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존재와 존재의 이해에 관하여 [도서/문학]

관계 맺음과 이해에 관한. 김초엽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글 입력 2022.01.20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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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책장 정리를 하다가 한 책을 발견하곤 미소 지었다. 나에게는 꽤 의미가 큰 책인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작년 봄 연합독서토론 동아리에 들어간 후 처음으로 간 토론의 주제 도서였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 계기 중 하나가 '혼자 책을 읽다 보니 장르가 편향되는 감이 있어서'였다. 보통은 일본 문학 소설이나 무협지 등을 읽으며 시간을 죽였다면 이 책은 정말 오랜만에 진지하게 독서에 임하게 된 책이기도 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해야 했으니까.

 

그런 고로, 오늘은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서 벌어지는 존재와 존재의 관계 맺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7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대게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그리고 7개의 이야기들 모두 그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서사로 전개된다. '어머니'에 대해서, '여성'에 대해서, '장애인'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나는 직접적으로 그들의 애환과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결코 그들이 그리고 그것이 될 수는 없으니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관점에서 끊임없이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그런 생각은 이 책의 전체적인 플롯과 유사하다.

 

이 책의 새로운 점은 그 이야기들의 배경이 '발달한 과학문명'의 세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예 처음 있었던 주제는 결코 아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 또한 발달한 과학문명으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영화 '아일랜드'나 '가타카' 또한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폐해를 말해준다. 우주로 나가 행성을 개척하고 전 우주적 전쟁을 하는 영화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작가 김초엽의 시선은 그것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고 느껴진다. 경제적 이유로 폐쇄된 우주정거장에서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노인의 이야기, 과학문명의 발달로 다른 행성을 탐험하러 떠났으나 모종의 사고로 모든 과학기술 장비를 잃고, 그렇게 조우한 미지의 존재와 관계 맺는 이야기 등 색다른 지점을 파고든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와 존재의 관계 맺음과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주를 이룬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강원도 한 도시의 카페 창문 밖엔 눈이 내리고 있다. 어쩐지 센치해지는 날이다. 따뜻한 히터 바람과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즐기면서 소개한다. 내가 나의 방식대로, 존재와 존재의 관계 맺음에 중점을 두어 이해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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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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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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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구로 떠나기 전, 올리브가 마을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 바로 이 순례의 관습일지도 몰라. 우리는 자라면서 바깥 세계에 관한 호기심을 느끼고 이 평화로운 마을 외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를 갈망하게 돼. 그리고 마침내 순례의 길에 오르지. 올리브는 그렇게 우리가 반드시 한 번은 이 세계를 떠나도록 만들었어. 지구에서 그 모든 것을 보고 우리가 무엇을 외면해왔는지, 우리가 우리만의 아름다운 마을에서 살아가는 동안 저 행성에서는 무은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고 오라는 의미였겠지.

 

그럼 이제 한 가지 질문만이 남았어. 정말로 지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곳이라면, 우리가 그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오직 삶의 불행한 이면이라면,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그들은 왜 지구에 남을까? 이 아름다운 마을을 떠나, 보호와 평화를 벗어나, 그렇게 끔찍하고 외롭고 쓸쓸한 풍경을 보고도 왜 여기가 아닌 그 세계를 선택할까?

 

김초엽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선 릴리가 만들어낸 마을의 후손인 데이지가 친구인 소피에게 남긴 편지 형식으로 전개된다. 데이지의 마을에선 열여덟 살이 된 아이들에게 성년식을 진행하는데, 그것을 '순례'라고 부른다. 순례자들은 우주선에 올라타 '시초지'라고 부르는 곳에 가게 되고 한 해가 지난 후 돌아온다. 데이지는 출발하는 순례자들의 수보다 돌아오는 순례자들의 수가 적은 것에 의문을 느끼고 그 비밀을 파헤친다.

 

그렇게 알게 된 진실. 우리의 조상 릴리 다우드나는 시초지라고 부르는 지구를 인간배아 디자인을 통해 신인류라고 부르는 개조인과 신인류가 되지 못한 비개조인으로 나뉘게 하고, 반목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 이후 릴리는 얼굴에 흉측한 얼룩을 가지고 태어나도, 질병이 있어도, 팔 하나가 없어도 불행하지 않은 세계를 찾아내고 싶어 했다는 것. 아름답고 뛰어난 신인류가 아니라,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를 만들고 싶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데이지의 마을이라는 것. 데이지는 그곳에선 자신들이 비정상, 비개조인 취급을 받으며 그곳엔 불행, 차별, 멸시, 동정, 반목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이 사실들을 기록한 자가 바로 릴리의 자손이자 자신의 또 다른 조상, '올리브'라는 것도 알게 된다.

  

책을 읽으며 어디선가 얼핏 들은 말이 생각났다. 비정상들이 모인 곳에서는 정상이 비정상이 된다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구성원들이 모여 '이 정도를 정상이라고 하자'라고 합의한 순간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이는 비정상이 된다. 결국 정상성은 다수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구적 관점에서는 비개조인보다 개조인인 신인류가 우월한 것이 정상이고, 릴리의 마을에선 신체의 불편함이나 질병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한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그들이 섞이는 순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경계가 만들어진다.

