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해피 투게더' 구름 사이로 비친 봄 햇살 [영화]

충동에 무릎을 꿇다
글 입력 2021.11.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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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발표된 <해피 투게더>는 1990년대를 풍미한 홍콩의 거장 왕가위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을 적어도 당대 동아시아에서는 강렬했을 게 분명한 게이 캐릭터로 그려가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달릴 수밖에 충동에 대해 질문한다.

 

작품을 끌어가는 상반된 성격의 두 주연 캐릭터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은 모두 논리보다 사랑이란 순간적인 충동을 따르며, 그들의 관계가 그러한 행위를 따라 변화하는 점 또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영화적으로 설명한다.

 

영화는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떠난 보영과 아휘가 이구아수 폭포라는 최초의 목적지로 가는 도중 겪는 다툼과 이별을 시작으로, 이후 그들의 재결합과 또 한번의 헤어짐을 그린다. 그리고 그 사이마다 스며있는 충동적 선택과 갈등의 결과를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 크레딧 직후의 베드신, 이구아수 폭포라는 다소 뜬금없는 목적지, 고속도로 위 갑작스러운 이별은 모두 설명을 배제하며 마치 당연한 질서인 양 전개된다.

 

관객은 내러티브 속 행위에 전제되어야 할 이유를 찾을 새도 없이, 웬 동양인 커플이 헤어진 후 호객꾼과 고객으로 조우하는 상황으로 이끌린다. 심지어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낯선 도시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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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부는 충동성을 기초로 전개된다. 보영은 우연히 아휘의 가게를 방문하며 그 뒤의 몇 사건들도 그저 제시될 뿐이다. 아휘의 플래시백이 영화의 초반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 역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바로 충동의 성질을 표상한다. 플래시백이 보여주는 것은 과거이기 때문이다.

 

과거란 이미 결정된 시간으로 인간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다. 마치 인간이 시달리며 겪는 방법 외에는 해결할 수 없는 상태, 충동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이유가 어떠하든 아휘의 기억을 따라간다. 행위의 인과가 명확히 제공되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이미 벌어진 사건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휘의 보이스오버를 곁들이며 러닝타임을 따라가던 관객은 20분을 넘겨서며, 그들이 따라온 길이 아휘와 보영의 자취라는 것을 무기력하게 깨닫는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부터 '충동'의 본질을 명확히 짚는다.


충동의 성질과 그를 이겨낼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은 아휘와 보영을 통해 두 번 제시된다. 우선 16분경 제시되는 아휘의 뒷모습 쇼트이다. 바에서 아휘를 본 보영은 전화를 걸어 아휘를 자신의 방으로 부른다. 그러나 아휘는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하는 보영에게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을 후회한다'고 소리친 뒤 공간을 벗어난다. 이후 밤거리를 거칠게 내달리는 아휘의 모습이 이어진다. 해당 쇼트는 핸드헬드를 활용한 팔로우 쇼트 촬영되어 있기에 아주 거칠고 빠르게 제시된다. 보영은 침대 위 홀로 울고 있을 뿐이지만 아휘는 범죄 현장에서 벗어나듯, 마치 자신을 쫒는 누군가에게 도망치는 양 가쁜 호흡으로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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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곧 도주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보영이라는 옛 연인과 흘러간 기억의 상처로부터 근원하지 않는다. 아휘는 자신을 옭아맬 것이 분명한 충동으로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을 맹렬히 덮쳐오는 충동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프레임이 담는 것은 결국 보영을 사랑하고 말리란 충동에서 벗어나려는 아휘다. 이런 의미에서 해당 쇼트는 동시에 충동의 시점 쇼트가 된다. 무자비하고 강렬한 '충동'이 감히 자신을 벗어나려는 나약한 인간을 추격하는 시각인 셈이다.

