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요한 것들의 냉장고 [미술/전시]

글 입력 2021.11.04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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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에게,


고양이에게 침대 반쪽을 내어주는 계절이 왔어. 평소에는 올라오지도 않으면서, 날이 쌀쌀해지면 침대에 늘어지더라고. 그래서 요즘은 뚱한 표정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고양이와 하루를 시작하고 있어.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게 좁혀진 거리감으로 느껴진다. 너도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날이 추워지기 전이 지금이라는 친구의 말에 바다에 갔어. 물론 언제나처럼 날씨와 여행의 타이밍은 완벽히 어긋났어. 우리가 바다에 갔던 날도 비가 몰아쳤잖아. 이번에도 떠난 날이 제일 추웠거든. 내내 하늘은 비가 올 둥 말 둥 흐린 낯이었고. 그래도 오랜만의 바다는 좋았어. 한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들을 바라봤어. 청량하던 바다가 검어질 때까지 들여다보다 왜 물에 홀린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다며 얼굴을 마주 볼 친구도 있었어. 그런데 낭만도 바람 앞에서는 사치더라. 진짜 추웠어. 그때 벌벌 떨면서 숙소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독한 감기에 걸려있었을 거야.


다음 날도 바다를 보려고 했는데 이틀 만에 질려버렸어. 시내에 갔어. 우연히 네가 추천해 준 시집을 샀다. 다시 돌아와 파도를 배경 삼아 읽었어. 네가 왜 그렇게 이 시인을 사랑하는지 알겠더라. 잠잠하지만 다정한 문장들이 조금씩 밀려와서 너도 이쯤 밑줄을 치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러다 한 시구에 잠시 멈췄고 이 편지를 쓰고 싶어졌어.


— 어떤 말은 오래오래 잊히지 않습니다. 고요한 것들이 고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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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전동에 오래된 우체국이 하나 있는 거 알아? 정확히는 우체국이었던 곳인데 지금은 전시장으로 운영하고 있거든. 뼈대가 고스란히 남아서 그런지 과거와 현재의 틈새에 걸려 있는 인상이야. 나도 이름만 알고 있다 한 번 가본 거였지만.


내가 갔던 9월에도 전시가 열리고 있었어. <당신을 향해 뻗은 선>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전시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더라. `이 전시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선 위에 있습니다.`


무슨 소릴까 싶었지.


`환대, 라고 누군가 발음했을 때 그 감각은 우리를 진동시키며 아주 멀리에 있는 어떤 선 위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다른 존재에게 얼마나 열려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선으로 구분한 이쪽과 저쪽 중 어느 한쪽이 아니라 떨리며 이동하는 선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게 되는 단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전처럼은 다시 살 수 없게 되는 어떤 순간에 대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힘에 대해.`


아마 지금 너는 그때의 나와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이 글을 누가 썼는지 한참 뒤졌지만 이름 석 자를 알 수 없던 게 아쉬웠던 기억이 나. 평범한 전시 소개라기엔 사람을 울렁이게 하는 글이었으니까. 머리카락이 쭈뼛 섰어. 더듬거리며 문장을 다시 훑고, 나도 조용히 단어를 진동시켜 봤어. 낯선 기분이 들었던 건 환대라는 단어를 내가 영영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더라. 나는 한 번도 무언가를 환대해보지 못한 사람이었는지 몰라. 순식간에 부끄러워졌어.


전시장 구석에 냉장고가 보였어. 우에타 지로의 <2g>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어. 너도 상상해 봐. 희멀건 벽 사이로 우두커니 냉장고가 서 있는데, 문짝에는 덕지덕지 영수증이 붙어 있고, 바닥에는 버석하게 접힌 색종이가 가득한 거야. 대체 뭐 하는 작품인가 싶었어.


가까이 다가갔을 때 냉장고 문을 열어도 된다는 글자를 읽었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나밖에 없었거든. 궁금하면 내가 열어야 했어. 문을 연다는 건 항상 어떤 공포를 동반하잖아,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꺼림직한 마음을 다독이며 손잡이를 당겼어. 무언가 후두둑 떨어졌어.


돼지였어. 직접 종이로 접은 돼지. 냉장고 속이 전부 종이 돼지로 가득 차 있던 거야. 문을 당기다 나도 모르게 밟아서 흐트러진 종이 돼지들의 모습이 보였어.


