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술을 몰라도 그림은 즐거워 - 스웨덴 국립미술관 컬렉션 [전시]

나만의 방식으로 그림과 대화하기
글 입력 2024.04.2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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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전시가 두려운 여러분에게


 

우리는 미술 전시회를 예매해두고 참 많은 것을 고민하게 되지요. 어떤 옷을 차려입어야 격식에 맞을까? 전시회 중간에 배가 고파지면 난감할 테니 미리 식사를 해두는 편이 좋을까? 이러한 질문 가운데 무엇보다 쫄깃하게 심장을 옥죄는 순간은 매표소에 놓여있는 안내 책자를 꺼내 들어 읽을 때일 것입니다. 전시 제목과 포스터, 대표 작품 몇 점 정도만 훑어보고 전시를 보러 온 것인데 책자 속 문장을 읽는 이제서야 실감이 나는 것이지요. 이건 가볍고 장난스러운 보통의 놀이가 아니라, 무언가 분명하고 엄중한 의미를 지닌 전시라는 것을요. 분명 즐거운 마음가짐으로 전시를 보러온 것인데, 이제는 이것이 내가 소화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집니다. 교양인으로서 무언가 느끼고 배워야만 한다는 부담감 같은 것들이 거대한 산을 이루고 앞을 가로막는 듯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종종 전시회장 앞에 당도해서는 멈칫, 하며 발걸음을 붙잡히지요.


보통의 우리는 인상주의나 낭만주의와 같은 사조(思潮)에 대한 지식은커녕, 미술의 규칙이라곤 아는 바가 없습니다. 사실 전공자나 전문가가 아닌 이상 미술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마지막일 테지요. 기본적인 배경지식은 고사하고 사전에 공부해온 것도 없는데 그림을 마주하면 대관절 무엇부터 살펴야 할지 고민이 많아집니다. 순식간에 긴장감이 솟아오르며 등골에 전율이 흐르고 동행에게 나의 교양 없음을 들킬까 걱정이 시작되지요.


특정한 국가명이나 사조가 전시의 제목에 붙은 경우 그 긴장감은 배가 됩니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소개할 전시가 그에 해당합니다. 바로 스웨덴과의 수교 65주년을 기념하여 마련된 <새벽부터 황혼까지 - 스웨덴 국립미술관 컬렉션>이지요. 이 전시는 스웨덴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79점을 대한민국 서울에서 볼 수 있는 뜻깊은 전시입니다. 스웨덴 스톡홀름으로부터 16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날아온 그림들은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그림을 통해 북유럽 특유의 예술세계가 확립되기까지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아! 그런데 벌써부터 막막하지 않으신가요? 우선 설명하는 말이 너무 어렵습니다. ‘북유럽 특유의 예술세계’란 무엇이고, 그 세계가 ‘확립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예술가들은 ‘상징주의’와 ‘종합주의’ 등을 접하며 마침내 ‘민족 낭만주의’를 확립했다는데 이러한 사조들은 대체 무엇이냐구요. 그림을 보기 앞서 안내 책자마저 턱턱 눈에 걸려서 계속 읽어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문화예술 애호가 중 한 사람이지만 이런저런 사조나 화가들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한 ‘예술 무지렁이’로서, 전시회의 무게 앞에서 얼어붙고 마는 여러분들의 고충에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한 지식 없이도 나름대로 즐겁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저만의 방법도 갖추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 애호가분들에 비하면 한참은 뒤떨어지는 수준의 시선으로도 충분히 그림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미술 교과서를 뗀 이후로 그림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 본 적도 없는 ‘날 것의 눈’을 지닌 사람은 어떻게 미술을 즐기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번 <새벽부터 황혼까지>를 비롯하여 전시를 관람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유쾌한 방법을 활용하여, 일반인의 시선으로도 그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컬러로고)새벽부터황혼까지_포스터_인물_(색감)-01.jpg

 

 

 

가벼운 산책을 하듯 전시를 보러가기


 

