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따 박성빈] 왜냐면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글 입력 2022.01.2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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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을 처음 본 건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일하면서입니다. 나는 형이 싫었습니다. 좁아터진 주방에서 몸을 비켜서지 않는 건 형이 유일했습니다.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당신이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형이 내게 시비를 거는 걸로 해석했습니다.

 

형에게 어떤 의도가 없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근무하는 패스트푸드 체인은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ESG(임팩트 경영)등을 거론하며 장애인 고용을 홍보합니다. 자사의 채용정책에 차별은 없다면서요. 다른 직원들이 형을 대하는 태도나 형의 혼잣말 같은 것들이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줬습니다. 형이 지적 장애를 가진 직원이라는 걸 알고 나서 형에 대한 나쁜 인상을 거뒀습니다. 그 후로 형은 이런 사람이다, 란 정의를 내려본 일 없습니다. 형은 형의 일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나 역시 형에게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설거지거리를 갖다주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게 형과 하는 말의 전부였습니다.

 

그 날은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야했습니다. 오전부터 대면시험이었어요. 수업은 줄곧 비대면으로 하다가 시험은 왜 대면으로 하는 건지. 불만이 끓었습니다. 학교가 멀어 집에서 7시에 나서야 했습니다. 전 날은 밤을 샜습니다. 시험공부를 한 건 아닙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으른 삶은 시험 당일에도 그대로였습니다. 잠을 설쳤습니다. 그 시각에 일어나 집밖을 나간 게 몇 달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시험 시간 훨씬 전에 도착할 걸 계산하고 일찍 나섰는데 5호선이 멈췄습니다. 열차에 결함이 생겼나 싶었습니다. 십 여분이 지나도 움직일 기색이 없어 초조했습니다. 방송이 나왔습니다. 왕십리역 장애인 이동권 시위 때문에 열차 운행이 중단됐다, 급한 이동이 필요한 승객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짜증이 났습니다.

 

좀 더 연착되면 시험에 지각할 판국이었습니다. 욕이 혀뿌리까지 찼습니다. 택시 승차를 고민하다가 돈이 없어 그만뒀습니다. 이내 열차가 움직였습니다. 시험은 늦지 않았습니다.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 날은 시험이 3개여서 일찍 나선 건데 ‘일찍’의 의미가 증발했습니다. 시험을 보는 내내 날이 서 있었습니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장애인 집단이 역 마다 탑승하고 다시 내리는 단체 행동입니다. 한 역에 몇 분이 걸립니다. 지금의 교통이 비장애인 위주로 설계된 것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장애인 이동의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는 시위입니다. 버스와 지하철에 리프트가 있지만 이용하기에 장벽이 있습니다. 휠체어 리프트가 포함된 저상버스는 인프라 자체가 적거니와 그 장비를 작동하는데 몇 분의 시간이 걸립니다. 다른 승객들 역시 기다려야 하는데 그 기다림을 참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욕하는 승객이 있습니다. 바빠 죽겠는 시늉을 하는 승객도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눈치를 봐야 합니다. 지하철도 다를 건 없습니다. 지하철 내 설치된 리프트는 사고가 잦고, 장애인 이용자들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도 있습니다.

 

대중교통인데 장애인은 이용할 수 없는 겁니다. 장애인은 ‘대중’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동의 자유를 달라. 법에 명시된 시민의 권리를 누리고 싶다는 호소입니다.

 

나는 그걸 다 알았습니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온당한 권리 획득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란 책을 통해 알았습니다. 이곳에 그 시위를 옹호하는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짜증이 났습니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 때문에 열차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 방송에 서슬이 시퍼래졌습니다. 내가 시험에 늦게 생긴 까닭이 장애인 탓 같았습니다. 기관사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요.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 때문에’라는 말은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장애인에게 돌리는 해명이었습니다. 나는 거기 휘둘렸습니다. 그 시위에 참여한 장애인 모두에게 짜증이 났습니다.

