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리가 맥머피를 응원하는 이유 - 혐오의 시대 #2

글 입력 2021.10.3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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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혐오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 안에 혐오를 만들어 낼까? 대부분의 경우, 그 시작은 편견에서 비롯된다. 허나 모든 편견이 반드시 혐오로 이어지진 않는다. 여기엔 두 가지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두려움이 낳은 분노’다. 영화 <스타워즈>의 유명한 말마따나 두려움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증오를 낳고, 증오는 고통을 낳는다. 두려움이 낳은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또한 우리가 왜 그를 미워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게 만든다. 덕분에 혐오의 불길은 쉽게 번지고,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내가 지난 시간에 내린 결론이다. 오늘은 편견을 혐오로 만드는 두 번째 조건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혐오를 만드는 두 번째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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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우연한 계기로 정신병동에 가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맥머피’가 범죄자라는 것이다. 그는 본래 교도소로 가야 했지만 보다 편한 수감 생활을 위해 광인 행세를 하여 정신병동에 오게 되었다. 한편 영화 속에서 맥머피와 대립하는 ‘래취드’ 간호사로 대표되는 정신병동의 의료진들은 환자들을 능숙하게 돌보며 성실하게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는 엘리트 직업인으로 그려진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이 영화의 빌런은 누가 봐도 맥머피다. 그는 사사건건 의료진들에게 반항하며 그들의 업무를 방해한다. 심지어 그는 15살 소녀를 성폭행하고 수감 생활을 편하게 하겠다는 이유로 광인 행세까지 했으니 관객들이 맥머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맥머피의 선동에 쉽게 동참하는 환자들의 모습 역시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러한 인물들의 관계는 서서히 역전된다.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줄 알았던 의료진들은 사실 엄격한 규율과 권위를 통해 환자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있었다. 특히 래취드는 환자들을 치료하기보다는 학대에 가까운 행동을 통해 이미 병원 내에서 환자들에게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일례로 그녀는 불안 장애가 있는 ‘빌리’가 이상 행동을 보일 때마다 어머니에게 이르겠다고 협박하는데 이는 정상적인 간호사의 모습이라 보기 어렵다. 또한 인디언 추장과 맥머피의 사례를 비추어 봤을 때 이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남용해 멀쩡한 사람들도 강제로 정신병동에 입원시킨 적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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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이러한 부분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게 바로 월드 시리즈와 관련된 장면이다. 어느 날 맥머피는 래취드에게 자신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월드 시리즈 경기를 놓쳐 본 적이 없다며 일과표를 바꿔 야구 경기를 시청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래취드는 투표를 통해 해결하자며 야구 경기를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손을 들라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환자들에게 눈빛을 통해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결국 래취드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환자들은 손을 드는 것을 포기하고 맥머피의 요구는 묵살당한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래취드는 정신병동 바깥에서 우리가 처음 그녀에게 느꼈던 것처럼 굉장히 능력 있는 간호사로 대접받을 것이다. 아마 그녀 역시도 스스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치료가 아니다. 그녀는 치료, 혹은 민주주의를 그럴듯한 포장지로만 사용할 뿐, 실제로는 환자들을 자신이 생각하는 질서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이를 거부하면 학대를 가한다. 말하자면 환자들에게 자신의 이상을 억지로 강요하는 셈이다. 여기엔 환자들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려는 어떤 노력도 수반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걸 치료가 아닌 ‘지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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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프롤로그에서도 이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악에도 나름의 계보가 있다. 시대에 따라 악惡은 자신의 얼굴을 수도 없이 바꿔왔다. 가령 고대 시대에는 천재지변, 귀신, 무서운 짐승 등이 악을 담당했다. 이들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힘을 통해 인간의 목숨을 위협했고, 사람들은 제사 등을 통해 통제할 수 없는 악을 달래고자 노력했다.