그림 관람 방법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전시회에 입장하기 전에 제가 스스로 되뇌는 다짐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처음 사람을 만날 때처럼 그림을 마주하는 태도도 무척 중요합니다. 그것은 새로 만난 사람에게 나를 소개한 뒤 상대의 회답을 기다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몸을 바짝 세우고 기세등등하게 맞서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히려 힘을 풀고 몸의 중심을 한쪽으로 옮겨 서는 쪽에 가깝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벼운 산책을 한다, 는 느낌도 좋겠지요. 이러한 말의 요지는 결국 ‘전시를 통해 많이 느끼고 깨닫기를 기대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전에 철저히 예습을 해온다거나 안내 책자 속의 요상한 단어들을 해석하고 그림에서 발견하려 애쓰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실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 없는 일반인이 벽에 걸려있는 안내판과 그림 몇 점만을 보고 그림의 화풍이나 사조, 해당 화가의 특징에 대해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전시의 시작 단계에서 이러한 시선으로 그림을 감상하라는 의도로 간단한 설명을 제공하지만 첫 번째 그림을 보는 순간, 읽었던 글자들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집니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종류의 지식이니 읽는 순간 이해하고 그림에 적용하여 감상하기는 쉽지 않지요. 그러니 이번 전시에 오직 스웨덴 작가들의 그림만 놓였다고 한들, 그림을 보고 나온 뒤 북유럽의 예술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대신 “이런 뉘앙스의 그림을 북유럽풍이라고 칭하는구나” 정도의 단상은 가능하겠지요.


결과적으로 우리가 전시를 보고 난 뒤에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먼저 “북유럽의 예술세계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가겠다”는 압박감은 내려놓습니다.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이나 전시회를 방문하기 전에 가볍게 익힌 정보가 있다면 그림의 첫인상을 구축할 만한 작은 단서 정도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리고는 미술에 대한 경험이 많지는 않은 평범한 일반인의 시선으로, 조금은 어리숙하지만 오롯이 자기의 방식대로 그림을 보는 것입니다.


과감히 말해 전시를 보고난 뒤에 북유럽의 예술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공부하는 학생 신분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대신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지식과 경험을 쌓으러 온 한 사람으로서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세계에서는 정답이라는 자신감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전시장을 나오고도 북유럽의 예술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때요. 그건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고, 내가 교양이 없다거나 무지하다는 방증도 아닙니다. 대신 자기만의 시선과 방식으로 그림과 소통하여 느낀 바가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둔 것이지요.


그러니 시선을 현혹하는 아름다운 포스터 그림과 안내 책자에 적힌 온갖 글자의 장난에 넘어가지 마세요. ‘이 전시를 보고 나면 무언가 의미 깊게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 텐데’, ‘북유럽풍 인상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괜히 보러 왔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벙찐 채로 구경하다 전시가 끝나면 어쩌지?’ 라며 온갖 걱정거리가 떠오르더라도 고이 접어두세요. 그리고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 긴장을 풀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장에 들어가봅시다. 처음 만나는 친구와의 약속 장소에 나가는 것처럼 약간의 긴장이 묻어나는 설렘을 품고서요.

 

 

 

쭉쭉, 으쓱으쓱, 몸을 움직여보기


 

자, 이제 정말로 시작입니다. 첫 번째로 제안하는 관람 방식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림을 보는 것입니다. 전시회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그림이 걸린 공간을 자유로이 거닐며 육안으로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확대를 거듭하면 어느 순간 픽셀이 깨지고 마는 스크린과는 차원이 다른 특장점입니다. 이러한 관람 방식은 그러한 특징을 고려하여 그림을 감상하고자 한 것이지요.


한 걸음씩 앞뒤로 움직이며 그림과의 거리를 조절해보세요. 처음에는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그림의 전체적인 구성과 분위기를 살펴봅니다. 이것이 풍경화인지, 사람을 그린 것인지, 암울하게 그려졌는지 혹은 화사하게 담아냈는지 살펴봅니다. 그리고는 한 걸음 가까이하여 그림에 다가가 일부분씩 나누어 살펴봅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세밀한 붓 터치와 색깔 표현이 보이지요. 이때, 멀리서 보았을 때는 몰랐던 비밀을 발견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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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노르웨이의 화가인 한스 프레드릭 구데(Hans Fredrik Gude, 1825~1903)가 그린 <샌드빅의 피오르 The Sandvik Fiord>입니다. 사진으로 착각할 만큼 사실적으로 보이지요? 햇빛에 희게 반짝이는 바닷물과 탁월한 자연색 묘사가 엄청난 현실감을 줍니다. 마치 그림 속 가까이 있는 언덕 위에 서서 바라보는 풍경 같군요. 그림의 사실감을 떠올리면 마치 화가가 엄청나게 얇은 붓으로 하나하나 세심하게 색을 그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 가까이서 그림을 보면 예상과 달라 깜짝 놀라고 마는데요. 생각했던 것보다 붓 터치가 대범하다는 것입니다. 예상외로 상당히 도톰한 붓 터치와, 햇빛을 받는 부분과 받지 않는 부분 사이 중간색을 사용하지 않은 명확한 색 대비 그리고 툭툭 투박하게 붓을 사용한 흔적도 보입니다.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서는 다양한 중간색을 사용하여 아주 얇은 붓으로 그렸어야만 할 것 같은데 말이지요. 이와 같이 실제 그림은 멀리서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려졌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과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이 이리도 다를 수 있지요.


