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물드는 것이 두렵지 않은 투명함 :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글 입력 2022.11.06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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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이 없는 삶이라도_표1.jpg

 

 

책의 표지가 마음에 든다. 내가 이 책과의 만남을 선뜻 취하게 된 강력한 계기이기도 했다.

 

푸른 배경에 계단식으로 각진 테두리 안을 채운 사진은 어딘가 묘하다. 늘어진 천들과 거기 비친 그림자, 그 앞으로 그림자의 주인일 누군가의 손이 꽃송이를 아래로 떨군 채 불쑥 나온다. 그리고 얇은 선 하나가 대뜸 책을 가로지르고 있다.

 

표지를 보자마자 "툭, 떨어지다, 늘어지다”라는 단어들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아련하고, 불안해 보였다. 그래서 좋았던가, 그랬던 것 같다. 책을 덮고 나서 정말 좋은 표지라는 생각을 했다. 책에는 작가의 지난날들과 생각들이 글자로 툭, 던져져 있다.


책은 주로 슬픔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슬픔을 슬프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자신과 자신의 주변이 겪은 슬픔을 표지처럼 툭, 내뱉고 만다. 정제되고 무심한 그의 이야기에는 묵직한 따스함이 담겨 있다. 몰입할수록 느껴지는 작가의 진중함이 좋았다. 담백하게 이야기한다 하여 그의 슬픔이 가벼운 것은 아님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서다.

 

덕분에 많이 울었고, 외로움이 걷혔다.


 

살아 있는 동안은 내가 다시 온전해질 일이 없다는 뜻이죠. 

참 위로가 됩니다. 마음 쏟을 건, 검은 흙을 비집고 돋아난 지독한 싹들이 

무엇으로 자랄 수 있는지 상상하는 것뿐입니다.

 

김해서,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33쪽


 

책 속에 소개되는 ‘김해서’라는 사람은 흐르는 투명함을 가졌다. 그를 부끄럽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하는 슬픈 빛깔이 찾아오면 그는 겁내지 않고 온전히 그 색을 품는다. 충분히 슬픔에 적셔지다가도 어느 순간 잘 갈무리해 털어낼 줄 아는 사람 같다.


작가는 오염된 색깔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부끄러운 과거나 열패감, 죄책감처럼 어쩌면 가장 음침한 감정까지도 그는 가감 없이 이야기한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너무너무 부러웠다.

 

그의 글에서 나를 많이 보았다. 그의 삶의 부분들이 마치 거울처럼 빛나서, 그 순간마다 어린 나, 또 지금의 내가 비쳤다.

 

특히 작가가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랬다. 당장의 아파트보다 공주 인형의 집이 더 갖고 싶어야 마땅한 나이에 다른 동네 아파트 놀이터 그네를 타며 엄마에게 아파트를 선물하고 싶어하던 대목에서는 거의 오열하다시피 했다.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머리에만 일찍이 조숙증이 왔던 무력한 시절을, 나는 마냥 해맑고 좋았던 어린 시절로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는 되려 내 몫은 감당하며 손 벌리지 않는 지금의 내가 더 해맑다고 느낀다.

 

책의 여러 방면에서 나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작가에게 “나와 닮았네요. 저와 똑같아요!”라고 감히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나의 비밀은 비밀을 키우지 않고 비밀로서 죽었다. 

그 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안하다.

스티커 도둑의 슬픔을 밀봉한다. 

더는 미워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을 시절이 되었다. 좋은 일이다.

 

김해서,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143쪽

 

 

그와 달리 나는 여전히 거뭇한 감정들을 걸러내지 못하는 탓이다. 과거는 자꾸만 거듭되어 나를 찾아오고, 사소한 실수조차도 여전히 슬픔으로 자리한다. 그래서 나는 나아가는 데 더디고, 뜨문뜨문 얼룩져 있다.


그런 나는 이 책이 질투 나고 부러웠다. 나를 이야기하는 데 거침이 없는 작가의 용감함을 뺏고 싶다는 치졸한 마음은 “이 책이 내 거였으면!” 하는 욕망을 부르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용기도 얻는다. 그도 이런 어두움을 극복하여 지금의 단단함을 얻지 않았을까 싶어서,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과거를 흘려보내고 투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직은 누군가의 답장을 갈망하고, 스스로 답을 내려야만 안심하는 지금에서 벗어나 돌아올 무언가가 없어도 삶을 사랑할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며, 사랑에 빠져버린 당신께 짧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작가님, 저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낯부끄럽고 어찌 보면 처절한 순간들을 내뱉음에

거리낌이 없는 당신의 글을 보며, 저는 제가 떨쳐내고 싶은 무수한 검은 과거들을

떠올리고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언제쯤 검붉은 슬픔을 밀봉할 수 있게 될까요? 슬프게도, 저는 앞으로도 한참 동안

더딘 발걸음으로 나아갈 듯합니다. 어쩌면 제가 슬픔을 속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허나 작가님을 통해 용기를 얻습니다. 찌질한 비밀들이 “비밀로서 죽을” 그날을요.

그리고 책을 내고 싶습니다. 고여 있던 슬픔을 자유로이 해방시켜주었다고 말입니다.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답변이 오지 않을 글이라도,

작가님께 배운 대로 저 역시 꿋꿋이 적어 가며 살겠습니다.

 

 

[오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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