 

한편 종교의 영향력이 극대화되던 중세 시대에 이르면 악마나 지옥 같은 종교적인 관념이 악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근대 시대엔 여러 사회 문제들이 대두하면서 각종 범죄자들이 악의 자리를 대체했다.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수많은 혁명들을 거쳐온 20세기에는 히틀러의 나치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이 악을 자처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악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아마 여러분은 그 정답을 이미 눈치챘을 것 같다. 괜히 초장부터 영화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다. 물론 다른 의견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적어도 나에게 21세기의 악은 바로 ‘독선’, 일명 ‘자기의심 없는 정의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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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쓴 <광기의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르네상스 이후 신 중심의 사유가 쇠퇴하고 과학적 사유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이성’과 반대 개념인 ’비이성‘을 중심으로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때 광기는 비이성과 강력하게 연결되었으며, 정상적인 사회의 도덕, 윤리, 질서 등을 배반하는 비정상체로 인식되었다. 쉽게 말해 이성-비이성의 대립구조가 곧 정상-비정상의 대립구조로 전환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권력자들과 지식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이들은 비이성, 혹은 광기의 의미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수행했는데 이는 상당히 교묘한 전략이었다. 푸코에 따르면 의미, 진리, 가치, 도덕, 선 같은 개념은 사실 삶의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그렇다고 믿을 뿐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아닌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의 전략적인 결과물이다. 소위 말하는 이데올로기, 담론, 프레임 같은 것들 말이다.

 

가령 상갓집에서 춤을 추는 이를 만났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십중팔구 그를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을 하는 우리의 내면엔 광기에 대한 이론적인 개념이나 내가 왜 이 말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통찰, 가치 판단 등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그저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의 이항대립적 사고에서 비롯된 직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나아가 이러한 판단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는 판단으로도 이어진다(푸코는 이를 언술적 의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독선’이 출발한다. 세상을 이성과 비이성으로 보기 시작한 사람들은 광기를 비정상적인 것이며 따라서 사회에 함께 있을 수 없고 억압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다. 덕분에 광인들은 유럽 전역에 지어진 감금 시설에 유폐되어 야만적인 대우를 받았다. 물론 18세기 무렵 ‘인권’이라는 개념이 대두하면서 광인들의 처우는 조금씩이나마 나아졌지만 그것이 그들의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광기를 격리가 아닌 치료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허나 여기서 말하는 치료는 소위 정상이라 불리는 삶의 양식을 광인들에게 억지로 주입하는 것에 더 가깝다. 앞서 말한 래취드의 행동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또한 이러한 치료의 방식은 광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잘못되었다는 죄의식과 열등감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죄의식과 열등감은 환자들이 스스로를 감시하고 정신적으로 유폐하게 만든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비정상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비정상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갖가지 방식을 통해 길들이고자 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21세기의 악을 자처하는 독선의 참모습이다. 그리고 이 독선이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혐오를 만드는 두 번째 조건이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된 사례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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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 내에는 반공 정서가 빠르게 자리 잡았다. 당시 미국의 상원 의원이었던 조지프 매카시 등은 중국의 공산화를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자신에게 미국에서 활동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근거 없는 헛소문에 불과했지만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은 매카시의 선동에 쉽게 반응했고 전국적으로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 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열풍 속에서 중심에 있었던 게 HUCA, 일명 반미활동조사위원회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은 헐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들의 공산주의적 색채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영화감독, 작가, 배우, 제작자 등이 청문회에 소환되어 곤욕을 치렀다.

 

어이가 없는 건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미국 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이 불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중반만 하더라도 미국 내에서 공산당은 하나의 정당으로 당당하게 존재했다. 따라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산당에 가입했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오로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만 옳다는 독선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애꿎은 사람들이 탄압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헐리우드 블랙리스트라 불리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300명이 넘는 영화인들이 피해를 보았다. 그들 중 일부는 청문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회모독죄로 기소되어 작품 활동이 일체 중단되었다. 기소되지 않은 이들도 언론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모여 전 국민적인 비난을 받으며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휴일>을 쓰고, 아카데미에서 작가상을 수상한 달톤 트럼보가 이 사건의 대표적인 피해자다. 찰리 채플린 역시 공산주의자로 몰려 헐리우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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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아일보

 

 

한편 지난 8월, 각종 커뮤니티에는 ‘체크페미’라 불리는 사이트의 링크가 올라왔다. 이름 그대로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국내 유명 인사들의 페미니즘 사상을 자체적으로 검증하는 사이트다. 해당 사이트의 운영자는 공지 글을 통해 유명인들의 과거 행적을 근거로 페미니스트 의심, 확정, 선봉 등의 등급으로 나누어 유명인들의 개인 정보와 함께 게시했다. 이에 해당 사이트는 곧바로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오픈 하루 만에 게시물 전체가 삭제되더니 접근이 불가능해졌다.