사실 나한테 돼지로 가득 찬 냉장고는 익숙한 광경이야. 할머니랑 같이 살 때는 더 그랬는데 우리 집은 늘 아침저녁으로 고기를 먹었거든. 할머니는 정말 매일 고기를 구웠어. 식구들 취향에 맞춰서 거의 돼지였고, 자주 닭이었고, 종종 소였어. 당신께서 가난했기 때문에 손주들은 잘 먹이고 싶었던 마음이었을 거야. 그렇게 자란 나는 매끼 고기를 먹는 것에 익숙했어. 스무 살이 되어 따로 살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텅 빈 냉장고에 이번에는 엄마가 돼지를 꼭꼭 채워두더라. 요리도 못하는데 배곯지 말라고 고기나 잘 구워 먹으라 이거지. 결국 다시 돼지였어.


우리가 가볍게 들고 냉장고에 넣는 돼지의 무게는 2g이라고 해. 이 작품의 제목은 거기서부터 시작해. 우리가 짊어진 돼지의 무게. 한국에서는 1시간마다 2,092마리의 돼지들이 사라진대. 사라진 돼지들은 잘게 조각나 여러 냉장고에 도착할 거야. 그 돼지들은 분명히 죽어있지만, 살아있었을 때만큼이나 생생하게 윤기가 흘러. 이 상태를 완벽하게 죽어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작가의 말을 읽었어. 우에타 지로는 살을 먹지 않게 되면서 그 돼지들을 상상하게 되었대. 피부는 어떤 느낌이었을지, 살아있었을 때 온도는 어땠을지, 얼마나 상냥한 눈빛을 갖고 있었을지. 그리곤 탐스럽게 오일을 머금은 종이 돼지들을 접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우리를 기다리게 한 거야.


인간이 종이를 먹지 않아서인지 나에게 그 광경은 맛있는 음식으로서의 돼지가 아니라 살아 움직였을 돼지를 떠올리게 했어. 냉장고를 열었다 닫으면서 떨어지고, 뭉개지고, 휩쓸리는 종이 돼지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먹히기 위해 키워져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로 냉장고에 들어왔다가, 입 안으로 떨어져 뭉개지고 휩쓸려갈 돼지의 모습으로 이어졌어. 몇 번 이와 이가 부딪히고 목이 꿀꺽하고 넘기면 아무것도 없었다는 마냥 사라지겠지. 허공에 잠깐 떠돌 맛있었다는 말과 함께.


우리는 돼지에게 환대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


그게 작가의 마지막 말이었어. 누군가는 돼지의 상냥함에 대해 상상하고, 종이 돼지의 환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쓸모없는 짓이라고 할지 몰라. 정말 무의미한 생각일 수도 있어. 어차피 우리가 먹기 위해 키워내는 중인데 그걸 생각하는 것이 더 불쾌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럼 인간은 뭘 먹고 살라는 거야? 하고 화를 낼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 작품을 본 뒤로 돼지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 앞에 섰을 때 머뭇거리게 돼. 돼지를 접은 작가의 마음과 돼지의 온기를 생각해보게 된 거야. 머뭇거리는 날들이 쌓일수록 돼지를 먹는 건 매일이 며칠이라는 단위로, 가끔은 주라는 단위로 바뀌었어.


서문에서 읽었던 글이 떠올랐어. 떨리며 이동하는 선과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단절. 그건 나를 둘러싼 당연함에서 당연하지 않은 것을 찾아냈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말이 길어졌지. 거창한 얘기를 하려고 쓴 편지는 아니야, 또 나는 여전히 고기를 먹고 있으니까. 더 할 수 있는 말도 없어. 그냥 나는 내 침대 위의 고양이를 넘어서, 등을 맞대고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을 더 많이 상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네가 생각났어. 너는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내일을 걷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꽤 오래전에 네가 채식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생각나. 다시 돌아간다면 우리는 조금 다른 대화를 했을까?


때로는 조용한 목소리가 오래오래 잊히지 않을 때가 있고, 고요한 움직임이 꼭 고요하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어. 몇 년 전 너와의 대화와 냉장고 속의 종이 돼지들을 헤매고 있어. 나는 여전히 고요한 것들의 선 위에 서 있어.

 

 

또 편지할게.

 

 

*이제니의 시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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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타 지로, <2g>. 유기농 오일, 색종이, 2021.

 

 

[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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