 

과거의 헤어짐으로 잠시간 멀어졌던 충동이 다시금 아휘를 잡아채고자 그를 위협하는 것이기에, 영화 속 아휘의 뒷모습은 급박하고 처절하다. 그러나 발버둥이 무색하게도 아휘는 곧 충돌에 붙잡힌다. 아휘는 냉정한 말이 무색하게도 피투성이가 되어 자신을 찾아온 보영과 포옹한다. 병원의 복도, 다시 시작하자는 보영의 말에 아휘는 그저 침묵한다. 그러나 더치 앵글은 연인이 아닌 둘의 상태가 문제라는 듯, 좁고 긴 공간감으로 나란히 앉은 둘의 모습을 담는다.

  

더치 앵글이 사용된 이 쇼트가 영화의 마지막 흑백 쇼트라는 점 또한 흥미롭다. 직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쇼트 속, 모든 요소는 곧바로 색을 얻는다. 여유롭고 부드러운 전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영화는 색을 얻는다. 아휘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충동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외면했던 인간의 본성을 마주했기에 영화는 당연히 색을 회복하며 그에 필요한 시간은 인정되지 않는다.

 

관객은 그렇게 색으로 뒤덮인 스크린과 마주한 채 연인의 재결합을 인지한다. 더하여 색의 인지는 곧 플래시백의 인지다. 침묵으로 일관하나 아휘는 택시 속 자신에게 머리를 기대오는 보영을 거부하지 않는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금 사랑에 무릎 꿇은 둘을 보며 관객은 이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것임을 직감한다. 이유 없이 전개되던 사건의 연속이 사실 흘러간 아휘의 기억이었음을, 그가 다시 사랑을 마주하며 과거를 살피던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긍정의 모습에도 카메라 무빙이 함께한다. 보영이 눈을 감으며 머리를 기대는 순간, 측면을 담던 카메라의 앵글은 정면에서 촬영된 투쇼트로 전환된다. 즉 카메라는 아휘와 시선을 마주한다. 그리고 보영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아휘의 눈동자와 함께, 프레임 역시 위아래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는 곧 보영을 향한 사랑이란 충동에 패배한 아휘의 떨림이다. 통제불능의 충동, '파토스'가 마침내 아휘를 사로잡은 것이다. 앞서 카메라는 달리는 아휘의 뒷모습을 거칠게 따라갔다. 피할 수 없고, 견뎌야만 하는, 사랑이란 충동으로부터 아휘가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메라는 그를 쫓아 움직였다. 그러나 택시 안, 카메라는 고정된 채 그를 응시한다. 아휘가 감정을 시인함을 넘어 자신의 감정 앞에 바로 섰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그를 따라 움직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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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충동의 인정이 곧 충동의 통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다머는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특정한 주체나 주관의 의지가 활동에 환원되지 않을 수 있음을 '생기'라고 설명한 바 있다. 행위가 곧 장악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뜻이다. 여권을 숨겨 보영을 붙잡아두고자 했던 아휘의 행동이 끝내 악수로 돌아간 점 역시 이를 증명한다. 사랑에 빠져든 둘은 결국 상반된 성격을 극복하지 못한 채 두 번째 이별을 맞이하며, 아휘는 홀로 이구아수 폭포를 올려다보며 사랑을 추억한다. 이어 스크린은 이구아수 폭포의 전경을 제법 긴 시간 보여준다. 이는 곧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강대한 힘, 충동의 단적인 형상화이다. 영화의 말미 아휘는 애초 도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다.

 

사실 충동의 승리는 영화의 시작부 이미 제시되었다. 비록 아휘는 최초의 계획처럼 보영과 함께 이구아수 폭포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영화는 버즈 아이 뷰를 통해 관객에게 거대한 폭포를 약 10초 간 보여주었다. 폭포라는 대자연으로 형상화된 시달림의 섭리, 충동이 이미 영화의 시작부터 전제되어 있었기에 아휘와 보영이 경험한 사랑의 고뇌는 당연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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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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