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비상(飛上) -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공연]

지리적 북극, 그리고 천구의 북극
글 입력 2022.03.2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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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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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1인극으로 이뤄지는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사고로 아빠를 잃은 10대 소녀 ‘로리’가 아빠의 유골함을 들고 북극으로 떠나는 여정을 보여준다. 현재의 ‘로리’가 과거의 사건부터 시작해 이야기를 재연한다. 관객은 배우들 간의 대화로 내용을 추론할 수 있지만 이 연극과 같은 경우는 1인극이기 때문에 주인공 ‘로리’가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재밌는 점은 항상 공간의 설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무대 왼쪽에는 의자와 책상, 오른쪽에는 경사가 있는 무대와 모빌처럼 달려있는 조각들이 있다. 단출한 공간이지만 그 공간은 계속해서 변한다. 아빠의 서재가 되기도 하고 부엌이 되기도 하며 비행기 안의 공간, 북극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로리’가 먼저 공간에 대한 정보를 주고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관객은 납득하며 이해할 수 있다.

 

1인극이지만 무대가 전혀 비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꽉 차 보였다. 감정을 주고받을 상대가 없지만 스스로 몰입하여 관객에게 벅찬 감정을 전달한다. 또 북극으로 떠나는 여정 중 만난 사람들의 역할까지 담당해 1인 다역을 보여주는데 이는 얼굴의 방향과 목소리로 구분한다. 이는 ‘로리’ 한 사람이 회상하는 장면으로 느껴져 더 큰 감동을 준다. 관객에게 전해주는 ‘로리’의 기억 속 다른 사람들은 결국 ‘로리’가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남겨진 형상이기 때문이다. 10대 ‘로리’가 혼자서 북극으로 가는 설정은 그녀의 도전과 성장을 보여주는 발걸음이다. 처음 가보는 길과 땅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자연은 탐험가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듯이 그녀가 발견한 소중한 보물들이다.

 

 

 

탐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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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의 시작은 ‘로리’의 아빠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아빠는 지리학자이자 지리 선생님이다. ‘탐험’은 그녀와 필연적으로 느껴진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함께 했던 탐험 놀이와 아빠가 들려줬던 북극의 이야기는 그녀가 북극으로 가는 타당성을 준다. 동기는 아빠의 서재에 있는 일기장이다. 북극에 꼭 가보고 싶다고 적힌 아빠의 일기장을 보고 엄마 몰래 유골함을 챙겨 북극으로 떠난다. 왜 엄마 몰래 갔을까? ‘로리’는 엄마를 이해 못 했다. 아빠의 장례식에서 보이는 엄마의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탐험가가 이해할 수 없는 사료로 여정을 떠나듯이 ‘로리’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집에서 북극으로 여정을 떠난다.

 

 

 

상승의 반복


 

연극에는 상승하는 연출이 반복해 등장한다. 그녀가 여정을 떠나면서 ‘비행기’를 타고 북극에서 ‘헬리콥터’를 탔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아빠는 하늘 위로 올라간다. 비상한다. 공간이 땅과 하늘을 반복하면서 ‘로리’는 성장한다. 사랑하는 아빠의 죽음은 땅의 공간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순간이다. 그리고 북극에 가기 전 노르웨이에서 ‘안드레아스’와 첫 경험을 한 것도 땅에서 일어났다. ‘로리’의 첫 경험은 그녀가 여자로서 정체성을 느끼는 시작이다. 성관계를 맺을 때 바라보는 천장은 ‘상승’의 의미를 가진다. 천장을 바라보며 인류가 지금까지 종속될 수 있었던 ‘성’에 대한 관점으로 여성의 역할을 생각한다. 관계가 끝나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쓸쓸함의 원천을 생각하며 밤을 보낸다.

 

그리고 비행기는 그녀의 공간을 확장한다. 집에서 공항, 공항에서 노르웨이, 노르웨이에서 북극으로 그녀의 여정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로리’와 ‘프리다’의 만남을 이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프리다’는 북극의 연구원으로 ‘로리’의 비행기 옆자리다. ‘로리’가 혼자 온 것을 알고 자신의 연구소로 데려가 도움을 주는 인물이다. 궁극적으로 ‘로리’와 ‘엄마’가 만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슬픈 감정 때문에 무언가를 결정해선 안돼

 

  

