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낭만을 가질 수 있는 시간 - 예술가의 일

글 입력 2021.09.2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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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예술 서적을 많이 읽는다. 여러 주제를 추천받는데도 눈길이 가는 책이 비슷하다. 주제를 편식하지 않기로 다짐해도 관심 여부에 따라 이해력이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고 관심 분야에서 우뚝 솟을 만큼 전문적인 지식이 있진 않지만 얄팍하고 넓게 관심이 있다보니 두루뭉술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저번에 읽은 책은 <아트인문학: 틀 밖에서 벗어나는 법>을 통해 현대미술에 대해 읽어보았다면 이번에는 더 다양한 분야의 예술이 담긴 책을 접했다. 읽었던 예술 서적과 공통된 내용을 발견하면 괜히 즐겁다. 알고 있는 지식을 발견하며 읽는 재미를 느끼니 술술 읽힌 것 같다. 아무리 읽어도 아리송했던 게 엊그제 같던데, 읽은 양이 비례해 축적되는 지식이 있어 보람차다.

 

<예술가의 일>에서는 순수 예술뿐만 아니라 상업예술까지 포함하여 폭넓은 범위를 자랑한다. 더 많은 세상을 접하는 것 같다. 작가 조성준은 이 책에 대하여 '죽은 예술가의 사회'라 요약했다. 이는 온라인 뉴스플랫폼 매경프리미엄에 칼럼으로 연재됐으며 예술사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방점을 찍은 예술가들을 일과 삶을 다뤘다. 19세기부터 아주 가까운 최근까지, 예술의 삼라만상의 33인의 인물들을 닮아 그들의 유산을 우리에게 공유한다.

 

총 여섯 개의 목차로 목차마다 네 다섯 명의 인물을 묶었다. 태어난 연도나 활동 시기에 따라 묶은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유산을 기준으로 작가가 직접 큐레이션 한 묶음으로 목차마다 그들의 주제를 담고 있다. 제1장 경계를 지우고 먼 곳으로(데이비드 보위, 구스타프 말러, 다이앤 아버스, 바츨라프 니진스키), 제2장 우직하게, 천천히, 한 걸음씩(가쓰시카 호쿠사이, 조지아 오키프, 오즈 야스지로, 어리사 프랭클린, 마르크 샤갈, 안토니 가우디), 제3장 아물지 못한 상처(프리다 칼로, 천경자, 빌 에번스, 장미셸 바스키아, 장국영, 버스터 키튼), 제4장 전쟁터에 내던져진 싸움꾼처럼(박남옥, 페기 구겐하임, 존 레넌, 나혜석, 자하 하디드, 수잔 발라동), 제5장 고독마저 그들에겐 재료였을 뿐 (글렌 굴드, 이타미 준, 커트 코베인, 다니구치 지로, 에드워드 호퍼, 비비안 마이어, 에드바르 뭉크), 제6장 예술과 삶이 만나는 시간(르네 마그리트, 조지 로메로, 알베르토 자코메티, 피나 바우슈)으로 구성됐다. 화가부터 영화감독, 작가, 안무가, 지휘자, 컬렉터 등 다양한 직업군을 소개하지만, 그들 작품에 영향을 끼친 대내외적인 환경과 개인적인 성장 이슈 등을 포함하여 특징적인 예술가의 길로 나누었다. 그들과 함께한 여러 예술가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

 

예술에 관심이 있다해도 모든 분야 예술가를 모아놨으니, 들어보기만 했거나 아예 모를 수도 있다. 작가는 <예술가의 일>에 그들이 삶과, 예술, 그리고 대표적인 작품 등을 몇 페이지로 쉽게 요약해뒀다. 교양서적처럼 하루에 한 명씩 읽어봐도 부담 없을 정도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살아생전 추앙을 받은 예술가가 있는 반면에 사망 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경우도 있다.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온 이와 남들보다 넘치는 지원을 받으며 살아온 예술가도 두루 섞여 있다. 예술가는 모두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각 분야에서 각자의 개성을 가지며 인류에 커다란 유산을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유산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는 <예술가의 일>을 통해 예술이 주는 힘이 무엇인지 집중할 수 있었다.

 

 

 

'감정'을 기록하는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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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일> 중 마르크 샤갈과 벨라(1923), 101쪽

 