 

막상 내 일이 되니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한 겁니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권리 투쟁을 위한 정당한 일이라고 썼지만 내가 인파에 섞여서 시험에 늦을 판국이니 화가 치밀었습니다. 위선적인 스스로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다문화가정입니다. ‘다문화’라는 낙인이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경험한 적 있습니다. 그것은 ‘다문화=약자’라고 전제합니다. 당연히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시혜적 인식 또한 포함돼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너희와 우리는 다르다’는 구별짓기의 의식을 확대합니다. 그 ‘우리’가 나를 어떤 눈꼬리로 흘기는지 겪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누가 소수자·약자인지에 대한 지형은 상황이나 위치에 따라 끊임없어 변하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는 약자의 위치에 가깝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 자체가 오만이었습니다. 기만이었습니다. 나는 남자고 비장애인이며 이성애자입니다. 나조차 감각하지 못하는 일상적 특권을 매 순간 누리고 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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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누군가는 잘 모르면 입을 다물라고 했습니다. 그 입지나 위치에 서성여 본 적도 없으면서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지껄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뭐가 다르냐? 그런 말 역시 어떤 자격을 검열하는 것 같아서요. 마치 진짜 소수자·약자를 걸러내겠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그런 이들만 발언의 기회가 있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진짜’의 기준이 뭔데. 나는 그렇게 되뇌었습니다.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이해합니다. 그건 내 위선을 꿰뚫는 문장이었습니다. 나는 장애를 가져본 적 없고, 장애를 가진 이의 가족도 아닙니다. 나는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 시위에 참석한 이들의 삶 역시 헤아려 본 적 없습니다. 내가 그 글을 썼던 건 장애인들의 안위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내가 정의로운 인간임을 전시하기 위한 겁니다.

 

슬기는 예전에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좋은 일의 정체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는 비대면 수업이 막 시작된 상황이었습니다. 슬기는 자신이 청각장애인 학생은 수업 수강이 불가능한 상황을 학교 본부에 알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오랜만에 좋은 일을 했다며 자신에게 칭찬해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슬기의 마음에는 오롯이 장애인을 배려하고 싶은 마음만 있던 걸까요. 그게 ‘좋은 일’이라고 판별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슬기는 학교 본부와 소통하며 ‘정의로운 나’에 대한 자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슬기에게도 나와 같은 마음이 있던 겁니다. 그 마음이 정말로 ‘좋은 마음’일까요. 그 때 느꼈던 위화감은 돌고 돌아 나에게도 적용됐습니다. 나는 슬기에게 느꼈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위화감을 느낍니다.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요. 나는 약자들의 인권을 위해 나서는 수많은 활동가의 마음을 모릅니다. 나는 거기 생을 거는 이들이 어떤 의식으로 뭉쳐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차별과 혐오에 노출된 당사자의 마음 역시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보다 천박한 사람이라는 것은 압니다. 나는 나와 무관한 일에는 관심이 없고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립니다. 나는 형을 떠올립니다. 내가 알고 지내는 장애인은 형이 유일합니다. 형에게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진 적 없습니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료라는 의식 말고는 어떤 마음을 가져본 일 없습니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천박한 내가 소수자에게 그나마 취할 수 있는 태도 아닐까요. 형을 그냥 형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형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형이 이렇고 저렇다는 편견으로 재단하지 않는 것처럼. 내게 형의 장애는 정체성일 뿐입니다. 안경 쓴 사람, 안경 쓰지 않는 사람, 키가 작은 사람, 키가 큰 사람, 곱슬머리인 사람, 직모인 사람에게 아무 기분도 들지 않는 것처럼 형의 장애도 그저 형을 구성하는 성분이니까. 나는 어떤 정체성을 가진 수많은 누군가에게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같습니다.

 

 


 

 

내 고민도 멀리서 보면 그저 작은 불빛으로 보이겠지. 창문 속 아무도 몰랐던 너의 아픔을 이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어.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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