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호크니의 눈을 들여다보는 '예술가의 초상' [미술/전시]

관람자로서의 우리는 그 세계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글 입력 2022.04.0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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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의 <예술가의 초상 (Portrait of an Artist / Pool with Two Figures)> (1972). 2018년 11월 16일, 이 작품은 9,030만 달러에 낙찰되면서 현존하는 작가의 작품 중 최고 낙찰가를 기록한다.

 

이 기록으로 호크니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여담으로 다음 해 제프 쿤스의 <토끼 (Rabbit)> (1986)가 또 한 번 그보다 비싼 값에 팔리지만, 쿤스의 작품은 조각이라는 점에서 호크니의 그림이 여전히 회화 중 최고 낙찰가로 남아 있다.

 

어쨌거나, 돈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현대예술을 두고 자본주의와 맞물린 논쟁이 여전히 끊이질 않는 오늘날. 이 작품이 이토록 높은 값어치를 지니게 된 이유, 이에 더해 호크니가 엄청난 명성을 지닌 작가로 우뚝 선 까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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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니는 동성애 성향을 멸시하던 영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그에게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던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한다. 이때 물이 가진 다양한 속성을 보여주며 따뜻하고 맑은 로스앤젤레스의 날씨를 따라 너무도 황홀한 작품을 여러 점 남겼는데, 이는 '수영장 연작'이라 불린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예술가의 초상>이다.


그림을 다시 한번 보자. 반짝이는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이- 아마도 연인이자 뮤즈를 바라보는 예술가- 아마도 호크니의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실제로 호크니는 해당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넉 달을 갈아엎고, 수백 장의 사진을 찍으며, 하루 14시간씩 그림에 매달리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바로 여기에, 그 많은 소재 중에서도 굳이 꼭 집어 물을 선택한 배경에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첫 번째 단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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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니는 "물을 표현하는 방법은 사실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다. 어떤 색도 될 수 있다. (물은) 시각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호크니는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다시 말해 '보는 방식'에 대해 늘 고민했다. 더 나아가 두 눈을 가진 인간이 자기 앞에 놓인 세계를 어떤 시선을 통해 하나의 장면으로 받아들이는지를 탐구했다.

 

그런 호크니에게 '물'은 어떤 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채, 자신만의 관점에서 목도할 수 있고, 개별적인 감상에서 어떠한 장면으로 각색되는 과정을 가늠하게 한 대상이었다. 즉, '물', 더욱이 '수영장 연작'과 그중에서도 <예술가의 초상>은 호크니의 '추상'을 '구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한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눈이 보는 범위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이동한다. 여기서 인간의 눈- 살아 움직이는 주체의 몸에 속한 신체적 두 눈은 진실한 시각을 뜻한다. 따라서 그것의 한계는 궁극적으로 한정 지을 수 없다.


호크니는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물'이라는 대상을 표현한 위 작품과 같이 자기 작품 속에 적용해왔으나, 더욱 인간의 눈에 충실하고 보는 시각을 밀착되게 구현한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여기서 이러한 '호크니'의 눈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호크니가 했던 말을 가져온다.

 

“관람자로서의 우리는

그 세계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에서 보다시피, 호크니가 특히 주목한 것은 그림 속 세상과 단절되지 않는 주체- 바로 작가 그리고 관람자인 것이다. 즉, 호크니에게 이 주체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의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의 몸을 이동하며 그림을 그리는 또는 감상하는 개별적 관찰자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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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는 서양미술사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자연주의적 재현의 문제, 다시 말해 ‘창밖의 회화’와 맞닿아있다. 위 <아테네 학당 (Scuola di Atene)> (1510-1511)과 같이, 중세 르네상스의 회화는 3차원의 세계를 그대로 2차원의 캔버스에 구현하기 위한 원근법을 개발 및 적용하고 눈에 정말 보이는 것처럼 옮겨 '창밖의 회화'라 불린다. 그러다 보니 그 목적에 맞춰 예술을 꾸준히 공부하고 연마할 수 있도록 후원받아 길러진 예술가와 관람자의 위치는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 더욱이 대부분 종교 및 정치적 이유로 예술이 행해졌던 시기였기 때문에 작가의 사상이나 심상은 담기지 않았다. 이는 르네상스의 '창밖의 회화'가 정점에 달하곤 냅다 마구 늘어지며 구겨진 '매너리즘'으로 넘어가는 데에 한몫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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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호크니의 눈'은 거리감과 명암이 믿을 수 없이 완벽하고, 사진을 찍은 것처럼 명확한 장면의 포착이 아니다. 그보다는 작품에 개입한 모든 주체- 예술가와 관람자의 시각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의 초상>은 물론, 이즈음 그려진 호크니의 작품들은 화가가 관람자의 입장과 같이, 눈을 사용해 바라본 그대로, 그 크기가 왜곡 없이 그려졌을 정도로 캔버스의 스케일이 무지막지하게 커졌다. 이른바 '2인 초상'을 줄곧 생산하던 시기에 그려진  <클라크 부부와 퍼시 (Mr and Mrs Clark and Percy)> (1970-1971) 등의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익히 알다시피, 2차원의 회화가 3차원의 구현이라는 꿈에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외려 그 꿈은 무너지고 만다. 불완전만이 완전의 성립 요건이라는 어느 영국 밴드의 노랫말처럼, 그러한 진리를 호크니도 깨달을 수밖에 없던 것 같다. 그렇게 '호크니의 눈'은 작품의 주체성을 정의한 뒤, '시간성' 내지는 '시간의 연속성' 개념을 끌어들인다.


