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이라는 대화,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 [문화 전반]

소외됨 없는 대화를 질문하기 위해
글 입력 2021.11.17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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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적 올바름은 '올바름'에 던지는 질문이다


 

정치적 올바름 혹은 'PC 함'은 거의 조롱거리가 되어가는 듯하다. 사람들이 쉽게 웃어넘기는 것들에 대해 정색하고 딴지를 거는 모양새가 '웃을 준비가 된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코믹하게 비치기 쉽기 때문이다. "B 사감과 러브레터"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연애편지를 검열하면서도 혼자서는 러브스토리에 심취해 모노드라마를 연출(?)하는 'B사감'이 정치적 올바름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 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PC 함을 옹호하는 측에 의하면 정치적 올바름이 경직된 엄숙함을 고수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간에 굳어진 '올바름'에 질문을 던지는 태도가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말하고 듣는 말, 딱 그만큼이 우리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우리의 언어에 무의식적 편견이나 대상화, 구분 짓고 배척하는 태도가 있음을 자각하자는 관점이다. 담화 활동에 쓰이는 '기호'가 언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도로에서 빨간색 표지판만 보아도 '정지, 주의, 혹은 경계' 신호임을 알아차릴 수 있듯이 시각이나 청각적 이미지 또한 넓은 범주에서 언어의 확장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문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말하는 언어 가운데 그것이 '누군가를 찌르는' 표현인지도 모른 채 쓰이는 경우이다. 여기에서 예외인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인습적인 것이 보통의 삶, 표준적인 삶이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오히려 '무엇이 진정 올바른가?'에 대한 질문이다.

 

 

 

2. 예술의 정치적 올바름 논쟁

: 최인훈에서부터 검정치마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논쟁은 예술작품에서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사상계에 탈식민주의가 대두된 이후 기존의 고전이 서구중심주의의 산물임을 지적하는 비판이 잇따랐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영문학을 대표하는 정전 (canon)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인종차별주의와 가부장적 사고는 오랫동안 간과되어 왔다. 샤일록은 음흉하고 오셀로는 멍청하게 그려지는 동안 극의 실타래를 푸는 것은 현명한 서구인들이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모든 것은 '가정사'일 뿐!) 폭력을 코미디 속 활극으로 흐려버리지 않았던가. 올해 출간된 "제국의 정전 셰익스피어"는 (이경원 저, 한길사) 일관된 논리를 따라 셰익스피어 비판을 선명하게 정리했다.

 

한국문학의 경우, 최인훈은 어떠한가? 문학사적 기념비로 손꼽히는 "광장"(1960)이나 "회색인"(1963)은 이데올로기의 모순과 정치 사회적 삭막함에 좌절하는 개인을 긴장감 있게 그렸지만 읽는 이의 맥을 빠지게 하는 대목이 군데군데 나타날 때가 있다. "광장"은 분단 체제의 엄혹함에서, "회색인"은 전쟁 이후의 아노미 속에서 사랑의 무게를 깊게 고민한 작품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이 실망스러울 만큼 일관되어 있다. '성녀 혹은 창녀'라는 나이브한 도식이 반복되는 와중에 작품이 사랑을 진지하게 고민하면 할수록 독자는 그것이 관념적인 누각에 불과한 게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된다. 사랑에 관한 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명한 것은 사랑이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최인훈과 당대 문학을 비판적으로 되짚는 학술연구 사례가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인훈 문학의 사유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의식을 응시한 것임은 부정하기 힘들다. 앞서 제기되는 비판은 작품의 치열한 사고-실험을 스스로 가려버리는 어떤 ‘태도’에 관한 것이다. 문학이 이야기의 방식에 관한 기술이라면, 미술이 보는 방식에 관한 기술이라면 ‘<무엇>을 보는가 / 말하는가’ 만큼이나 <어떻게>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창작자가 작품을 내놓기까지 공을 들이는 비중은 <어떻게>가 압도적이지 않을까. 그 과정에 영향을 주고받았을 시대적 징후를 포착하는 일이 정치적 올바름을 제기할 때 얻을 수 있는 소득일 것이다. 작가 한 명의 무의식을 굳이 들추고 검열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검정치마의 “Thirsty"가 (2019) 여성 혐오 논란을 빚었을 때 2020 한국대중음악상은 이 앨범을 ‘최우수 모던록 음반’에 선정하며 다음의 심사평을 남겼다. “특정 이념에 기댄 ‘틀린질문’으로 예술가의 표현할 자유를 농락한 이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판단과 해석의 자유로 이 앨범에 오명과 누명을 덧씌웠다.” 소신에 따라 비평적 옹호를 하려는 것이었다 해도, 그때의 비판을 ‘틀린 질문’으로 일축하고 만 것이야말로 비평가로서 틀린 방식의 지지가 아니었을까. “진지한 작가주의 음반”이야 언제든 경청 받을 만하겠지만 경청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다양한 관점에 열려있을 때이다.

 

 

 

3. 예술이라는 대화에서


 

대화에서 오해만큼 슬픈 일은 누군가 소외되었을 때이다. 가벼운 말로 소비되는 누군가,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누군가,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 누군가. ‘정치적 올바름’이란 말이 여전히 거부감(!)이 든다면 누가 대화에서 소외되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일이라고 이해한다면 어떨까. 살피는 일은 본래 불편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세상 모든 것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인간의 속성 탓인지, 때로는 그게 의미 있는 ‘판’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최근 여자 야구라는 주제를 통해 저마다의 ‘마운드’를 돌아보게끔 하는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다. 문화예술 연구진 ‘턱괴는여자들’이 수행하는 “외인구단 리부팅”이다. <왜 마운드에는 여성 야구선수가 없나>라는 질문으로 출발해서 그간 우리의 상상 속에 여성 야구인의 이미지가 부재한 내력을 들여다보고 있다. “현대미술 플랫폼 아트시 Artsy에서 '야구'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447개의 결과가 나오는데, 이 중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은 단 7개이다. 그중에서도 여성이 '선수'로 등장하는 작품은 단 1개뿐이다.” 뉴스레터를 발행하며 ‘와사비 맛’ ‘핵불닭볶음면 맛’ 연구라고 자평했지만 나는 이 프로젝트에서 건강한 소금을 맛보는 기분이다.

 

세상 어느 것 하나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도 마찬가지이다. ‘미안한 마음’이라는 의미를 전하려면 ‘사과’라는 단어를 빌려야 한다. 그게 듣는 이에게 잘못 전달될 수도 있다. (‘과일’ 사과) 말과 의미가 일대일대응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언어의 불완전함이 비롯된다. 누군가는 이 빈틈에 착안해 ‘사과’를 두고 중의적인 언어유희를 벌이기도 한다. (혹은 그것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아마도 예술은 이 빈틈을 더욱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게끔 하는지도 모른다. 스타일을 창안한다는 것은 빈틈을 보는 그만의 렌즈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감상하는 안목을 기른다는 것은 빈틈에 대한 ‘게임의 규칙’을 잘 이해하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일상적인 소통과는 다를지라도 예술 역시 대화의 하나일 것이다. 혹은 대화에 대한 갖가지 반추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대화가 소외됨 없이 저마다 놀 수 있는 ‘작난’이기를 바란다.

 

 

[김경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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