 

고작 하루 동안의 헤프닝이었지만 이것이 가져다준 여진은 길었다. 이 사건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준 일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현재 대한민국은 페미니즘을 혐오한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짧지만 거기에 대한 반감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거기다 이번에는 앞서 언급한 헐리우드의 블랙리스트를 연상시키는 듯한 일까지 발생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018년,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은 팬미팅 현장에서 최근 읽었던 책에 대해 묻는 질문에 <82년생 김지영>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 논란에 휩싸였다. 에이핑크의 손나은 역시 ‘Girls can do any thing’이라는 문구가 적힌 핸드폰 케이스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역시 페미니스트 논란에 휩싸였다. 최근엔 4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여성 유튜버의 썸네일에서 특정 페미니즘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시그니처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해당 유튜버가 사과와 함께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님을 선언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페미니즘에 찬성하고 반대하는 건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다. 다만 그 자유가 이런 식으로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쥐고 흔든다면 그건 문제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다 보면 지난 20세기의 군사정권 시절을 보는 것 같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곤 당시엔 검열의 주체가 국가였다면 오늘날엔 시민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서로의 말과 행동을 검열하고 비판한다. 중국이나 북한의 공산당을 뭐라 할 게 아니다. 지금 당장 우리 안의 독선이 보여주는 풍경이 더 심각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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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시스

 

 

그렇다면 오늘날 페미니즘이 혐오의 대상이 된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 번째 이유는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초기 이미지 구축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단순히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주장하는 개념을 넘어 남성 혐오주의, 혹은 여성 우월주의의 일종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이와 관련한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20~30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이유로 ‘남성 혐오’가 38%를 차지했다.

 

다만 여기에는 자의적인 부분과 타의적인 부분이 함께 존재한다. 일단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자극적이고 과격한 발언이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허나 언론과 미디어, 정치인 등과 같은 시회 시스템도 책임은 있다. 가령 언론의 경우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과격한 발언과 페미니스트가 남자아이를 성폭행 했다는 둥의 음모론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기사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굳어진 건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언론에서 비춰진 일부의 단면이 페미니즘 전체를 대표하는 일반화의 오류가 발생한 셈이다.

 

한편 두 번째 이유는 보다 근원적이다. 앞서 말한 공산주의 색출 열풍과 페미니즘 혐오를 다시 한번 비교해 보자.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우선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의 경우, 당시 미국의 시민들은 냉전을 겪고 있었고 소련과 핵무기라는 실질적인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6.25 전쟁 등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은 안타까운 비극의 역사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 당시 광기와도 같았던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에는 나름대로 정상을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다는 것이다.

 

허나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어떠한가? 사람을 죽였나? 테러를 일으켰나? 폭동을 일으켰나? 그것도 아니면 국가 전복을 꿈꿨나? 어느 쪽도 아니다. 그저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각은 기존의 체계에 적응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마치 처음 먹어보는 음식처럼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킨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첫 번째 이유가 결부되면서 정상-비정상의 이항대립적 사고가 개입하고 ‘페미니즘은 옳지 않다’는 명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들에겐 자기의심의 여지 없이 페미니즘을 혐오할 수 있는 명분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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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천인권영화제 블로그

 

 

한편 이러한 자기의심 없는 정의감(독선)의 영향력은 다른 혐오에서도 발휘한다. 지난 23일, 인천에서는 퀴어 축제가 진행되었다. 물론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유인즉 코로나 감염 확대의 위험이 있다는 건데 사정을 따져보면 꽤 웃기다. 일단 이번 행사는 코로나 시국을 감안하여 퍼레이드 등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줌(Zoom)을 통한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만약 영화제가 문제라면 부산 국제 영화제를 포함하여 전국의 모든 영화제를 반대했어야 맞다. 더군다나 지금은 위드 코로나로 나아가고 있는 단계가 아닌가. 구태여 퀴어 축제와 퀴어 영화제만 콕 찝어 반대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사실상 핑계에 불과하다. 진짜 이유는 퀴어가 부도덕하고,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성 간의 연애만이, 타고난 성별대로 사는 것만이 정상적이고 옳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말한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의 대립적 구조의 연장선, 즉 독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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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경제

 

 

작년 2월에는 숙명여대에서 트렌스젠더의 입학을 반대하는 일이 있었다. 이유인즉 그녀가 이전에 남자였기에 깨름칙하고 불안하다는 건데…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트렌스젠더가 범죄자, 범죄예정자, 이상성욕자, 정신이상자와 동일선상인 건지 씁쓸한 의문이 남는다.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자신이 찾고 싶었던 자아를 찾은 사람들일 뿐인데 말이다.

