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재윤 개인전 [시각예술]

글 입력 2021.10.1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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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윤 개인전 - Wanderlust>

* 기간: 2021. 09. 15 - 09. 28 

* 장소: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햇살 좋은 9월 말. 다른 전시를 감상하기 위해 방문한 삼청동. 길을 걷다 이 전시가 눈에 들어왔다. 카페 건물 외벽에 천으로 인쇄된 전시 포스터가 은근한 바람에 살랑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이것이 전시 포스터인지 공사현장 가림막인지 궁금했던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포스터에 실린 작품은 묘하게 나를 매혹했으니 나는 홀린 듯 카페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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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열린 폴딩도어 안팎으로 놓인 테이블 가득 사람들이 상쾌한 가을 오후를 즐기는 공간 아래에서 내게는 낯선 이재윤 작가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이재윤 작가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으나 찾기가 쉽지 않다. 이 전시 'Wanderlust(방랑벽)'에 대한 기사는서울문화투데이에 실린 것을 겨우 찾았고 이 기사가 적잖은 도움이 되었으나, 나의 감상은 한 사람의 감상자로서 만난 작품 앞에서 들었던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이 주를 이룰 것이다.

 

자, 그럼 전시된 작품을 하나씩 감상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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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 72.7 x 72.7cm, 캔버스에 유채, 2021

 

 

《천장》이라는 제목을 보았지만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제목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작품을 보며 '천장'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오른쪽에 드리워진 격자 무늬는 그물 같기도 하고 철로 된 구조물 같아 보이기도 한다. 왼쪽의 파랑과 하양은, 파랑이 하양을 침범한 걸까, 하양이 파랑을 침범한 걸까? 커튼일까 그림일까? 도대체가 저것이 어째서 '천장'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기실 이 그림을 놓고 '바닥'이란 제목을 붙여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파랑과 하양에 베이지색과 검정에 가까운 다크 브라운의 액자가 서로 잘 어울린다, 맑게 표현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블루와 화이트 색감이 맑고 청정한 느낌을 낸다, 나른함과 역동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라는 독특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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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Side, 53.0 x 45.5cm, 캔버스에 유채, 2021 / (오) Front, 53.0 x 45.5cm 캔버스에 유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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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는 무엇의 '옆'이란 말인가. 검은 선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다리의 난간일까. 그렇다면 '옆'은 다리의 옆면이란 뜻일까. 아니면 다리 위에 서있는 나의 옆면일까. 제목에 있어 작가는 친절하지 않다.

 

그리고 Front》에 오면 이젠 혼돈스럽다. 저 모습이 어찌하여 '앞면'이란 말인가? 네 명의 사람이 오토바이를 탄 뒷모습이 아닌가? 저것이 뒷모습인 것은 핸들이 앞에 솟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음표는 또 생긴다. 저들, 특히 왼쪽에서 두 번째 사람을 보면 저들은 분명히 서있다. 그런데 저것이 뒷모습이라면, 어째서 횡단보도를 지나서 멈춘 것인가? 저곳은 멈추어서는 안 되는 공간인데 말이다. 그들은 뭘 하는 걸까? 그들 앞 허공에 걸려 있는 고가도로에 신의 현현顯現이라도 기대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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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만 보세요'라 해놓고 글자 위에 트레이싱페이퍼를 설치한 작가는 이쯤 되면 고약스럽다. 감상자를 골탕먹이는 것이 작가의 의도인가? 작품을 만질 수 없으니 핀에 가까운 윗부분은 쉽게 읽을 수 있으나, 아래로 갈수록 멀쩡한 글자는 점점 암호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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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e a wish, 53.0 x 45.4cm, 캔버스에 유채, 2021

 

 

굉장히 '친절한' 제목이 나왔다. 'Make a wish' 소원을 빌어 봐. 테이블에 앉은 여성이 조각케익에 초 하나를 꽂고는 두 손 모아 소원을 빌고 있다. 분명 레스토랑이나 카페일 텐데, 그녀는 혼자인가, 일행과 함께 있는가. 저 케익은 식사 후 디저트인가, 카페의 메인 메뉴로서의 케익인가. 병에 든 액체는 물인가, 보드카인가. 왼쪽 접시 위 종이는 무엇인가. 왼쪽 의자 위 하얀 물체는 또 무엇인가. 그녀의 눈코입은 어디로 사라진 건가. 도통... 물음표가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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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e, 53.0 x 45.4cm, 캔버스에 유채, 2021

 