예술가는 무엇을 그리는 그리는지 생각해보았다. 작품의 탄생 계기가 계산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감을 얻어 마음속에 일렁이는 무언가를 잠재우지 못해 손이나 말로 표현하고 온몸을 동원하여 세상에 남긴다. 탄생한 결과는 작품이 되어 후대에게 전해진다. 해석은 다양하다. 작가의 모든 의도를 간파할 수는 없고 가진 경험이 다르니 이해하는 지점과 속도도 같지 않다. 작가가 자기 뜻이 정답이라 여긴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당시 대중의 수용 여부에 따라 사회적인 성공을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자본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것이 수반돼야 다음 작품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평화를 사랑한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은 음악을 통해 평화를 울부짖었으며, 혼란스러운 곳마다 '존 레논의 벽(Lennon Wall)'이 세워졌다.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인 박남옥(1923-2017)은 한국 전쟁 시절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을 위한 영화를 불리한 여건 속에서 제작해냈지만, 당시 무참히 실패했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초현실주의로 오해받을 만큼 자신의 솔직한 고통을 작품에 담았다. 가쓰시카 호쿠사이(Katsushika Hokusai, 1760-1849)는 세상의 만물을 그림에 담고자 했고 우직하게 모든 사물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그림으로 그렸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1960-1988)는 1200억 원의 작품의 주인이 됐고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우울감을 그림에 담아 '검은 피카소'라는 별칭도 생겼다. 그는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작품은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작가의 살아있는 - 혹은 죽어있는 - 정신을 담는다. 그것이 어느 형태이든 작가의 의도와 감정을 물씬 품고 있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작가와 대중이 서로의 감정을 캐치한 그 순간 일맥상통하는 무언가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고, 그를 통해 우리는 말로 설명 못 할 인생의 무언가를 삶 속에 표식을 남긴다. 하다못해 철없는 십 대 시절 내 마음에 불을 지핀 아이돌 그룹 하나 있지 않나?

 

이런 순간이 흔하다고 착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취향에 취해 살아가던 시절이었고 뭣 모르는 학생 때였으니 오만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살아가다 보니 아무런 감흥이 없는 때가 왔고, 감흥을 느끼다 보니 어떤 예술을 보아도 마음이 타오르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극과 극의 반응을 모두 경험해보니 예술이 나에게 선사하는 소중한 순간에 대해 더욱 감사하게 됐다. 예술을 느낀다는 것은 감정을 다채롭게 느낀다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작가에겐 감정을 기록하고 자신의 세계를 확산하는 수단이며, 그를 감상하는 대중에겐 풍요로운 감정을 수용하는 계기이자 사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누구보다 좋아했던 것에 대해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았을 때 불안해하지 말자. 단지 우리는 그 시간이 다른 것을 생각할 만큼 여유가 없었던 것이고, 타인의 감정을 받아드릴 만한 공간이 부족했을 뿐이다. 그리고 여유가 없다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고 마음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타이밍이라 생각한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 일에 눈길을 돌려보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이게 바로 예술의 필요성이 아닐까 싶다.

 

 

 

'자아'를 각인하는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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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일> 중 글렌 굴드, 265쪽

 

 

글을 쓰며 고민했다. 과연 '자아'가 먼저 나와야 할까, '감정'이 나와야 할까, 배치를 고민했다. 자아를 표출하기 위해 감정을 사용하는지 감정을 표출하니 그것이 자아의 발현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같은 얘기일 수도 있지만, 마치 나에게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고민하는 것과 같았다. 여러 고민 끝에 나는 '감정'을 위로 올렸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그냥 내가 쓰고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결과는 내가 느낀 감정들이 글자와 색깔로 흩뿌려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한데 모여 개성이나 특징을 나타내는 '집단적인' 힘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자아'이고 대중에게 각인되는 모습이 아니냐는 생각에 '자아'를 표출하는 수단을 아래로 두었다.

 

끝까지 살아남은 예술가들은 한 가지 분야만 다루지 않는다. '자아'가 흔들리지 않고 변화를 맞이하는 것처럼 생명력이 긴 예술가는 언제나 시대를 등지지 않는다. 시대에 흡수되거나 시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어떻게든 본인만의 작품을 이어가면서 '함께' 공존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과 소통한다고 할까? 작가는 끊임없이 소통하며 작품에 호소력을 싣는다. 어떻게 실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도 있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연구하고 수많은 시도를 해본다. 실제로 하지 않으면 값어치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예술이니, 탁상공론으로 완성될 수 없다. 상상과 실제로 행동하는 결과물은 막상 다를 때도 있다. 사진으로만 접했던 관광지를 직접 방문해봤을 때와 다른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예술의 경험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는 작품의 위압감과 웅장함은 평면적인 사진으로 모두 담아내기엔 어려움이 있다.

 

'자아'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로 대표될 수 있겠지만, 그 뒤에 숨겨진 무수히 많은 시도 속에서 완성됐다. 그것이 대중 스타가 가진 매력이고 그 매력에 우리가 홀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다못해 배우만 보아도 그들이 맛깔나게 표현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각기 다른 것처럼, 자신의 특색이 존재한다. 이 특색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담았을지는 모른다. 태생부터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과 노력으로 다듬어 테크니컬한 예술을 선보이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예술의 자아는 정답이 없고 내게 맞는 핏(fit)을 다양한 상황과 감정 속에서 끝없는 시도 끝에 찾아낼 수 있다. 멈추는 것이 아니다.

