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언어가 사라진 후 시작된 역설적인 이야기 - 당신이 살았던 날들 [도서]

글 입력 2022.02.24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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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를 잃고, 우리는 언어를 잃어버립니다.”


몇 년 전 마음에 깊게 박힌 한 뮤지컬의 대사이다. 이 대사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는, 한 아이의 죽음 앞에서 위로와 애도의 말들이 얼마나 무력한지에 관한 것. 다른 하나는 아이가 죽음으로써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이야기, 즉 언어가 이 세상에서 상실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죽음은 그렇다. 떠난 자에게서도, 남아 있는 자들에게서도, 언어를 빼앗아 간다. 죽은 이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살아 있는 사람들 역시 슬픔과 고통, 혹은 공포 등으로 인해 말을 잃는다.


랍비이자 철학가인 ‘델핀 오르빌뢰르’는 죽음을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는” 것에 비유한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오르빌뢰르가 랍비로서 장례를 진행하며 경험하고 사유한 것들을 담은 저서이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이라는 ‘발화의 끝’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인 것이다.


 

 

죽음과 삶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



오르빌뢰르는 여성이자 세속주의자이자 랍비인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을,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세계 사이에 유대감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어느 한 세계뿐만 아니라 동시에 여러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철저히 분리하고 구별 짓는 대신, 그녀는 두 세계가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원한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양립 불가능성을 거부하는 그녀의 가치관을 여실히 담은 결과물이라 하겠다. 삶과 죽음, 시작과 끝, 그리고 남겨진 자들과 떠난 자들의 사이에 다리를 놓고 소통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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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와 거리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에서도 배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죽음은 예측할 수 없이 한 존재에게 불쑥 다가오고, 우리는 모두 타인 또는 자신의 생이 꺼지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삶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죽음. 그것을 입에 담을 수 없는 비극으로만 생각하여 외면한다면, 우리의 일상에 죽음이 찾아들었을 때 당혹스러운 감정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오르빌뢰르는 두렵더라도 죽음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기를 제안한다.


랍비로서 오랫동안 죽음 곁에서 애도자들과 함께해온 그녀는 수많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왔다. 그녀는 가볍지만도, 무겁지만도 않게 유대교의 언어로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써, 혼자서는 마주하기 힘든 죽음 너머에 대해 함께 사유해볼 수 있도록 돕는다.


 

 

죽음 뒤에도 살아남는 것들



 

죽음이 삶의 이야기를 몽땅 차지하지 못하게 할 방법이 존재한다. 생애 전체가 그 생의 결말로 축소되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죽음에 강탈당하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삶을 결코 그 삶의 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살면서 ‘끝없이’ 계속되리라 여겨지던 모든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

 

<당신이 살았던 날들> 56p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들을 지나 책장을 덮으며 내게 남은 것은, 모순적이게도 삶의 흔적과 생명력이었다. 죽음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긴 하나, 그것이 삶의 결말이나 결론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삶은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이는 죽음마저도 앗아갈 수 없는 삶의 증거이다.


삶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 존재했고 존재할 수 있었을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기억해보자. 죽음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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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희 컬쳐리스트.jpg

 

 

[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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