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체된 정체성에 종말을 고하다 [영화]

영화 파워 오브 도그가 여성성과 남성성에 던지는 이야기
글 입력 2022.04.07 14:34
댓글 8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지극히 미국적이라고 이야기되는 서부극에는 강인한 남성을 이야기하는 마초이즘을 빼놓을 수 없다. 말을 탄 채로 총을 들고 사막을 누비며, 남성들만이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던 거친 강인함 말이다. 파워 오브 도그의 포스터도 휘날리는 말갈기와 뒤로 펼쳐진 사막을 이용해 그러한 가면을 썼다. 마치 자기 자신을 숨기기 위해 거침으로 감싸던 필처럼(베네딕트 컴버배치).


고정적인 서부극을 이야기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영화는 시작하면서부터 오묘함을 자아낸다. 특히나 필은 많은 남자와 커다란 목장을 기칠게 휘두르는 마초적 남자로 보이지만, 그가 가진 가면을 한 꺼풀 벗겨본다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필은 서부극이 가지고 있는 마초의 상징이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그 시대 전체를 의미한다.


또한, 그 시대의 혐오가 빚어낸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러한 이중성을 필이라는 인물이 가진 오묘함 속에 녹여냈다.

 

 

[포맷변환][크기변환]2021112101002731900245674.jpg



*

영화 [파워 오브 도그]에 대한 스포일러와

주관적인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이분법의 근간을 흔들다



[포맷변환][크기변환]img.jpg

 

 

영화는 시작부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분법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바로 '여성성'과 '남성성'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은 그저 그들의 다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이전부터 만들어진 고정관념적 특성이다.


서부극은 우리가 고정관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남성성에 극치를 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목장을 소유하고 있는 필의 마초적 카리스마가 있다. 필은 그의 형제 조지(제시 플레먼스)와 함께 몬타나에서 커다란 목장을 운영하고 있다. 함께 일하는 남자들은 카리스마를 가진 필과 달리 깔끔하고, 소극적인 조지를 따르지 않는다. 사이가 좋은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정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친 성격의 필 뿐인 것이다.


이를 방증하듯 로즈(커스틴 던스트)의 레스토랑에서 숫기가 없고, 그들이 생각하는 남자와는 확연히 다른 그녀의 아들을 조롱한다. 로즈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는 서부의 마초이즘적 사회에는 맞지 않는 인물이다. 단정한 머리칼과 깨끗한 옷, 빗을 갖고 다니며 수시로 빗질을 해대는 그의 모습은 남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진 그들에겐 여성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필과 피터가 이분법적 여성성과 남성성에 있어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필도 그러한 남성성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영화가 주는 오묘함이 바로 이것이다. 마초적 남성성의 상징인 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에 맞지 않는 행동들이 자리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터 등장하는 동생과 같이 자는 침실, 처음 목장을 일군 날을 축하하기 위한 기념일, 필이 만든 종이꽃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마초적 우두머리, 필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이분법을 끊임없이 흔든다. 남성성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필이 가지고 있는 다른 모습은 그 시대의 관점으로 남성적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브롱코 헨리에 대한 필의 감정은 뚜렷하게 사랑으로, 동성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성성이 없다고 조롱을 받던 피터는 뚜렷하게 동성애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는다. 후반부에 필과의 사이에 피어나던 것이 사랑이냐고 물으면, 필은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피터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이를 제외하고도 영화 속에는 고정관념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을 흔드는 것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를테면 로즈의 레스토랑에서 "여자가 운전하는 건 본 적 없다는 거야!" 하고 비웃던 일행들처럼 말이다.

 

 


혐오 속 피해자와 가해자


 

[포맷변환][크기변환]AAAABXOVPy6kbzfvMsSKNqUwXg8FjiiBwpA-FiifBpbjSdfTmLwzDRk6BBGgaTwUQHTEpkaytMiSPKCnHphUK40zfNFJX2iF.jpg

 

 

영화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언뜻 피터와 필로 명확히 구분되는 듯하다. 고정관념적인 남성성의 결여로 비웃음과 괴롭힘을 당하는 피터. 영화 초반 바로 그 비웃음과 괴롭힘을 주도한 것이 필이다. 남성이 가진 여성성에 대한 혐오는 피터의 어머니 로즈의 아픔으로 이어지고, 로즈의 아픔은 필을 향한 혐오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혐오의 끝에는 피터와 필이 있다.


