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진실, 혹은 진실이어야 하는 것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글 입력 2021.10.2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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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극을 논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바로 '카타르시스'(katharsis)다.

 

 

[크기변환]소포클레스.jpg

고대 비극의 대표작,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

 

 

그리스/로마 신화를 바탕으로한 고전 비극의 핵심은 비극에 처한 인물의 불행의 낙차를 얼마큼 극적으로 묘사하느냐에 기인한다. 클라이막스에 도달하는 순간 자신을 불행으로 이끈 운명의 실체를 실감함과 동시에 나락으로 빠진다. 영광의 과거에서 참혹한 현재로 국면이 뒤바뀌는 주인공의 처지를 관객은 연민의 시선으로 지켜본다. 관객은 축적된 감정의 응어리를 대신 표출해주는 비극의 주인공을 통해서 감정의 정화를 경험한다. 결국, 주인공이 얼마큼 이전으로부터 얼마만큼 나락으로 빠지느냐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의 감흥은 천지 차이다. 고전 비극의 주인공 대다수가 왕족 혹은 귀족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비극이 제시하는 불행의 의의는 계급을 막론했다는 점이다. 귀족이나 평범한 시민이나 모두 동일한 불행의 낙차를 지닐 수 있다는,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전제가 현대에 이르러서야 시도되고 또한 입증되었다. 평범한 시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보는 이의 심장을 덜컥 가라앉게 만드는 인물의 내적 묘사를 기반으로 카타르시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우리와 같다는 동질감은 고전 비극에서 느끼지 못한 인물과의 연대를 이끌어내면서 연민의 시선을 고취시켰다. 위대한 현대 비극의 산물들은 오늘날 또 다른 의미에서 새로운 고전으로 현재까지 계속 공연 중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다.

 

 

연극_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_최종포스터.jpg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퓰리처상 2회 수상에 빛나는 희극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1911. 3. 26 ~ 1983. 2. 25)의 대표작으로서, 현대 비극의 기틀을 세운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변화의 과도기에 위치한 그 당시 미국의 혼란스런 사회상이 짙게 투영된 인물들은 통속성이 강한 서사와 무대 위에서 시너지를 이룬다. '컴퍼니다'의 시선으로 새롭게 탄생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전 세계가 사랑한 원작의 포인트들을 온전하게 재현하면서도,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유머러스한 연출들을 통해 오늘날 관객들이 쉽게 작품에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

 

서로의 욕망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드라마의 자극성은 현대 드라마와 견줘도 전혀 뒤지지 않는 불온전한 바이브를 자아낸다. 인간의 비루한 욕망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대사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관객의 폐부를 찌르는 유효한 메시지를 선사한다. 더불어, 작품이 공개된 40년대 말, 대배우 '말론 브랜도'를 위시한 액터스 스튜디오의 연극 무대는 메소드 기법을 알린 중대한 분기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게 시대를 뛰어넘는 파급력과 강렬한 바이브를 두루 갖춘 한 편의 현대 비극은 파국을 향한 폭주를 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미국 남부의 귀족 출신, '블랑쉬'는 피치 못할 사정과 함께 여동생 '스텔라'의 집에 한동안 얹혀산다. 일찍 독립 생활을 시작한 동생과 달리 현실 감각이 현저하게 낮은 블랑쉬는 과거에 행동했던 그대로 화려한 치장과 낭비를 일삼는다. 한편, 예고도 없이 방문한 블랑쉬를 내심 못마땅하게 여긴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는 어딘가 수상해보이는 그녀에 관해서 남몰래 뒷조사를 시도한다. 그렇게 블랑쉬와 스탠리의 파국이 예정된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욕망에 집착하는 자

욕망에 종속당한 자


 

[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_공연사진1.jpg

 

 

"여기가 '극락' 인가요?"