 

한편 이 사건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부분도 있었는데,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그녀의 숙명여대 입학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뉜다. 우선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남성이었던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남성 트렌스젠더의 입학이 여성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트렌스젠더리즘이 가부장적 자유주의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 남성의 권위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들에 대해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첫째,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전에 낙태죄 폐지는 자기 몸 결정권을 위한 당연한 조치라고 환영하면서 정작 자신의 성별을 선택할 권리는 왜 인정하지 않는지. 둘째, 트렌스젠더의 입학이 여성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했는데 이미 한국 사회에서 대표적인 혐오의 대상이 된 그들이 어떻게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고, 사회적 강자가 될 수 있는지(그녀들이 이전에 남자였기 때문이라는 핑계는 대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들이 말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 권력 강화에 도움을 주는 트렌스젠더들이 왜 비난을 받고 범죄자/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아왔는지를 설명해야 할 테니).

 

사실 이러한 부분은 한국 내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지적을 받아왔던 문제이기도 하다(혹자는 한국의 페미니즘을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페미니즘이라 평가한다). 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약자에게서 출발한 철학이다. 약자의 권리를 위해 발언하고, 약자의 권리를 위해 행동한다. 다만 그것이 처음 발동했을 땐 그 약자가 우연히도 여성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페미니즘은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약자들에겐 무관심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난민 문제다. 우리는 이미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전쟁터와 폐허에 남겨진 여성과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잘 알고 있다. 가난, 살인, 폭력, 성폭행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위험들이 페허 속에 남겨진 이들의 삶을 위협한다. 허나 적지 않은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이 처한 실존적인 위험을 외면하고, 그들의 유입을 반대한다. 이는 약자를 위한 철학인 페미니즘과 철저히 대비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18~19세기 유럽에서, 낮에는 함께 여성의 참정권과 여성 권리의 옹호를 위해 발언하고 행동했던 귀부인들이 밤에는 실수로 부엌에서 접시를 깨먹은 흑인 하녀의 뺨을 때렸다는 일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출처 - <닥터 프로스트>

 

 

네이버 웹툰 <닥터 프로스트>를 보면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손잡이가 없는 칼날을 쥐고 있는 거라고들 하죠. 누군가를 공격할 때 쓰이는 감정이지만 쓸수록 자신도 파괴되는…“ 따라서 일반 사람들에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동시에 나에게도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되묻는다. 그/녀를 왜 미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질문은 일종의 브레이크가 되어 우리 안의 미움을 통제한다.

 

하지만 만약 이 칼날에 손잡이가 생긴다면 어떨까. 그때부턴 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자기 자신이 상처 입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말하자면 브레이크가 사라지는 셈이다. 이때 자기 의심 없는 정의감, 즉 독선은 칼날의 손잡이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혐오를 만드는 두 가지 조건에 대해 알아 보았다. 두려움이 낳은 분노와 자기 의심없는 정의감. 두려움이 낳은 분노는 혐오라는 폭주 기관차의 연료가 되고, 자기 의심없는 정의감은 기차의 브레이크를 제거한다. 문제는 이러한 분노와 정의감들이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는 것이다. 지금 글을 쓰는 나에게도 있을 수 있고,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여전히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이 다음은 이러한 분노와 정의감이 가져온 우리 사회의 혐오의 풍경을 직시할 차례다. 혐오는 어떻게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되었을까. 만연해진 혐오는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까. 왜 우리는 혐오의 시대를 직시해야만 하는 걸까.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대관절 무엇일까. 어쩌면 그 정답을 이미 반쯤은 예상하고 있을지도.

 

 

참고문헌

1. 닥터 프로스트 (이종범 作)

2. 광기의 역사 (미셸 푸코 作)

3.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 (에노모토 히로아키 作)

4. 나쁜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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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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