 

흔히 우리는 유토피아를 갈등이 없고 행복만이 가득한 세상으로, 디스토피아를 그 반대의 세상으로 정의한다. 릴리는 반목, 고통, 불행이 없는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했다. 모두가 뛰어나고 아름다운 그런 세계를 말이다. 그러나 그 행동이 지구를 디스토피아적 세계로 내몰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장애와 질병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한, 남을 밟아 딛고 일어서지 않는 세계를 만든다. 그 마을에서 그들은 행복하다. 그런데, 순례를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릴리가 만든 유토피아에서 살아온 그들은 왜 고통이 가득한 지구에 남기로 했을까.

 

첫 순례자인 올리브는 지구로 돌아가 평생을 비개조인의 부당한 처우에 맞서 싸웠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고, 함께 생을 마감했다. 어떤 순례자들은 마을로 돌아왔고, 어떤 순례자들은 올리브의 행동을 답습하고자 지구에 남았다. 마을로 돌아가 다시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지구의 정상성에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구에서 고통받는 자신들과 같은 처지인 이들의 편에 섰다. 이는 두 가지를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신체적 결함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사는 것도, 유전적으로 우월한 이들만이 모여 사는 것도 절대적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쩐지 '정상'이라는 말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여기선 정상이 저기선 비정상이고, 저기선 정상이 여기선 비정상이고. 비정상은 배척받고 정상은 우대받는 것. 누가 누구를 정상이라고, 비정상이라고 판단하는 것. 과연 옳은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이들에게 '비정상'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맞는 것일까.

 

 

 

말이 통하지 않아도 괜찮아


 

 

두 번째 루이는 희진이 어떤 열매와 가죽을 더 선호하는지를 파악했고 희진의 손짓을 예전의 루이보다 더 잘 이해했다. 무리인의 팔은 인간과 다르게 움직여서 신체언어가 서로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희진과 루이는 몇 가지의 동작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미안해, 고마워, 안녕. 이제 그런 말들을 나눌 수 있었다.

- 잘 자.

처음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깔개 위에 몸을 뉘었을 때 희진은 문득 울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다.

 

눈앞에는 회색의 축축한 피부를 가진 여전히 낯선 존재가 서있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에는 너무 빨리 죽어버리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온전히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완전한 타자. 하지만 희진은 이해하고 싶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고 싶었다. 루이의 연속성을, 분절되지 않은 루이의 존재를. 그때 네 번째 루이가 희진을 보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희진은 그것이 미소임을 알았고, 그래서 마주 웃어주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루이가 쓴 기록의 내용을 읽어주셨다. 지구에 돌아온 이후로 할머니는 여생을 색채 언어의 해석에만 몰두했다. 내용의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시간을 들여가며 알아낼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평범한 관찰 기록이었다. 그러나 그중 잊히지 않는 한 문장만큼은 지금도 떠오른다.

"이렇게 쓰여 있구나."

할머니는 그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김초엽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우주비행사 희진은 태양계 밖의 우주 탐사를 떠났다가 사고를 당한다. 홀로 살아남아 어떤 행성에 떨어진 그녀는 그곳에서 지적 생명체와 조우한다. 가지고 있던 모든 과학 탐사장비는 망가지거나 분실했는데 설상가상 그 생명체는 인간과 전혀 다른 외형, 소통 방식을 지녔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그들의 도움이 절실했던 희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움을 요청했고, 다행스럽게 그들의 무리에 들어간다.

 

희진이 조난당한 행성에서 만난 지성체들은 인간 자체의 힘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배울 수 없는 의사소통 방식을 사용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음성 언어가 인간의 가청 주파수를 넘어섰기 때문. 그들의 신체 언어를 어깨너머 배우는 수  밖에 없다. 희진은 살아남기 위해 가진 신체적 조건도, 사고방식도, 문화 습관도 모두 다른 존재와 최선을 다해 관계 맺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 무리에 동화된 희진은 천운으로 자신이 타고 왔던 우주선을 찾고, 우주를 방황하다 구조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행성의 존재들도 희진을 처음 보고 희진만큼이나 당황했을 것이다. 말이라도 통한다면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이해 불가능.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희진과 존재들은 깨닫는다. 이해 불가능이 공생 불가능은 아님을. 또한 이해 불가능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님을. 무엇을 선호하고 싫어하는지, 저 손동작은 무엇을 뜻하는지, 어느 정도로 잡아야 이 존재가 다치지 않을지는 노력에 따라 알아낼 수 있다. 그런 노력은 곧 존재 간의 정서적 유대감을 키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조금씩 알아간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조금씩 이해해간다.