None》. '아무도/아무 것도'라는 이 제목은 충격적이다. '아무도'라기엔 분명히 사람이 앉아 있다. 그 사람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묻는 것은 이재윤 작가의 작품 감상에 있어선 의미 없는 일일 터. 그런데 사람이 한 명 있는데 어째서 '아무도'인 건가? 저 사람의 옆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것일까? 접시와 컵에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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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각 45.5 x 37.9cm, 캔버스에 유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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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각 45.5 x 37.9cm, 캔버스에 유채, 2021

 

 

《조각》이라는 이 작품들의 제목은 지금께엔 상관없어 보인다. 이재윤 작가의 제목은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 담고 있다. 그 최소한의 정도마저 충분하지 않도록. 그러니 제목이 주는 혼돈에서 벗어나 작품의 형태와 색감이 주는 느낌에 집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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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J(Outside), 72.7 x 53.0cm, 캔버스에 유채, 2021

 

 

BBJ는 검색하니 Boeing Business Jet 또는 Big Bad John이 나와 웃어버렸다. 그럴 리 없겠고, 아마도 앞에 보이는 레스토랑의 이름이 아닐까 싶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는 차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은 것일까? 그냥 팔을 힘차게 흔들며 걷는 중일까.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그녀의 표정을 알 수 없고, 그녀의 심정을 추측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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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J(Inside), 72.7 x 53.0cm, 캔버스에 유채, 2021

 

 

좀전에 BBJ 밖을 걷고 있던 그녀가 곧바로 BBJ 내부로 들어온 것일까? 아니다. 같아 보이지만 그녀는 다른 신발을 신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그녀가 같은 공간을 다른 날 들른 것일지, 아니, 아예 다른 사람인 것일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아마도 메뉴판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또한 확신할 순 없으며, 이곳이 레스토랑인지 또한 이제는 의심스럽다. 데스크 위에 놓인 것은 책 같아 보이기도 하고 카페의 기계 같기도 하고. 분명히 형체를 그렸지만 그 형체의 정체성을 알 수가 없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추상화에 비하면 분명 친절하고 확실하게 형체를 그린 구상화라 하겠으나 물체의 그 무엇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것이 과연 구상화가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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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40 x 390cm, 캔버스에 유채, 2021

 

 

가로로 큰 작품 《》. 바깥과 안을 구별하는 매체가 '창'인 것은 가운데 있는 커튼과 오른쪽에 있는 세로 선, 그리고 창 바깥쪽 위에서 아래로 드리워진 식물로 알 수 있다. 커다란 집의 거실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풍경일 텐데, 바깥의 파라솔 중 하나는 누워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창에서 바로 맞은편으로 내달리는 붉은 도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도로를 중심으로 해석해 보자면 실내로 묘사된 이 '집'이 붉은 도로 위에 떡하니 놓여 있는 셈이니 말이다. 이 시점에서 '차원'을 소환해도 될까. 같은 장소에 겹친 다른 시간 또는 차원. 그렇게 보면 창 밖의 세계와 창 안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창 밖의 세계에서 창 안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창 안의 세계에서는 창 밖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를 명확히 구별하는 동시에 조화롭게 만드는 것은 '창'과 그 '창'의 존재를 표시하는 담쟁이 같은 식물의 그림자다. 안과 밖.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두 세계를 붙이는 접착제의 역할을 하며 작품에 현실감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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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아래 놓여 있는 하얀 뭉치는 강아지거나 고양이일 테다. 이재윤 작가의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녀석 또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허나, 천뭉치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러나 강아지였음 '좋겠는' 녀석의 존재로 인해 이 작품이 부쩍 평화롭고 안온하고 고요해 보인다. 고개를 폭 묻고 걱정없이 잠든 녀석을 보며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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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는 담요가 늘어져 있고 그 담요 위에 펼쳐진 책이 잠들어 있다. '책이 잠들다'한 것은, 이 책 역시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글자가 보이지 않는 책의 펼쳐진 면은 위의 '눈으로만 보세요'라 적힌 텍스트 작품을 보는 것 같다. 말갛게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혹은 알아볼 수 없는 이 책은, 어쩌면 이 면에만 아무 글자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책이 아니라 다이어리일지도 모른다. 그림책일지도 모른다. 리플렛일 수도 있다. 활자가 기본으로 전제되는 '책'이란 존재에서 바로 그 활자를 빼니 의외로 이 책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겠다. 감상자가 적어 넣는 것이 바로 저 책의 정체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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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풀이겠지? 하지만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고질적 습관은 이제 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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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드리우는 풀의 경계선을 보라. 분명 경계가 있으나 번져있어 명확한 경계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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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계의 모호함은 캔버스 자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작품과 벽에 비친 그림자의 그라데이션. 이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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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이 작품이 캔버스, 그야말로 '유화를 그릴 때 쓰는 천'이라는 사전적 의미에 해당하는 '캔버스'로만 전시되었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우리가 '캔버스에 유채'라 할 때 그 '캔버스'는 목재로 된 틀에 팽팽하게 당겨 설치된 천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재윤 작가는 그 천 자체를 단어의 정의에 부합하도록 사용했다. 참 묘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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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112.1 x 162.1cm, 캔버스에 유채, 2021