이를 깨닫는 순간 놀람과 동시에 여러 궁금증이 차오릅니다. “실제 그린 것과 보이는 것이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이러한 깨달음을 어떻게 그림 속에 구현해 낼 수 있었을까?”, “다른 화가들도 이러한 착시를 사용하곤 했을까?” 이렇게 여러 질문을 떠올리며 고민한다면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자기만의 방식대로 그림을 즐길 수 있지요. 그리고 해당 그림은 아주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게 됩니다. 이처럼 그림과 애착을 느끼면 이후로도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 자체에 흥미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거리를 조절하는 방식 외에도 여러 방법이 있지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세요. 그림의 정면과 측면에 번갈아 서보거나, 약간 몸을 숙였다가 깨금발로 서 보는 것도 좋지요. 멀뚱히 서있을 때 시선이 닿는 특정한 각도에서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것이 보이며 신선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림이란 것은 평면적이라 오직 한쪽 면만 볼 수 있지만, 우리가 몸을 움직여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숨겨두었던 것을 꺼내 보여주기도 한답니다.



 

그림 속 화가의 의도에 주목해보기


 

이번 방법은 그림 속 화가의 의도에 주목해보는 것입니다. 대개 그림을 해석할 때에는 그림의 구도나 소품, 의상 등을 단서로 활용하곤 하지요? 그러나 일반인이 해당 구도와 소품의 상징성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대신 상대적으로 쉽게 작가의 의도에 접근하는 방법은 화가의 붓 터치와 색 표현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붓 터치와 관련해서는 짧은 터치로 날카롭고 빠르게 툭툭 그린 것인지, 혹은 조금 더 세심한 터치로 그린 것인지를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색 표현을 이해하는 방법에는 여러 선택지가 있겠지요. 실제로 보이는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색깔을 택했거나, 과장된 색 표현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서들을 얻었다면 화가가 어떤 의도로 그것을 택하였을지 상상해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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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북유럽의 대표적인 여성화가, 한나 파울리(Hanna Pauli, 1864~1940)가 그린 <아침식사 시간Breakfast Time>입니다. 나무의 그림자 아래로 따사로운 햇살을 피해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풍경이네요. 식탁 위로 놓인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식기류들과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들이쳐 반짝이는 모습이 황홀하기까지 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특히 인상적인 점은 과감한 붓 터치입니다. 파울리는 대상을 섬세하게 묘사하기보다 도톰한 붓을 사용해 둔탁하게 담아냈습니다. 여성의 얼굴이나 길 뒤로 저 멀리 보이는 나무 수풀의 윤곽을 뭉개듯 표현하였지요. 


그렇다면 화가는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듭니다. 대상의 윤곽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여 표현한 것으로 증명되지요. 그렇다면 화가는 왜 이런 기법을 택했을까 의문이 듭니다. 그런 고민을 하며 그림 옆 안내판을 읽다가,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림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 반짝이면서 순간 그림 속으로 들어간 듯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그림 속 풍경을 거닐다가 고개를 들고 보니, 찬란한 햇살과 따스한 공기로 눈이 부시고 온갖 식기류가 햇살을 맞이하며 황홀한 빛을 쏟아냅니다. 사방으로 뻗치는 그릇들의 반짝임이 눈을 메우듯 찔러와서,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생각하니 그 빛 말고는 무엇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날카로운 빛이 먼저 보인 탓에 그 바깥의 것들은 대강 위치와 형상으로만 기억되지요. 분명 여성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저 멀리로 나무가 울창했던 것은 알겠는데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풍경을 마주한 순간 반짝이는 식기류의 자극에 시선을 빼앗겨 다른 것은 명확히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화가의 의도적인 현실 변주는 그림 속에서 해당 풍경을 바라볼 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인상을 담아냅니다. 만약 같은 풍경이 담긴 그림이나 사진을 본다면 고해상도 렌즈로 보듯이 모든 부분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현실에서 무언가를 볼 때는 눈을 찔러오는 가장 강렬한 자극 하나에 시선을 빼앗겨 다른 것은 흐릿하게 윤곽 정도만 인식할 뿐입니다. 결국 눈앞에 보이는 장면은 하나의 분명한 것과 그 밖의 모호한 것들로 대강의 인상과 분위기만 기억되지요.