‘로리’에게 ‘프리다’가 해준 말이다. ‘프리다’는 ‘로리’의 잠재적인 엄마의 역할을 한다. 좋든 싫든 ‘로리’가 엄마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위 대사에서 ‘로리’가 북극으로 온 동기가 문득 흐려졌다. 아빠의 소원을 위해서 왔겠지만 결국 아빠의 마지막을 같이 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죄책감이 북극이라는 결정이 되고 그 여정은 그녀의 죄책감을 해소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빠의 소원과 죄책감 해소라는 목적이 상충한다. 하지만 나는 어느 하나의 목적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리’는 아직 어린 10대이기 때문에 죄책감은 더 클 수 있다. ‘프리다’는 슬픔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사실 혼자 북극이라니, 조금 무리한 선택일 수 있다. 감정이 앞선 ‘로리’에게 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이상과 현실-북극곰


 

‘프리다’에게 도망쳐 나온 ‘로리’는 북극곰을 본다. 그리고 이전에 비행기에서 북극곰이 나오는 꿈을 꾼다. 북극곰은 그녀의 이상을 깨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북극곰은 현실이다. 그녀가 생각했던 아름다운 북극의 위험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북극곰을 보고 얼어붙는다. 붉은 눈과 커다란 모습을 설명하며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꿈에는 죽은 북극곰이 나온다. 북극곰의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본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북극으로 온 길은 순탄치 않다. 돈이 없어 배고프고 북극의 추위를 견디기엔 옷도 두껍지 않다. 새로운 장소는 신나기도 하지만 낯설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다. 그리고 북극의 중심으로 가는 방법도 매우 힘들다. ‘프리다’의 텐트 근처에서 본 북극곰은 ‘로리’가 북극에서 겪었던 고난들을 상기시킨다. 그러한 위험으로 ‘프리다’는 그녀를 경찰로 보내고 엄마를 만나게 한다.

 

반대로 북극곰이 꿈에 그리던 북극에 더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청신호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얼어붙은 이유가 상상했던 북극곰을 보고, 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북극곰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지 않을까? 더군다나 ‘로리’는 북극으로 가는 여정을 경찰에 가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북극곰을 봤기 때문에 북극 한가운데 더 가까워지고 있는, 꿈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 순간이다. 그리고 북극에 가장 가까운 북극성은 작은 곰자리의 일부다. 아빠가 누누이 말했던 북극성과 이를 담고 있는 작은 곰자리를 비추어 볼 때 북극성은 그녀에게 또 다른 희망을 줄 수 있다.

 

 

 

비상(飛上) - 천구의 북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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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가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곳은 지리적 북극이다. 지리적 북극으로 가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다. 마지막 엄마와 헬리콥터를 타고 아빠를 지리적 북극으로 날려 보내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아빠는 바람을 타고 위로 올라간다. 천구의 북극. 연장된 지구의 자전축이 천구와 만나는 곳이다. ‘로리’는 웃는다. 아빠는 천구의 북극으로 가고 있다. 연극 중에서 가장 벅찬 순간이었다. 배우의 표정, 몸짓, 대사가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일상에도 목표하는 바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적, 성적, 취업, 시험 등 수많은 북극들. 북극에 가는 것만큼 도달하기 힘들다. 연극은 말해준다. 북극으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예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북극에 간 아빠처럼 우리의 인생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결국 북극에 안착할 것이다. 그러면서 성장할 것이다. ‘프리다’처럼 위로해 주는 사람도 곁에 있지 않은가?

 

이누이트족에는 눈을 뜻하는 단어가 수백 가지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라고 한다. 연극을 보고 눈을 뜻하는 단어가 아닌 눈이 의미하는 게 많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눈으로 뒤덮인 북극에서 ‘로리’가 울고 웃었듯이 눈에는 사랑, 슬픔, 위로, 따뜻함, 새로움 등 수많은 것이 담겨있다.

 

 

사랑이란 삶의 눈과 같다.

아픈 상처 위로 깊고 부드럽게 내려오는 사랑은

눈보다 하얗고 순수하다.

 

 

북극해 탐험에 문을 연 탐험가 ‘난센’의 말이다. 수도 없이 눈을 봐온 그에게 사랑이란 삶의 눈과 같다. ‘로리’는 북극에 다녀와서야 비로소 엄마의 마음을 이해한다. 엄마도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음을 깨닫는다. 눈은 ‘로리’에게 사랑을 알려줬다. 인생이 쉽지 않다는 중요한 점도 알려줬지만 결국 엄마의 사랑을 느끼게 해줬다. 아빠의 상실에서 엄마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그 중심엔 북극, 즉 눈이 있다.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눈에서 나는 뭘 찾을까. 눈보라 위로 비상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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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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