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제는 무엇을 알지 말아야 할지 판단해야 할 때 - 도서, '나를 지워줘'

글 입력 2022.04.2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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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워줘’는 주인공 모리가 같은 반 친구 리온의 부탁으로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자를 추적해 나가는 내용을 그린다.

 

모리는 불법촬영물을 지워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다가 피해자의 불법촬영물을 재유포한다는 누명을 쓰고 디지털 장의사를 그만두려고 한다. 그때 같은 반 친구이자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친구 리온이 인터넷에 유포된 자신의 딥페이크 영상을 지워달라고 부탁하고, 리온은 그를 돕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중 한 사건이 일어난다. 실제 리온의 모습이 담긴 불법촬영물이 유포된 것이다.

 

 

미톡 알림이 떴다. 8반 남학생 단톡방이었다. 단톡을 확인하자마자 모리는 숨이 막혔다. 진욱이 리온의 불법촬영물을 퍼뜨리고 있었다. 대부분 인터넷에서 본 딥페이크 영상이었다. 처음 보는 영상들도 있었다. 실제 리온을 찍은 것처럼 보였다.

 

단톡방은 열기로 가득했다. 톡이 끝날 줄 몰랐다. 몇몇은 그만하라면서 단톡방에서 나갔고, 몇몇은 침묵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또 몇몇은 감상을 덧붙여 가며 희희낙락했다.

 

모리는 고개를 들어 반을 둘러봤다. 아이들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단톡방에서는 낄낄거리며 즐겼다. 'ㅋㅋㅋ'과 'ㅎㅎㅎ'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것만 봐도 죄책감 따위는 없어 보였다.

 

 

디지털 성범죄는 비단 소설만의 문제가 아니다.

 

2018년의 어느날 웹서핑을 하다가 ‘지인능욕’과 관련한 기사를 봤다. ‘지인능욕’은 포르노 사진에 주변 여성을 합성하고 섹슈얼한 대사를 입혀 유포하는 것을 의미했다. 기사 속 사진은 당연하게도 모조리 모자이크 처리되어있었고 나는 그것이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만 생각하며 스크롤을 내렸다.

 

그때 한 사진을 발견했다. 머리카락의 기장이나 눈코입의 위치와 모양 그리고 옷차림이 아무리 봐도 내 여동생 같았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사진 아래에 적힌 저급한 코멘트는 나를 더욱 재촉했다. 그날 나는 사진의 원본을 찾다가 밤을 꼴딱 새워 다음날 있던 전공시험에 늦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의 원본을 찾긴 했다. 원본에는 내 친동생보다 너댓살은 어려 보이는 평범한 아이가 웃고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동생이 EBS에서 방영하는 ‘장학 퀴즈’에 출연했을 때의 이야기다. 방영 직후, 동생에게 급한 일이라며 연락이 왔다. 한 남초 커뮤니티에 동생과 동생 친구들의 얼굴을 품평하는 글이 업로드되었다는 것이었다. 메신저로 받은 링크로 들어가니, 여혐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온 한 사이트가 나왔고, 방송 화면을 캡처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남학생들의 얼굴은 전부 모자이크된 채였다. 악의적이었다.

 

사진 속 소녀는 동생이 아니었고, 커뮤니티에 올라간 사진도 머지않아 삭제되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여전히 찝찝하고 무거웠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 행위는 단순히 나의 욕구(불법적이거나 성적인 것은 아니었지만)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그것들을 소비했기 때문이었다.

 

 

김상욱 형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갔던 날, 돌아서는 모리의 뒤통수에 대고 김 형사는 말했다.


"혹여나 네가 잡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쉽지 않을뿐더러, 그 소굴에 잘못 들어가면 너도 똑같은 인간 되는 거야. 네가 아무리 정의로운 목적으로 행동했다 해도 성착취물을 소비한 건 사실이 되거든."


문득 김 형사는 모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줄 이미 예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칠 것 같았다. 한 발 다가갈 때마다 장애물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두꺼운 철문 같은.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매체의 발전이 있다. 편리한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디지털 매체 속에서 진정한 불통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유명 국제 시사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성일권은 그것의 자매지 <마니에르 드 부아르 6호 - 페이크 소사이어티>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디지털 미디어의 경우 기사 생산에서 소비까지가 빛의 속도만큼이나 찰나적이다. 디지털 미디어는 더 이상 뉴스를 전달하는(mediate) 미디어가 아니라 그 자체가 즉시(immediately) 소비되는 상품진열대다. 미디어의 상품 진열대에 올려진 기사들은 대부분 자극적이다. 일 출처가 불분명하고, 팩트가 희박해도 이들 기사가 독자들에게 경멸감,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을 선사해 클릭수를 높일수 있다면, 디지털 미디어의 톱을 장식하며, 여타 미디어들은 경쟁적으로 베끼고 확대재생산한다.
 

 

인터넷의 발전 이전, 정보는 주로 미디어에 의해 전달되었다. 미디어로 전달되는 정보는 전문가에 의해 취재되고 작성된 뒤 교정되어 한정된 지면에 보도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보와 정보 전달자 사이에 거리가 생기게 되고, '무엇이 진짜 알려져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반영된다. 진정한 기자 정신은 이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디지털 기기를 가지게 된 이후, 그 과정이 계속 축소되다가 결국 사라진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미디어이고, 각종 어플이 미디어이며, 페이스북, 트위터, 클럽하우스 같은 SNS가 미디어’인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정보가 아무런 고민없이 생산되고, 동시다발적으로 소비된다. 이 사이클에는 어떠한 윤리적, 사회적 고민도 개입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미디어 또한 시장 논리로 편입되게 되고, 공정성보다는 판매 부수나 조회수가 더 중요한 가치가 된 것도 영향이 있다.


엘리트주의적인 매체가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다. 대중 친화적인 매체도 분명히 필요하다. 정보의 제공자가 스스로 넘치는 정보를 막을 수 없다면, 수용자가 원천 차단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무엇이 알아야 할 것이고, 알지 말아야 할 것인지 판단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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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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