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1976호로 떠났다 [공간]

호캉스로 찾은 행복
글 입력 2022.02.26 13:2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꾸미기]10-1.jpg


 

오랜만에 휘몰아치듯 빡빡한 일정이었다. 뭐든지 여유 있게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런 일정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2주간을 쉴 틈 없이 달리며 가끔 다 내팽개치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쁘고 즐겁게 일정에 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일정 끝에 기다리는 호캉스 때문이었다.

 

'호캉스'란 호텔(hotel)과 바캉스(vacance)를 합친 말로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비슷한 용어로는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이 있는데 바쁜 일정을 소화한 후 그 후유증을 해소하기 위한 휴식 방법으로 떠오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비록 1박 2일의 일정이었으나, 그 하루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와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집이 아닌 호텔로 향했다.

 

1976호. 나에게 '쉼'을 가져다줄 공간으로.

 


[꾸미기]11.jpg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울 시내와 정돈된 침대, 깨끗한 화장실, 쾌적한 공기 같은 것들이 피부에 닿아왔다. 멀리 떠나온 여행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그만큼 많이 힘들었었고 지쳐있었다.

 

어쩌면 호캉스에서 내가 기대했던 건 '잊힘'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내가 짊어져야 할 역할과 책임 그리고 의무에서 '나'라는 사람이 잊히는 것이다. 그리고 호캉스 중에는 약간의 일탈이 자연스럽게 허용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더 관대해질 수 있는 것 같다. 마치 '나는 쉬러 왔어'라고 당당하게 정당성을 부여하며 게으름을 합리화 시키는 것이다.


그 합리화된 게으름을 무기 삼아 준비된 식사를 양껏 먹어치우고 방으로 돌아와 그대로 널브러졌다. (그때의 내 모습은 널브러졌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호텔에는 일상의 근심이 없다'던 김영하 작가님의 말이 떠올랐다.

 

하긴, 집이었다면 아침을 먹고 내팽개쳐 둔 설거지가 신경 쓰였을 것도 같다.

 

 

[꾸미기]1KakaoTalk_20220224_205204591_11.jpg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우리의 수다는 끊기지 않았다. TV도, 핸드폰도 그 어떤 미디어의 방해도 없이 오롯이 일상을 나누었다. 아마 그동안 틈틈이 연락을 해왔어도 텍스트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갈증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갈증을 해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반응하고, 공감하면서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만끽했다.


결국, 나에게 중요했던 건 '호텔'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보다 호텔에 '누구'와 있었는가가 더 중요했던 것 같다. 물론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한 내향형 인간으로서 혼자만의 시간도 충분히 즐겼을 수 있었겠지만, 그보다 곁에서 이 순간을 공유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쁘고 즐거웠다.

 

아이러니한 것은 마음껏 게으르고 싶어 호캉스를 왔음에도 누구보다 부지런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 호캉스에서는 '아침 수영'이 그러했다. 사람이 많이 없는 시간대에 가고 싶기도 했고,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일을 호캉스라는 이유로 한 번쯤 해보고 싶기도 했다.

 

 

[꾸미기]10.jpg

 

 

보통의 겨울 아침이 그렇듯 아직은 어둠이 내려있어 고요하기만 한 로비를 지나 수영장으로 향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것 같은 때에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내심 뿌듯하기도 했고, 물을 워낙 좋아해서 보는 것도 들어가는 것도 좋아하니 아무리 이른 아침이라도 수영장으로 가는 길이 무척 설레고 기대됐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는 폐활량이 좋지 않던 나에게 수영을 배우게 했다. 그때도 물을 좋아했던 터라 엄마의 제안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수영을 배우는 동안 나는 물을 잔뜩 먹기도 하고, 귀에 들어간 물이 다음날 나오기도 하고, 근육통에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그래도 물속에서 느끼는 유연함과 자유로움이 참 좋았다.


수영장 레인을 따라 천천히 유영하면서 그때를 떠올렸다. 이제는 줄어든 수영 실력과 모자란 체력 때문에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목에 소독약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그 조차도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작은 단서가 되는 것 같아 소독약 냄새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웃으며 냄새로 수영장의 추억을 되새기는 동안 어둡던 도시에도 해가 떠올랐다.



[꾸미기]3.jpg

 

 

수영을 마치고 조식을 먹은 뒤 낮잠(?)을 잤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인 대가 치고는 너무나 달콤했다. 그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평소와는 다른 패턴에 알 수 없는 짜릿함도 몰려왔다. 분명 잠시만 쉬려고 했던 것인데 깊은 잠에 든 이유를 따뜻하고 폭신했던 침대 탓이라고 변명해 본다. 역시 호캉스의 묘미는 폭신한 침대가 아니겠는가.


간신히 침대에서 벗어난 우리는 호캉스의 마지막을 장식할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를 마시러 방을 나섰다. 커피와 초콜릿, 바삭한 쿠키를 앞에 두고 멍하니 오후의 햇살을 맞았다. 서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과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멍 때릴 수 있는 인생이라니.

 

'행복이 별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하루였다.

 

 

 

에디터_서은해.jpg

 

 

[서은해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