로즈와 조지의 결혼으로 한순간에 가족이 됐지만, 필은 조지와 피터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필은 로즈가 조지의 돈을 보고 결혼한 것이라고 혐오하며, 가장 치졸하고 치명적인 방법으로 괴롭힌다. 그 때문에 점점 술에 빠져가는 로즈와 다르게, 피터와 필의 사는 점점 좁혀진다. 처음에는 그마저 로즈를 괴롭히기 위한 필의 계획이었지만, 자신의 사랑이자 우상인 브롱코 헨리가 보던 것을 한 번에 캐치한 피터에게 단숨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결국 피터에 대한 혐오의 감정은 죽기 전까지 피터만 생각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변하게 된다.


처음, 남성성의 결여와 여성성의 부각으로 피터를 혐오하던 필이 그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혐오의 방향성은 달라지게 된다. 바로, 자신의 어머니를 알코올중독에 빠지게 한 필에 대한 혐오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혐오는 결국 죽음 앞에 피해자를 필로, 가해자를 피터로 만들어놓는다.


그런데 한 가지, 필과 피터의 관계를 제외하고, 필은 시대가 만든 피해자이기도 하다. 시대가 요구하는 남성성에 반대되는, 어찌 보면 여성성과 가까운 성향을 보이고 있던 필이 선택한 것은 마초적 가면을 쓰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짐작하건대, 필과 그의 어머니 사이에 이에 관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과 조지가 어릴 적 어머니가 여자아이들을 일부러 데리고 왔다는 대사를 미루어 보아, 어쩌면 어머니가 필의 성향을 일찍이 눈치채고 덮으려던 것은 아닐까. 기존 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이분법적 잣대로 인해 마초적 가면 뒤로 숨기게 된 것은 필 자신 그 자체였다.


또한, 브롱코 헨리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필의 비밀 장소뿐이다. 일상에서는 그의 물건을 숨겨놓고, 그의 손길이 남은 손수건을 마음껏 품을 수 없는 것이다. 거칠고 나쁜 성격의 필을 만든 것은 어찌 보며 시대 그 자체이며, 필은 시대가 만들어낸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종말을 고하다


 

필은 피터로 인해 죽임을 당한다. 이것은 끝없이 이어져 온 혐오의 결과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마초적 남성성의 근간과 이분법적인 정체성의 종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필은 모든 남성이 따르던 마초적 남성성 그 자체였다. 영화는 그런 마초적 남성성의 근간을 끊임없이 흔들며, 종국에는 이분법적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피터만을 남겨놓는다. 이는 필의 죽음과 함께 마초적 남성성의 종말을 이야기한다.


또한, 끝까지 남은 피터는 이분법적 정체성을 거부한 인물이다. 필이 죽은 후 피터는 방에 혼자 남아, 필의 흔적을 침대 아래로 집어넣는다. 과거 마초적 남성성과 이분법적 정체성을 고수하며, 그렇지 않은 자신을 혐오하던 필을 뒤안길로 밀어 넣는다. 이는 마초적 남성성을 뜻하는 필처럼, 자신만의 정체성과 이분법적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피터로, 마초적 남성성의 근간과 이분법적인 정체성의 종말을 고한다.


처음 이 영화의 소개만 보았을 때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과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더욱 심오한 이야기가 들어있음을 단번에 알게 됐다. 그리고 어찌 보면 딱 지금 시기적절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는 과거 서부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분명 피터의 승리로 끝났는데도 말이다.


이전처럼 이분법적 정체성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여성적임과 남성적임에 관한 이분법적 구분이 남아있다. 남성들은 힘 쓰는 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 시원시원한 성격이어야 한다, 남자가 뭘 그런걸 가지고 속 좁게 그러냐는 말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여성들은 집안일을 해야 한다, 정숙해야 한다, 몸을 사리고 다녀야 한다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런 사회가 만들어낸 이분법적 정체성 속에서 혐오가 피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과거부터 이어져 온 이분법적 정체성을 이어갈 필요가 있는지, 이것을 이어가면서까지 혐오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지 말이다.

 

 

 

김예솔.jpg

 

 

[김예솔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8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10.0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