파울리는 어떤 풍경을 마주하는 가장 첫 시점에 순간적으로 눈에 인식되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강조함으로써, 해당 풍경을 보는 즉시 형성되는 인상을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파울리의 의도적인 생략 기법은 야외의 태양빛이 주는 인상을 담아내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실제로 <아침식사 시간>은 야외의 태양빛을 인상주의 화풍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비록 그림을 처음 본 순간에는 그것을 몰랐지요. 그러나 그림을 감상하며 체험한 신비한 경험을 계기로, 인상주의가 무엇이고 화가가 그것을 그림에 담아내기 위해 어떠한 기법을 사용하는지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낯설었던 거친 붓 터치, 모호한 윤곽, 독특한 색 표현이 어떤 의도에서 선택된 것인지 알았지요. 화가는 우리 눈에 순간적으로 담기는 인상, 이미지, 전반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관찰과 사소한 호기심에서 비롯한 깨달음을 통해 인상주의를 피부로 느끼듯, 우리는 그림을 보며 미술 지식을 일종의 감각처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작품을 만난 것을 계기로, 지금껏 여러 설명을 듣고 책을 읽어보아도 와닿지 않던 인상주의 화풍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상주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여정의 시작점이 되겠지요.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림을 받아들였다면 이러한 신비로운 경험과 깨달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고 고민하며 내면화하려는 습관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줍니다. 여러분도 붓 터치와 색 표현에서부터 관심을 기울여보세요. 그 속에 숨겨진 의도를 헤아리려는 노력 속에서 화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즐거운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림 바깥의 요소에 시선을 돌려보기


 

지금까지 소개한 방법은 모두 그림 속에서 단서를 찾아 감상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림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의미를 낚아챌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때로는 그림 자체에 흥미를 갖지 못하거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꺼림직한 마음을 품고 다음 그림으로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림에 집중하고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면, 그림 바깥의 요소로 눈을 돌려보는 방법이 존재합니다.


전시회는 그림이 주가 되는 행사이지만, 그 밖의 여러 요소를 결합함으로써 그림을 보조하여 적절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일 또한 중요합니다. 쾌적한 내부 공간, 적절한 수준의 정보 제공, 일관된 메시지 전달 등이 그림을 보조하는 요소의 예시가 되겠지요. 특히 그러한 요소들이 전시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할 수준이라면 전시회의 가치가 퇴색되기도 하지요. 반면, 그러한 요소들이 적절히 결합되어 관람객들이 전시회의 주제에 맞는 분위기 속에서 쾌적하게 작품을 관람하고 퇴장할 수 있다면 완성도 높은 훌륭한 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관람객의 전시 몰입을 방해할 수 있는 가장 가시적이고 기초적인 요소는 통일성입니다. 인포월(information wall)과 그림의 배치, 안내판의 디자인 혹은 텍스트의 어조 등이 통일되지 않는다면 관람객의 눈에 거슬리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지요. 특히 이러한 요소들에서 조금이라도 흠이 보였다간 바로 관람객의 기대와 신뢰를 깨뜨리고 맙니다. 전시를 본격적으로 감상하기 전에서부터 집중도를 깨뜨려 전시 관람의 경험을 방해하지요.