"바로 '극락'이라우"

"설마 그럴리가..."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블랑쉬/유니스

 

 

뉴올리언스의 거친 뒷골목을 배경으로 인간의 비루한 욕망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정작 주체로 등극해야할 인간은 수동적인 제스쳐로 일관한채 욕망의 껍데기 노릇을 충실히 이행한다. 때로는 은밀하게, 하지만 종국에 이를수록 욕망은 각기 다른 형태로 노골적인 움직임을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인물들은 자신도 모르게 욕망에 집착하거나 무기력하게 종속당한 채 파국을 향해 조금씩 견인 당한다.


화려한 치장을 늘 고수하면서 신사의 친절을 가장 우선시 하는 블랑쉬의 행동 양식은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그녀의 처지를 반영한다. 남부 귀족 출신으로서 남 부러울 것 없던 삶을 살아온 기억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당연히 지켜야 할 행동 강령으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배한다. 반면, 자신이 발딛고 선 이곳이 세상의 전부라는 스탠리는 블랑쉬와 극대조를 이루는 현실주의적 면모를 강하게 풍긴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윤리에 어긋나는 짓거리도 서슴지 않는 스탠리의 행동은 철저히 육식동물의 몸짓을 환기시킨다. 이들은 저마다 지향하는 욕망의 그늘 속을 끊임없이 집착하고 파고드는 과정을 통해 주변을 황폐화시킨다.


스텔라의 경우 철저히 스탠리가 상징하는 남성성에 종속당한 케이스다. 극 중에 묘사되는 스탠리의 폭력적인 언행은 누가봐도 같이 함께 지낼 수 없는 나쁜 남자임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그녀가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뿜어내는 불가항력적인 야성과 육체적인 매력으로부터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남편의 말을 따라야하는 그 당시 보수주의적 관례에서 끝내 독립하지 못한 스텔라의 한계가 한꺼번에 작용했음을 언급할 수 있다. 그렇게 그녀는 스탠리라는 욕망으로부터 종속 당한 채 그의 분신을 잉태한다.

 

스탠리의 친구 '미치'는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살날이 얼마 안 남은 어머니에게 자신있게 소개해드릴 수 있는 정숙한 여성으로서 블랑쉬를 선택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블랑쉬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 그녀를 향한 사랑을 거둔다. 이는 블랑쉬라는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닌, 그녀를 통해 환기할 수 있는 특정 여성상에 사로 잡혔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로인해 미치는 사랑마저 잃은 것도 모자라, 한 여인의 파멸을 무기력하게 방관해버리는 비극마저 자초한다.

 

 


다르면서도 닮은

두 남녀의 불온전한 대립



[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_공연사진7.jpg

 

 

"난 폴란드 잡종이 아니오. 폴란드에서 온 사람들은 폴락이 아니라 폴란드인이오. 그리고 난 100퍼센트 미국인이고,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그게 자랑스럽소. 그러니 폴락이라 부르지 말라고."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스탠리

 

 

서로 판이하다는 말로 치부하기엔 블랑쉬와 스탠리의 갈등은 사뭇 복잡하다.

 

외관에서부터 과거를 잊지 못한 블랑쉬의 귀족 취향과,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스탠리의 짐승 같은 면모는 척봐도 맞을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상대를 향한 극도의 혐오에 어울리지 않는 육체적 기류가 은연 중에 내포되어 있다. 첫만남부터 아무렇지 않게 웃통을 까는 스탠리의 몸짓은 블랑쉬의 심기를 극도로 불편하게 만들지만, 그녀의 시선이 단단한 육체로 향하게끔 불가항력인 매력 또한 과시한다. 등장해서는 안되는 순간 촉발되는 성적인 기류는 작품의 불온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한 몫한다.


더불어, 애초부터 갈등이 예견된 두 남녀의 대립이 특별한 이유는 지독하리만치 대조적인 성격을 무색하게 만드는 공통점에 기인한다. 블랑쉬와 스탠리 모두 과거에 극도로 예민하다는 점에서, 스텔라와 미치 못지않게 과거라는 대상으로부터 종속 당했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작품에 등장한다. 과거 블랑쉬가 열렬히 사랑했던 첫사랑이 누군가와 입맞춤을 맞이한 것은 물론, 이 사실을 노출됨에 따른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결하고 만다. 그녀의 비극적인 과거사는 그녀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안겨준다. 그렇게 덧나버린 상처는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고통을 잊기 위한 임시방편으로서 그녀에게 욕망을 끊임없이 탐닉하게끔 이끈다.