 

얼마 전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하나를 봤다. 인간과 치타의 유대에 관한 영상이었다. 육식 동물인 치타는 무리 지어 살아가지 않는다. 고독한 존재로서 살아간다. 새끼를 낳아도 2년이 지나기 전 독립시킨다. 다른 존재에 대한 경계심도 상당히 강한 편이다. 그런 치타 가족에게 한 인간이 다가간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경계심을 풀 때까지. 물론 말도 통하지 않는다. 생김새도 다르다. 생활 습관도 다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치타 가족은 그 인간을 인정한다. 가까이 다가와도 경계하지 않게 되었다. 새끼들은 인간의 근처에 다가와 장난을 치며 놀고 어미는 태평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그 인간은 치타 가족과 2년간 어울린다.

 

희진과 루이의 관계를 보며 그 영상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 아닐까? 종 자체가 다를진대, 이해 불가능한 서로를 인정한다. 뭐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이해 불가능한 그들은, 공생 불가능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리고 생김새가 달라도 어울릴 수 있음을 증명했다. 영상 속 치타는 인간에게서 경계심을 풀고 인정할 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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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물성이라는 건 새악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왜, 보면 콘서트에 다녀온 티켓을 오랫동안 보관해두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사진도 굳이 인화해서 직접 걸어두고, 휴대폰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와도 누군가는 아직 폴라로이드를 찾아요. 전자책 시장이 성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종이책이 더 많이 팔리고, 음악은 다들 스트리밍으로 듣지만 음반이나 LP도 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죠.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향수로 만들어서 파는 그런 가게도 있고요. 근데 막상 사면 아까워서 한 번도 안 뿌려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대체 왜 어떤 사람들은 '우울'을 사는 겁니까? 왜 '증오'와 '분노' 같은 감정들이 팔려나가죠? 돈을 주고 그런 걸 사려는 사람이 있는 건가요? 애초에, 어떻게 그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사고 싶어 할 것이라고 예상하셨습니까?"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김초엽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평범한 문구류를 만드는 이모셔널 솔리드라는 회사에서 '감정의 물성'이라는 제품을 출시했다.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으로, '공포체', '우울체' 등의 이름을 붙여 판매한다. 감정의 물성을 손에 쥐고 있으면, 그 감정이 올라온다나 뭐라나. 주인공 정하는 회사의 과장광고이자 상술이라며 효과 자체를 부정하고 무시하지만, 감정의 물성은 의외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끈다. 심지어 자신의 오랜 여자친구에게도. 일주일 만에 연락이 닿아 만난 여자친구는 방 안 구석에 앉아 '우울체'를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린다. 정하는 여자친구를 이해할 수 없다. 긍정적인 감정들이라면 미신이라고 받아들일 수라도 있을 텐데, 왜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들까지도 구매하고 소유하려 할까.

 

실제로 감정의 물성이라는 것이 출시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책의 내용처럼 불티나게 팔릴까? 부정적인 감정의 물성들도 정말 수요가 있을까? 처음 책을 읽을 때에는 꽤나 회의적인 생각이었다. 긍정적인 감정의 물성조차도 나는 사지 않을 것이었다. 감정이란 내면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외부의 물성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울체를 사다 놓고 손에 쥐며 눈물을 흘리는 정하의 여자친구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긍정적인 감정들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에까지도 재화를 지불한다. 더운 여름날 가슴이 서늘해지는 공포영화를 관람한다. 연인과 헤어진 후에  술을 마시며 외로움을과 슬픔을 증폭시킨다. 이미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감정의 물성은, 우리가 소비하는 그 부정적인 감정들을 일시적이 아니라 '물성' 그 자체로서 소유할 수 있게 해준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관계가 맺어진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고, 그런 여러 사회적 관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사회 속에서 원만히 남들과 지내기 위해선 나의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내보여선 안된다. 화가 나지만 참아야 할 때도 분명 있다. 슬픔을 속으로 삼켜야 할 때도 분명 존재한다. 싫어하지 않지만 싫어하는 척해야 할 때도 있다. 내 감정은 내 것인데, 다른 이들에게 휘둘러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 감정이 내 감정이 아니게 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내가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이 맞기는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든다면, 다른 존재와 관계 맺음에서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불만이 쌓인다면, 감정의 물성을 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나는 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 봐봐. 지금 그 감정이 내 손안에 있잖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덜 두렵다. 공포는 미지에서 온다. 실제로 감정의 물성이 그 감정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인해, 부적을 사는 행위처럼, 감정의 물성을 사게 되지 않을까.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정하의 여자친구 보현. 이제 조금은, 어렴풋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정하도 소설의 말미에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것들이 많다. 그런 존재들이 많다. 영원히 그럴 것만 같다. 하지만 보아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해하려는 노력' 여하에 따라, 내가 가지는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이해 불가능은 이해 가능성으로 변해간다. 세상에 영원, 절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와 관계의 만남, 타자와 타자의 만남 속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바뀔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

 

책 속에는 소개한 세 가지 단편 이야기 말고도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해해보기- 쯤 되지 않을까. 물론 소외자, 장애인, 여성 등에 관한 이야기로도 풀어나갈 수 있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존재와 존재의 관계 맺음,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 서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여러분을 이해하고자 노력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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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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