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는 잘 살고 싶을 때 -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김해서 (2022)
글 입력 2022.11.0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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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복잡해질 때마다 동네 도서관에 간다. 내가 엄청난 독서광이라, 하루에 한 글자라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도서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침묵 속 고요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이 좋다. 느지막이 일어나 오후 3~4시쯤 집에서 나와 약 20분 거리에 위치한 동네 도서관에 가는 길이면 근처 중, 고등학교의 하교시간과 맞물려 횡단보도와 버스정류장에는 교복을 입은 친구들로 바글바글하다.

 

음량은 최대로, 귀에는 헤드셋을 낀 상태이지만 이들 옆을 지나칠 때면 그들이 내뿜는 열기가 헤드셋을 뚫고 내게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만 같다.

 

한 번의 사거리, 두 번의 횡단보도를 건너 도착한 도서관에서는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이 있는지 살펴보는 척 주변을 힐끔거린다. 창가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계시는 지긋한 어르신부터, 여러 서적을 잔뜩 쌓아두고 필기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까지.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이곳에 오면, 나도 이들의 일원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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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살고 싶을 때


 

근 두 달간 아무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현 상태에 대한 무기력함과 최근 잦은 빈도로 얼굴을 들이대곤 하는 노잼 시기가 겹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힘이 쭉쭉 빠졌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가'라는 문장에 여러 개의 물음표가 붙은 뒤로는 그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

 

오전을 통으로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기만 하다 흘려보낸 것 같을 때, 내 모든 감정이 밑바닥으로 처박혀 도무지 뽑히지 않을 때,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몸짓을 불려 나를 삼켜올 때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한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끌고 와도 괜찮다. 첫 문장이 관건이다. 다음은 의외로 쉽게,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풀릴 수도 있다. 일단 손들고 일어나면 말을 좀 더듬더라도 무슨 얘기든 하게 되는 것처럼. 시만큼이나 산문 생각을 자주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잘 살고 싶을 때 산문을 쓴다. 나를 한번 믿어보고 싶을 때. 

 

(나는 잘 살고 싶을 때 산문을 쓴다, p.44)

 

 

이 구절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뗄 수가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쩌면 내게 있어 '첫 문장'은 도서관에 가기 위해 신발을 구겨 신고 내딛는 첫 발걸음이 아닐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도서관에 가는 길, 머릿속에서 베베 꼬이다 못해 잔뜩 엉켜버린 생각 뭉텅이들을 하나씩 꺼내어본다.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면 더 난잡하게 뒤섞여버렸을 감정들. 나는 그런 감정들에 쉽게 속아버리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환기시켜야 한다.


 

그냥 줄을 길게 늘여보는 거다. 마음 어딘가에 꼬여 있는 실타래의 긑을 잡아 당기다 보면 훌훌 풀어진다. 시든 산문이든, 난데없이 첫 문장 띄워 올리는 걸 잘하는 사람. ‘쓰는 감각’에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매일 그 시작을 응원한다는 명목으로 나에게 말을 건다. 훌훌 문장 안에서 내려앉고 날기를 반복하는 나비가 된다. 

 

(나는 잘 살고 싶을 때 산문을 쓴다, p.45)

 

 

저자 김해서가 잘 살고 싶을 때마다 산문을 쓰듯이, 나는 잘 살고 싶어질 때마다 도서관에 갈 채비를 한다.

 

때로는 반납할 책을 바리바리 싸 든 채로, 어느 날은 감지 않은 머리를 행여 들킬세라 모자를 깊숙이 푹 눌러쓰고는 오른발을, 그다음에는 왼발을, 다시 오른발 순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나라는 존재의 쓸모가 자꾸 흐릿해질 때면 나는 도서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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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를 울렸던 고민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로 울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내면의 불안과 투쟁해야만 한 사람의 고유한 서사가 만들어진다는 걸 이젠 알고, “심심한 마음으로 환영한다. 다 받아들임.”하고 말할 수 있다.

 

(자기만의 바닥, p.38)


 

나는 언제쯤이면 저자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마음들 앞에서도 "심심한 마음으로 환영한다. 다 받아들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미래의 나에게 몇 가지 물음이 담긴 편지를 띄워본다.

 

어쩌면 지금은 이 물음에 답을 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장의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여느 때처럼 씩씩하게 일어나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하다 보면,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내가 나에게 보낸 편지 속 물음의 답장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오늘도 신발을 잔뜩 구겨 신은 채로 문 앞을 나선다. 이 책과 함께라면 언제고 다시 일어나 그곳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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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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