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로의 등불이 되어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1.1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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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 김기림, <바다와 나비>

 

 

-3,000m의 심해를 상상해 본 적 있는가. 점심해수층이라 불리는 그곳은 빛이 닿지 않아 0도에 가까운 수온을 유지한다. 어둠에 적응한 심해 생물들은 먹이를 유인하기 위해 빛을 내거나 촉수로 독을 쏘도록 진화했다.

 

이들의 영역에 겁 없이 맨몸으로 침입하는 인간은 수압에 의해 순식간에 터져 버린다. 수심을 알게 된 이는 심해가 무섭지 않을 리 없다.

 

최근 성황리에 완결한 웹소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는 근미래의 심해를 배경으로 한다. 화성 테라포밍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이후 인류는 우주 대신 바다를 새로운 터전으로 삼고자 했다. 그렇게 세워진 북태평양해저기지는 수면 위의 인공섬 아래로 1부터 제4해저기지까지 이어진다.

 

주인공 ‘박무현’은 -3,000m에 자리한 제4해저기지의 치과의사다. 지상의 인공섬에 위치한 종합병원에는 치과가 없다는 이유로 해저에 새로 부임했다. 입사 닷새 만에 직장을 잃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어느 날 아침, 무현은 침대에서 떨어진 충격에 잠에서 깬다. 해저기지에 바닷물이 새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물길을 뚫고 그는 무사히 심해를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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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만 해도 제목이 웹소설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흥미를 끌고 눈길이 가게 하기 위해 웹소설은 주로 파격적인 제목을 짓는다. 줄거리를 간결히 전달하는 동시에 구미가 당기도록 한다.

 

그에 비해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는 심심한 느낌이다. 내용이 쉽게 연상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이는 작품의 중심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어두운 바다’는 침수된 해저기지를, ‘등불’은 주인공 무현을 뜻한다. 어뢰 공격과 사이비 종교 단체의 테러로 해저기지는 혼란에 뒤덮인다. 작품은 홀로 살아남고자 발악하는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인종, 성별, 나이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채 폐쇄된 공간은 그 자체로 범죄와 불의의 온상처럼 느껴진다. 기대에 부응하듯 입체적인 인물들은 불온하고 이기적인 성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인류애가 수직 하락하는 기분에 페이지를 넘기며 혀를 내둘렀다.

 

그 사이에서 등불처럼 빛나는 무현의 ‘선함’은 이 이야기가 나아가는 동력이 된다. 동시에 독자들이 작품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그는 재난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생명을 돕고 구한다.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순간에도 다른 이의 손을 놓지 못하는 건 그의 선한 본성 탓이다.

 

 

상상의 악은 낭만적이고 다채롭다. 실재하는 악은 음산하고 단조롭고 지루하다. 상상의 선은 지루하지만, 실재하는 선은 언제나 경이롭고 도취시킨다.

 

-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문학과지성사, 97쪽.

 

 

인간의 심연을 비유한 해저기지에서 벌어지는 여러 악행은 얼핏 다채롭다. 그러나 실상은 반복되고 예상 가능한 촌극에 불과하다.

 

인간 본성을 악질적으로 묘사하며 이것이 현실이라는 변명을 주워섬기는 미디어가 추세라고 했나. 현실의 악은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것에 비해 단조롭기 짝이 없다. 배경 설정이 매력적인 빌런도,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사연의 장 발장도 없다.

 

반면 현실의 선은 놀랍도록 다양하다. 비탈길에 미끄러지는 차를 막아내는 행인이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어지럽힌 무인점포를 정리하는 이의 소식을 접하면 마음 한구석에서 따뜻한 난로가 켜지는 듯하다. 이런 종류의 뉴스는 아무리 많이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작품 속 무현의 선행은 작은 불씨가 되어 독자들의 선한 의지에 불을 틔운다. 울거나 웃게 하는 작품은 많지만, 움직이고 실천하게 하는 작품은 흔치 않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는 결국 사람들이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마음의 주춧돌을 잃지 않고 서로의 등불이 되게 한다. 완결 이후 더 넓은 세계로 영향을 미칠 이 이야기의 힘은 조용히 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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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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