한편, '코왈츠키'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스탠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자신의 민족성으로부터 철저히 종속 당한 케이스다. 폴란드인을 일컫는 멸칭('폴락')을 들을때마다 극도로 흥분함과 동시에, 자신은 명백한 미국임을 자명하는 그의 민감한 반응은 이민자 신분으로 미국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본능이 부지부식간에 발동된 케이스다. 미국의 건국 시초가 유럽 이민자들이라는 점은 같은 이민자 출신들을 배척하는 당시 미국 사회의 부조리성을 표출시키는 대목이자, 그의 짐승 같은 면모의 성격적 기원을 암시한다. 개인을 넘어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내포된 욕망성에 관한 이야기임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으로서, 작품 내 갈등이 곧 미국의 과거와 현재의 충돌을 상징한다는 해석 또한 가능케 해주는 대목이다.

 

 

 

진실, 혹은 진실이어야 하는 것



[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_공연사진6.jpg


 

"그래요, 그래요, 마법이오! 저는 사람들에게 마법을 걸려고 해요. 물건을 바꾸어 보여주는 거예요. 전 진실을 말하지 않아요. 진실이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죄라면 지옥에 떨어져도 좋아요!"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블랑쉬

 

 

첫사랑 '앨런'과의 벌어진 비극에 따른 심적 고통을 잊기 위해 그녀는 욕망을 탐한다. 플라밍고 호텔이 상징하는 그녀의 어긋난 욕망은 친절을 가장한 남자들의 접근을 거부하지 않으며 '로렐의 여왕거미'라는 오명과 함께 자기파멸의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조명등에 씌운 종이갓은 그 모든 욕구 행위를 향한 최후의 죄책감을 상징한다(이와 유사한 방식으로서 욕망에 저항하려는 그녀 나름의 방어기제가 바로 샤워다). 밖으로 노출되기엔 너무나도 비루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한 일환으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최후의 보루마저 스탠리의 농간으로 인한 미치의 분노 앞에서 무기력하게 벗겨지고 만다.

 

블랑쉬에게 있어 세상이라는 극락은 자기를 망가뜨리지 않고서는 삶을 지탱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공간이다. 음주와 섹스, 그리고 거짓말로 이어지는 갈망 행위는 스스로를 자기파멸로 이끌지만, 그리하지 않고서는 그녀는 일말의 생존 의지를 갖추지 못한다.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의 일환으로서의 욕망. 그녀는 욕망이라는 마법, 혹은 허구의 이미지로 구성된 자신만의 진실에 기꺼이 투신하면서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생의 의지를 힘겹게 부여잡는다. 욕망으로 점철된 지난 세월의 흐름이 각인된 자신의 얼굴을 미치에게 보이고 싶지 않던 그녀가 어째서 일요일 저녁에만 그와 만남을 가지려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드러나면서 '미치'의 분노는 증폭된다. 이를 보는 관객의 안타까운 마음은 극대화된다. 그런 의미에서, 미치를 향한 그녀의 진실에 관한 처절한 일갈은 보는 이의 안쓰러운 감정을 극적으로 유발하는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다.

