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이 선택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 추락의 해부 [영화]
-
<추락의 해부>는 누군가의 추락을 해부하는 영화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추락이 불러온 해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의 추락, 그 ‘사건’이자 ‘진실’이 불러온 삶의 해부는 잔인하리만치 집요하다.
<추락의 해부>는 법정물, 범죄물과 같은 장르의 틀을 선택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장르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결말에 대해서는 답을 내려주지 않은 채로 끝내버린다. 다시 말해, 영화는 ‘유죄냐 무죄냐’ 따위의 단일하고도 압도적인 도착점을 상정해두고 이야기를 진행하면서도, 정작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진행했던 서사의 파편들이 다른 곳으로 이탈해버리는 것을 제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추락의 해부>는 사실과 정황, 부부와 가족, 기억과 사실, 그리고 언어와 서사와 같은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
삶의 주체를 떠난 삶의 해부
<추락의 해부> 감독 쥐스틴 트리에는 ‘법정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역사가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곳’이라며 법정이라는 공간을 규정한 바 있다. 죄를 심판하는 궁극적인 정의의 공간인 법정이 나의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더 이상 나와는 전혀 속하지 않은 채로 떨어져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공간임에 공감했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위해 모인 법정이라는 공간은 결국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곳이 된다. 누가 누구를 어떤 이유로 해하였는가, 그러한 결과화 된 인과가 가장 중요한 곳이며 그것이 곧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나의 삶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법정은 삶과 삶의 주체인 ‘나’를 분리한 상태로 그 과정을 진행한다.
나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나에게 더 이상 삶이 붙어있지 않은 채로 평가받아야 하는 공간인 법정에서 산드라 또한 그녀의 삶이 해부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법정에서 오가는 그녀를 정의하는 말들은 아주 잔인하게 편견적이다. 언어로 규정된 산드라는 이렇다. 남편을 살해하였고, 외도를 저질렀으며, 동시에 양성애자인 여성 작가. 그녀의 삶은 물고 뜯기 좋은 하나의 가십 거리로 해부된 채 법정 위에 올라와있다.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을 무기로, 검사는 산드라의 삶을 이어 붙인다. 조각보 붙이듯 만들어진 하나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겐 그럴듯한 혐의의 증거가 된다. 이미 수많은 기억과 과정들이 쌓여 만들어진 누군가의 삶 혹은 관계를 아주 단편적인 정황(증거)만으로 추론하는 과정은 폭력적으로도 느껴진다.
정착된 사실에 대한 맹목적인 싸움은 150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계속된다. 부부간의 싸움, 녹음 파일, 몸에 남은 흔적 등 자극적인 삶의 정보들은 다양하지만 그 어떤 것도 유죄의 직접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아주 그럴듯하고, 믿기 쉬운 이야기로 말이다.
그럴듯하고, 믿기 쉬운 이야기
앞서 언급했듯 산드라의 죄를 판결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것은 정확한 증거라기보단 삶의 조각을 통해 만들어진 정황이다. 누군가의 삶을 판정하기 위해 파편의 연결을 가정하고, 상상한다. ‘어떻게’가 아니라 ‘왜’가 중요한 순간, ‘왜’는 이유가 되고, 이유는 곧 정황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정황을 믿게 되는 걸까. 그 해답은 용이함에 있다. 정황은 믿기 쉬우므로 선택된다. 선과 악, 유죄와 무죄와 같은 이분법적 판단은 우리의 판단 과정을 용이하게 만들고 그가 누구인지를 조금 더 쉽게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판단하는 자의 안에서 스토리화 되어 하나의 정착된 사실로 살아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이라는 것이, 혹은 가족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정착시켜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쉽게 인과로 정의할 수 있는 존재인가? 결국 사실을 파악하기 위한 그들의 행위는 이야기, 혹은 정황에만 주목되어 정작 다다르고자 하는 도착점에는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추락의 해부>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선택하는 것이 도달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진짜’ 심판자, 다니엘
영화는 궁극적인 진실과 같은 도달할 수 없는 도달점에 대한 메시지를 남기면서도, 결국 이 가족의 추락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을 한 가지 남기고 있다. 바로 산드라와 사뮈엘의 아들인 다니엘의 판단이다. 이 재판의 ‘진짜’ 심판자는 다니엘이다. 당사자와 가장 가까운 타인이며, 가장 소중한 존재인 다니엘은 엄마 산드라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진짜 심판자가 된다. 다니엘을 보고 있노라면, 정의의 여신 디케가 떠오른다. 눈을 가린 채 한 손엔 칼, 한 손엔 저울을 들고 있는 디케처럼 다니엘은 잘 알지 못했던, 아니 알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부모의 갈등을 파편적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다니엘은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지만, 결국 사건과 가장 가까운 그조차도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의 판단이 곧 어머니에 대한 새로운 정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니엘 또한 ‘어떻게 그랬는지 판단할 증거가 부족하면 정황을 봐야 해요.’라며 정황을 믿기로 선택한다. 그렇게 진짜 심판자 다니엘이 선택한 이야기는 진실로써 힘을 얻게 된다.
다니엘의 증언에서 회상된 사뮈엘과의 대화 장면이 인상적이다. 분명 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은 사뮈엘의 모습이지만, 그의 대사는 다니엘의 목소리로 전해진다. 그것이 다니엘의 입을 빌려 전해진 진실인지, 아니면 다니엘이 선택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이렇듯 <추락의 해부>의 카메라는 객관적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게 하여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한다.
듣는 것은 자유롭고, 편파적이다
<추락의 해부>가 가진 영화적 묘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무수히 많은 청각적 정보들이었다. 영화는 이미지를 배제한 화면에서 산드라의 질문만을 청각적으로 제시하며 첫 장면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산드라와 조에의 대화를 방해하는 음악 소리, 재판에서 틀어진 녹취록, 다니엘의 피아노 연주 등. 누군가의 심리와 상황의 분위기 같은 것들은 이미지로 제시되기보단 사운드로 제시된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우리가 상황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게 하지만, 무언가를 보지 않고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들음으로 인해서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것은 보는 것보다 자유롭고, 동시에 편파적이다. 청자의 주관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를 믿는 것은 그것이 이야기로써 더 ‘믿기 쉬운’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마음에 드는 이야기
다니엘의 증언 덕에 산드라는 혐의를 벗게 된다. 자유의 몸이 된 산드라는 동료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웃고 즐거워하다가도, 돌연 허무해진다. 결국 무죄라는 도달점에 도착하게 되었는데도 산드라도 나도, 그다지 후련하고 즐겁지 않다.
그렇다, <추락의 해부>에는 법정물 장르가 가진 통쾌함의 맛이 없다. 결국 진실과 정의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영화의 진실은 결국 주관에 의해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과 기억이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겨진 찝찝함이 여전히 맴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산드라는 적막하고 쓸쓸한 잠자리에 눕는다. 그 장면이 오래 이어진다. 삶이 해부되면서도 도달한 곳은 바로 적막하고 쓸쓸한 그곳이다. 분명 하나의 도달점을 위해 달려왔고, 그것을 이루었는 데도 삶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성취 같은 것은 의미가 없어진 것 같은 허무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떠오른 <라이프 오브 파이>의 대사, “당신은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나요?”
결국 진실은 선택되는 것이라면, 당신이 선택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차수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