무 따뜻하고 다정한 초대여서. 그래서 낯선 단어로의 초대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탕종법은 빵을 만드는 기법 중 하나라고 한다. 이스트(효모)의 힘을 빌리지 않고 반죽 단계에서 따뜻한 물을 넣어 밀가루가 충분히 수분을 머금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탕종 기법으로 만들어진 빵은 유달리 식감이 훌륭하고 결대로 부드럽게 찢어지며 손가락으로 꾹 눌러도 천천히 원상태로 돌아온다고 한다. 이 문장들은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찢어지더라도 결대로 부드럽게 찢어질 수 있는 유연함, 그리고 충분한 회복력을 지닌 삶.

 

그날 이후 탕종은 나의 작은 주문이 되었다.

 

탕종의 힘은 나날이 커져갔다. 놀랍거나 두렵거나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슬픈 일이 닥칠 때마다 탕종, 탕종 하고 입 밖으로 되뇌는 것이다. 토붕 앞에서도 탕종, 자몽의 무지몽매함 앞에서도 탕종, 죽음 앞에서도 탕종이라고 말하면 종소리가 은은히 번져 나를 위한 안전한 막이 생겨나는 기분이다.

 

안희연, 『단어의 집』(한겨레출판, 2021) 161~163

 

 

"찢어지더라도 결대로 부드럽게 찢어질 수 있는 유연함, 그리고 충분한 회복력을 지닌 삶." 이 문장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정말 원하는 삶의 모습이었으니까.

 

도종환 시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절대로 찢어지지 않고, 깨어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살아지는 삶이 있을까. 이 세상 모든 삶이 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거치고, 또 거쳐서 살아지는 것이 아닐까. 시의 마지막 구절이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로 끝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삶이 그런 과정의 연속이라면, 바라건대 그 사이사이에 회복 탄력성이 부속품으로 끼워져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넘어져도,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 되었든 갈기갈기 찢기고, 산산조각으로 깨지고, 와르르 무너지지만 않았으면. 부디 그랬으면.

 

탕종 같은 삶이 부러워졌다. 그리고 대체 왜 나는 탕종 같은 주문이 없는 거냐며 탄식했다. 그저 입 밖으로 내뱉기만 해도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안전한 막이 생기는 기분은 어떤 느낌일지. 탕종, 탕종 되뇌고 싶은 일이 생겨나는 요즘이라서, 자꾸만 나의 작은 주문을 찾게 된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아무 소득이 없지만 말이다.


 

 

플뢰레



 

매일 진다. 지는 기분이 든다. 피곤해서도 지고 귀찮아서도 지고 허무해서도 지고 우울해서도 진다. 그날따라 입고 나온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도 지고, 하필 우산을 두고 온 날 소나기가 내려서도 지고, 편의점에 들러 만 원이나 하는 우산을 샀는데 비가 홀랑 그쳐 씩씩거리며 또 진다.

 

그럴 때, 남몰래 펜싱 선수가 되는 상상을 한다. 펜싱의 종류나 자세한 경기 방법을 속속들이 알진 못하지만 이거 하나는 안다. 검술에 숙달되지 않은 기사들이 연습 중에 날카로운 칼 때문에 귀가 잘리고 실명을 하는 경우가 많아 고안된 검. 날 끝이 둥글고 칼날을 없앤 검, 플뢰레.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 불가해하고 불확실한 세상을 향해 울먹이며 휘두르는 칼. 물론 제대로 된 검술을 갖췄을 리 없고 대체로 헛발질, 미봉책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플뢰레 같은 멋진 검을 들고 적의 폐부를 찌르고 승리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데 무엇으로부터의 승리일까? 삶의 만행으로부터의 승리? 긴긴 고독으로부터의 승리?

 

안희연, 『단어의 집』(한겨레출판, 2021) 151~153

 

 

"매일 진다. 지는 기분이 든다." 내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다가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이 이어졌다. 이를테면 이런..

 

요즘 취업 시장에서 합격하면 1승이라던가. 그렇다면, 불합격은 곧 패배를 말하는 건가. 나는 몇 번의 패배를 해 왔지? 그런데 지는 게 꼭 그렇게 다 나쁜 건가. 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니, 애초에 불합격자가 패배자는 아니지 않나.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아주 위험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시작하여 지독한 자기합리화로 이어지고 감정적인 마무리까지. 그러니까, 그냥, 그저 그런 푸념에 지나지 않는 말인 거다.

 

푸념만 늘어놓았을 뿐이지만, 내가 펜싱 선수도 아니지만, 플뢰레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작가의 말처럼, "날카롭되, 폭력에 가담하지 않는. 이왕이면 가장 깊고 캄캄한 고독을 찌를 수 있는." 그런 나만의 무기. 물론 내가 겪고 있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도 많지마는. 그래도 그런 걸 손에 쥐고 있으면 무엇이든 승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까지는 아니더라도, 결국에는 우아하고 끈덕지게 이겨내고 싶다.

 

물론 나도 무엇으로부터의 승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지난한 취준 생활로부터의 승리인지, 이따금씩 나를 괴롭히던 자기 비하로부터의 승리인지, 나만 도태되어 있다는 자괴감에 대한 승리인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의 승리인지, 모질게 구는 세상에 외치는 승리인지.

 


 

버저 비터


 

 

경기 종료 휘슬(버저)이 울림과 동시에 골대를 향해 던져진 공을 일컫는 말, 버저 비터(buzzer beater). 본래는 농구 용어지만 최후의 일격, 신의 한 수 등으로도 바꿔볼 수 있을 말.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한 발 더 나아간다. 그쯤 되면 지고 이기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종료 휘슬이 울리는 찰나의 순간까지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일이, 끝까지 후회 없이 경기를 마치는 일이 선수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급함, 갈망, 분노, 사랑, 슬픔 그 무엇이든 동력 삼아 끝의 끝까지 던져봐야겠지. 버저 비터가 운 좋게 골대를 통과한들 득점으로 인정될지 아닐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일단은 던져보는 태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으로부터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는 집중력.

 

안희연, 『단어의 집』(한겨레출판, 2021) 56~57

 

 

어쩌면 내가 플뢰레를 들고 쟁취하고 싶은 것은 승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저 무수히 던져왔던 물음에 대한 응답일지도. 잘 견뎌 왔다고, 잘하고 있다는 격려나 응원 같은 것일지도.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보답일 수도 있겠다는, 다소 뻔뻔한 생각도 해본다.

 

무엇이 되었든, 지금의 내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해 보인다. 버저 비터.

 

희망, 애증, 고집, 오기, 무모함, 초조함 그 무엇이든 동력 삼아 끝의 끝까지 시도해보는 태도. 그게 통과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도 일단은 맞서보는 태도. 그 도전이 어떻게 얼마나 뻗어 나가는지 살펴볼 수 있는 용감함과 정성스러움.

 

버저비터가 울리고, 또 울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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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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