2000년대 이후, 호크니는 대규모 멀티 캔버스 회화를, 그것도 연속적 시간의 연결 및 구성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 시기의 작품은 이전과 달리, 개별 캔버스들을 다닥다닥 붙여 하나의 대형 캔버스를 이루는 멀티 캔버스 형태를 시도한다.

 

호크니는 광활한 자연을 어떻게 담을지 고민하다가, 캔버스 여러 개를 가져가 원하는 장소에서 그린 뒤, 다음에 하나로 붙이면서 문제를 해결한다. 이러한 멀티 캔버스 방식은 2000년대 영국 동요크셔 풍경에서 본격적으로 탐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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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까운 겨울 터널, 2월 (A Closer Winter Tunnel, February)> (2006)은 바로 그 영국에서의 첫 멀티캔버스 작품이다. 이 회화는 하나의 캔버스에서 또 다른 캔버스로 움직이면서 여섯 부분으로 구성된 시점을 전체적으로 조합해 하나의 풍경화로 완성된다. 즉, 6개의 정면 시점을 조합해 여러 시점을 구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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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윙으로 가는 길, 늦은 봄 (The Road to Thwing, Late Spring)> (2006)에서 호크니는 각 각의 캔버스를 같은 지점에서 그렸는데, 세 갈래로 뻗어가는 길 한 가운데 서서 제작했다. 이렇듯 호크니는 고향의 야외 풍경을 제작하며, 각 장면이 정면으로 연결돼 주체의 이동을 더 확실히 인식하고, 캔버스 하나하나 사이를 시간의 연속성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동요크셔에서 체험적으로 작업한 풍경화는 작가 시점의 시각 이동과 연관된 시간의 과정, '호크니의 눈'이 제대로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눈이 이동하는 시점을 캔버스에 밀착되게 드러내고자 채택한 대규모 멀티 캔버스 회화 방식을 통해 그의 그림은 점점 더 대규모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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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가장 큰 작품이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Bigger Trees Near Warter)> (2007)이다. 그림은 오른편 구석의 집과 왼편으로 멀리 뻗어 있는 길을 보여주면서 전통적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전경을 가득 메우는 나무의 구조가 주도적으로 공간을 구성하며 그 밖으로 복잡하게 뻗어나간 가지들이 화면을 평면적으로 뒤덮고 있다. 6주 동안 제작된 이 그림은 50개의 캔버스로 조합돼 정면 시점으로 작가가 바라본 50개의 시각을 모은 것이자, 50개의 시간성을 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각각의 캔버스는 다른 시간을 뜻하기에 50회의 시간성이 캔버스라는 오브제로 표현된 셈이다.


다시 말해, 전술했듯, 인간의 눈이 보는 공간의 범위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이동하기에, 궁극적으로 한정 지을 수 없다. '호크니의 눈'은 시각의 열린 구조를 강조하고, 시간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캔버스라는 평면적이고 물질적인 단위로 가져온다.


'호크니의 눈'은 결국 ‘진실한 회화’인 것이다. 2차원 회화의 본질을 놓지 않으면서 이를 ‘주체’의 ‘시간’에 따라 ‘이동하는 눈’에 있어 진실하게 실현하려는 호크니의 일관된 작품세계는 이토록 오롯이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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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단지 부자들의 투기 목적에 불과할 뿐, 현대예술이 지닌 의미는 별거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또한 어쩌면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역시 그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데이비드 호크니가 평생에 걸쳐 탐구해온 '호크니의 눈'을 훑어본다면, 조금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오늘날의 예술은 호크니가 정립한 것처럼, <예술가의 초상>과 같이, 우리 모두가 그 주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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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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