반면 이러한 요소들이 일관된 흐름 하에서 통일된 모습을 보인다면, 관람객들이 전시에 갖는 기대감과 만족감은 배가 됩니다. 특히 본 전시인 <새벽에서 황혼까지>의 경우, 각 구역의 시작 단계에서 인포월을 통해 기본적인 정보를 먼저 전달한 뒤에 그림을 배치하는 식의 구성을 모든 구역 동일하게 적용했습니다. 안내판의 디자인도 일관되었고, 모든 텍스트의 내용과 수준이 크게 상이하지 않아 사소한 요소까지 공을 들여 준비하였다는 기대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액자의 모양입니다. 첫 번째 구역에 놓인 액자는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화려한 무늬로 조각되어 있었지만, 바로 뒤로 이어지는 브루노 릴리에포르스(Bruno Liljefors, 1860~1939)의 그림이 있는 공간의 액자는 상대적으로 평면적이고 새겨진 조각도 없이 밋밋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림의 위치를 정할 때 액자의 디자인까지 고려하여 배치한 걸까? 혹은 전시회를 겸해 액자를 새로 맞춘 걸까? 아니면 릴리에포르스의 액자만 특이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떠올렸지요. 그림 이외의 여러 요소에도 관심을 가지다보면 이처럼 재밌는 질문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정답이 아니더라도 뭐 어떻습니까. 다양한 방식으로 그림에 흥미를 느끼고 감상할 수 있다면 여하튼 좋은 것 아니겠어요?

 

그림 전시회를 보러 와서 그림 이외의 것들에 눈을 돌린다고 너무 노여워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시회에서 볼 것이라곤 오직 그림뿐이라면 전시회장이나 박물관이나 너무 대단하게 지을 필요도 없겠지요. 그림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공간에서도 그에 맞는 품격을 보임으로써 그림을 더욱 빛내주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니 잠시 숨을 돌리고 싶다면 이러한 요소들로 눈을 돌려보세요. 그림과 더불어 그것을 보조하는 요소에도 관심을 가지며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를 즐기는 일 또한 유의미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먼 거리를 만나 마침내 만난 붉은 실에게


 

지금까지 <새벽부터 황혼까지 - 스웨덴 국립미술관 컬렉션>을 더욱 즐겁게 관람하기 위한 몇 가지 관람 방법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단지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알 수 있는 기본 정보를 나열하기보다는, 이번 전시를 관람하는데 적용하여 자기만의 방식대로 그림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쁘고 멋진 그림이 지척에 있어도 당사자가 부담감을 느끼고 방문을 꺼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색다른 그림 관람 방법을 소개함으로써 미술 전시에 대한 장벽을 낮추고, 전시 관람의 새로운 즐거움을 발굴해 여러분을 북유럽의 예술세계로 소개하고자 했습니다.


저 멀리 스웨덴 화가들의 그림을 마주할 기회는 얼마나 귀중합니까. 사람을 사귀는 것처럼 그림 또한 만나는 시기가 중요합니다. 그림의 소장처가 해외라면 재회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지만, 어떤 그림은 어떤 순간에 만나서 사랑하게 되는 그림도 있거든요. 홀로 품고 있던 질문에 대한 고뇌를 담은 그림, 혹은 이미 답을 얻어 후련한 표정의 그림을 만나면 무척 반갑습니다. 마치 나와 닮은 모습의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요. 우리의 허한 마음을 달래줄 그림은 또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면 그림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반대로 거리낌을 느낀다면 그들은 뚱한 표정을 짓고 최후의 문 마저 닫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을 여는 열쇠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족함이 탄로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압박감은 열쇠를 꺼내들 수도 없도록 두 손을 주머니 속에 단단히 붙잡아 둡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도전이자, 우리의 내면을 굳건히 붙들어 줄 시작점입니다. 모두에게 고백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나 자신에게 담담히 얘기하는 겁니다. “보고 느끼는 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아.” 이러한 다짐을 굳게 믿고 우리만의 시선으로 미술을 바라보면 됩니다.

 

정답(正答)은 없다면서도 정도(正道)는 존재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정답도 없고 정도도 없는 그림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요. 그림은 결국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감상이 모두 정답이라는 포용은 그 어떤 포옹보다 따뜻합니다. 비록 그림에는 문외한이고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더라도 우리의 방식대로 바라보는 그림은 전부 정답입니다. 그러니 걱정은 내려두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듯이 설레는 첫 만남을 도전해봅시다. 나의 영원한 동반자가 될 수도 있을, 무표정의 그 친구에게로. 손을 내밀고 악수를 한 뒤 어색함에 아무런 이야기를 내뱉어도 괜찮습니다.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필연의 붉은 실로 묶여 영원을 함께하게 될 테니까요. 오랜 운명을 외면하다 마침내 만난 친구처럼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세요. :)

 

 

 

서지원.jpg

 

 

[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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