 

 

전철이나 해외의 버스 내부를 보는 듯한 작품 《이동》. 색상이 조화로운 이 작품 속 사람들은 함께 있으나 서로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다. 나란히 앉은 사람들조차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지 않는 모습에서 이들은 '따로 또 같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몸은 같이 있으나 마음은 따로인 사람들. 여기에서 조르주 쇠라 Georges Seurat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A Sunday on La Grande Jatte>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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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Seurat, A Sunday on La Grande Jatte, 1884

 

 

그러고보니 쇠라 작품의 인물들도 눈코입이 뚜렷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형체를 이루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각각 따로 존재하는 점들로 이루어진 점묘법이라는 기법이 작품 속 인물들에 그대로 적용된 것 같은 작품. 쇠라 작품 속 인물들 역시 함께 있지만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함께 있으나 심리적으로는 각각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인물들.이렇게 작품으로 극단순화하여 보니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이지, 기실 《이동》의 장면은 우리가 매일같이 전철과 버스에서 보고 보이는 장면이다. 작가는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21세기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제 모습은 바로 이러하다. 색상은 조화로우나 인물은 서로 섞이지 않는 모습. 우리는 하나의 인류이자 국민이고 시민이며 구민, 동민에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이지만 나는 너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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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고 까맣게, 유령인 듯 저승사자인 듯 표현된 형체. 현대를 살아가며 서로 소통하지 않는 우리는 각자에게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고 의미를 지니지 않는 유령일 수도 있고, 불가해하고 두려운 저승사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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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모습이나마 유일하게 '얼굴'이라는 걸 보여주는 그녀가 그래서 특별히 '인간적'이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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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72.7 x 60.6cm, 캔버스에 유채, 2021

 

 

나가는 순간 마주한 《》은 전시 감상 후 엉클어진 내 심정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

 

이재윤 작가 작품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모호하다.

2. 작품 속 인물은 각각 고립되어 있다. 

3. 색감이 조화롭다.

 

'모호성'은 크게 제목이 담고 있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과 얼굴의 눈코입이 없다는 점, 그리고 형체의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제목의 정보가 불충분하기에 언어의 영향에서 벗어나 작품의 회화성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많은 작가들이 작품명을 '무제'라 적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얼굴의 눈코입이 없으니 표정을 알 수 없다. 표정을 알 수 없으니 인물의 심리도 알 수 없다. 인물은 웃고 있을 수도 있고 울고 있을 수도 있다. 예쁠 수도 있고 못생겼을 수도 있다.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있고 감고 있을 수도 있다. 그 어떤 표정이라도 지을 수 있다. 형체의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으니 천장은 바닥이 될 수도 있고 책은 그림책일 수도 있고 일기가 될 수도 있다. 무엇도 명확하지 않기에 오히려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모호성이 자유를 빚은 것이다. 상황과 심리와 정체성은 무엇이건 감상자가 부여하는 것이 정답이 된다. 작가가 설명을 충분히 하지 않고 비워둠으로써 감상자가 감상할 여백이 생겼고, 감상을 통해 감상자는 작품의 창작에 동참하게 된다.

 

인물의 '고립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나와 우리의 모습을 돌아 보게 만든다. '혼자'를 강조함은 역설적으로 '함께'를 향한 열망을 지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상의 '조화'는 안정과 위로를 준다.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아 불안한 감상자의 내면이, 작품의 조화로운 외면으로 인해 희한하게 안정감을 느낀다. 불안과 안정, 이 상호모순적인 양가감정이 공존하는 나의 내면 앞에 이재윤 작가의 작품이 서있다.

 

앞서 언급한 서울문화투데이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싣는 것으로 포스팅을 맺는다.

 

이재윤은 유목적 사유를 통해 세상과 삶, 그리고 자아에 대해 자문할 기회를 마련한다. 특정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끝없이 나아가는 유목적 사유는 불안정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함으로써 삶의 여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일군다...(중략)... 작가는 이렇게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세상과 삶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시각을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작가의 작품들은 방랑을 향해 낸 커다란 창이다. 그 창을 통해 관람객은 낯설기 때문에 솔직하다고 여길 만한 삶의 파편을 마주한다. 어디에나 있고 어떻게든 가 볼 수 있는 길이 창문 너머로 보이기 시작한다.

 

 

[백은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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