 

어떤 식으로든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비루한 과거가 드러나면서 이 모든 사태를 촉발시킨 스탠리와 블랑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그녀의 거짓말을 집요하게 파헤친 스탠리의 저열한 욕망은 블랑쉬의 정신을 넘어 육체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보기만 해도 참혹한 스탠리와의 강압적인 성관계 이후, 더 이상 정상적인 사고회로를 작동 할 수 없던 블랑쉬는 정신병원으로 수감된다. 피해자가 떠나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를 배가시키는 건, 스텔라의 집을 하얀색 레이스로 꾸민 것을 시작으로, 하얀색이 가득한 독방으로 블랑쉬의 굴곡진 역경이 마무리 된다는 점이다. 화려하면서도 순수한 가치가 내포된 하얀색이라는 상징 활용을 통해 블랑쉬를 둘러싼 삶의 부조리성을 시각적으로 부각시킨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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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언제나 낯선 분의 친절에 의지하여 살아왔어요."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블랑쉬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렇게 누군가의 친절을 통해 비로소 완결을 짓는다. 자신을 연모하는 어느 댈러스의 석유왕이라는, 허구의 존재가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는 또 다른 진실(이어야하는 것)에 그녀는 푹 빠져있다. 하지만, 기대했던 구세주의 방문 대신 정체불명의 정신병원 간호사들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잔인한 현실을 다시금 실감한 나머지 발작을 일으킨다. 그 과정을 유심히 지켜본 정신과 의사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그녀의 에스코트를 자처한다. 뉴올리언스에서 보기 힘들었던, 자신이 그토록 염원한 신사의 친절을 선보인 정신과 의사에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팔짱을 낀채 몸을 의지하며 극락을 떠난다. 끝내, 블랑쉬는 누구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욕망에 솔직한 여자

결국, 그러지 못한 여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비극은 불변에 기인한다. 자력 따윈 꿈도 못꾸는 블랑쉬의 무기력한 처지는 결국 시작부터 끝까지 무엇하나 변하지 않는다. 그녀의 내면을 좀 먹는 욕망은 타인 의존적 태도를 부추길 뿐, 구원과는 전혀 먼 길로 그녀를 인도한다. 정신병원을 향하는 블랑쉬의 마지막 길을 뒤로한 채, 아무렇지 않게 한 무리의 남성들이 포커를 진행하는 모습은 그녀가 겪은 참혹한 현실을 대변한다. 진정한 지옥은, 변하지 않는 현실 그 자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소설이 바로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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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년

 

 

블랑쉬의 비극과 어느 정도 맥을 같이하는 또 하나의 캐릭터가 바로 '스칼렛 오하라'이다. 공교롭게도, 두 캐릭터 모두 미국의 남부 출신이자 급변하는 미국 사회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관계로 집안이 몰락했다는 동일한 처지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한다(사족으로, 영화화된 두 작품 모두 '비비안 리'가 주연이었다) 귀족으로서의 자신의 에고를 쉽게 버리지 못한 것과 더불어, 눈 앞의 역경을 나름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두 타인 의존적 태도를 견지했다는 것 또한 두 캐릭터가 공유한 포인트다. 하지만, 두 여인의 최후는 너무나도 달랐다.

 

한때는 철부지 소녀였던 스칼렛은 생존이라는 욕망을 스스로 포용하며 혼란의 시기 속에서 악착 같이 생존했다. 물론, 지나친 그녀의 이해타산적인 성격은 주변과의 관계의 종말이라는 부작용도 낳았지만, 결국 자신의 고향 땅 위에서 당당히 서있을 수 있는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마주하고, 이를 이용하기까지한 솔직함에 기인한다. 만약, 이러한 성격이 부재했다면, 그녀는 영락없이 환경에 적응 못한 무능력한 과거의 잔재들로 전락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블랑쉬는 스칼렛만큼 자신에게 그리 솔직하지 못했다.

 

약육강식의 세상. 때로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수긍해야지만 이곳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가련한 여인은 차마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모진 구석을 지녔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비극의 시작과 끝을 관람한 관객의 무의미하지만 참을 수 없는 가정으로서의 안타까움. 그렇게, 블랑쉬의 몰락을 지켜보며 어느 누군가는 가슴 한 켠에 흘려보내지못한 비애의 감정을 양껏 배설한다. 아마도 인간이 욕망으로부터 해방되기 전까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카타르시스는 유효할 것이다.

 

그 말인 즉슨, 앞으로도 영원하다는 뜻이다.


 

 

김현준.jpg

 

 

[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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