 

데이비드 보위(David Robert Hayward Jones, 1947-2016)는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팬들이 있으며 1960년대 록의 황금시대에 나타난 오아시스(Oasis), 퀸(Queen), 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 비틀즈(The Beatles)가 유행일 때, 청춘을 보낸 이쁜 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MZ세대에도 록 밴드 마니아로 영입될 만큼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글램 록은 영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록키 호러 픽쳐 쇼(The Rocky Horror Picture Show, 1975)>와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 2001)> 등 그의 이미지가 스며들었고 2003년에 발표한 이후 10년 만에 선보인 를 공개해 '베를린 3부작(Berlin Trilogy)' 이후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또 3년 후,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고 실험적인 곡들을 담아 발표했으며,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시간이 주는 권위에 안착하지 않고 끝없이 나이가 들거나 새로 태어난 대중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뮤지션으로 생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예술가로서 시도를 멈추지 않으나 온전히 예술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할 수도 있다.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1895-1966)는 영화 배우이자 감독으로, 20세기 초 무성영화가 주를 이루던 당시에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1889-1977)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성영화 유명 배우였다. 그는 배우뿐만 아니라 영화감독으로도 호평을 받았으며 감각적인 미장센을 구성하는데 능해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작가는 이를 오늘날의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1969-)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 2014)>로 비유하였다. - 여담이지만 그의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The French Dispatch, 2020)>의 한국 개봉을 매우 기대 중이다 - 찰리 채플린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한 영화를 만들었다면, 키튼은 영화를 위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작가가 말했다.

 

하지만 그가 왜 빌리 와일더(Billy Wilder, Samuel Wilder, 1906-2002) 감독의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1950)>에서 퇴물 배우인 주인공의 친구로 나왔을까? 극 중 주인공 노마 데스먼드라는 인물과 같이 퇴물 친구들로 유성 영화의 출현으로 몰락하는 무성 영화의 현실을 담았다. 사실 지금 키튼에 대해 글을 쓰는 나도 찰리 채플린은 알아도 <예술가의 일>을 통해 그에 대해 처음 알게 됐는데, 그가 정확히 몰락한 시점은 블록버스터 규모로 제작된 영화 <제너럴(The General, 1926)>의 흥행 참패라 한다. 이후 196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제너럴>이 재상영되어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그가 다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키튼은 대중의 박수를 받기까지 30년이란 시간을 '몰락한 배우'라는 이미지에 갇혀 지냈고, 다음 해 눈을 감았다고 한다.

 

혹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Herbert Gould, 1932-1982)같은 경우도 있다. 그는 클래식계의 이단아로 한 여름에도 장갑을 끼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돌연 32살에 대중에게 보여주는 공연은 의미가 없다며 모든 콘서트를 취소 했다. 그는 추구하는 완벽한 음을 완성하기 위해 은둔자의 삶을 살아갔다. 자아를 통해 예술가는 대중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사회적 성공을 목표할 수 있으나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완성하기 위해 세계관을 완성하는 것에 의의를 둘 수도 있다. 예술은 단순히 소비 문화의 갈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아를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낭만을 가질 수 있는 시간,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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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를 말하면 보통 뮤즈가 따라온다. 물론 뮤즈라는 표현이 옳은 것 인지와 지난 예술계에서 뮤즈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을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다. 현대라면 쉽게 용납하지 못할 나이 차이를 그 시절 예술가는 단지 예술가라는 이유만으로 암묵적인 사회의 규칙을 깨트려도 용인되는 경우가 있다. 파격적인 행보를 삼아도 대중들은 예술가니까 라고 그들의 행동을 쉽게 넘어간다. 물론 요즘의 분위기는 그렇게 너그럽지는 않지만, 예술가는 우리가 쉽게 할 수 없는 활동을 쉽게 넘나든다. 간단히 말해 우리보다 더 넓은 행동 범위나 혹은 다른 사고관을 가졌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도 편견일 수 있다. 책으로만 접한 예술가와 현실에서 접한 예술가의 수가 극히 다르니 내가 예술가에게 받은 이 느낌이 일반화될 수 없다. 우리가 접하는 예술가는 어떤 사람일까? 그들도 역시 사람이기에 일상의 범주로 들어오면 보통 이와 다를 바가 없을 수도 있다. 범상치 않은 신념으로 일상에서조차 톡톡 튀는 예술가도 있겠다. 아직 아쉽게도 나는 '진정한' 예술가는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다. 혹은 예술 직종에 종사하여도 예술가적 면모를 일상에서 나에게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아니면 애초에 내가 경험한 모습이 예술가의 모습일 때와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 예술가란 기행을 일삼는 직종이라는 것이 일종의 프레임을 씌운 나의 편견일 가능성도 있다.

 

예술이 주는 온갖 편견들을 들어내고 순수하게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순기능을 생각해보았다. 예술은 이런 것이라는 나만의 정의를 이미 앞에 두 개의 소주제를 통해 서술했다. 예술을 통해 감정을 기록하고 자아를 각인하는 수단이라 말하였지만 사실 '수단'이라는 하나의 방법으로 그 가치를 작게 만들고 싶지 않다. 예술가의 일이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가늠할 수 없고 내 짧은 식견으로 이렇다 할 정의를 하는 것도 가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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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일> 중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2015), 202쪽

 

 

하지만 예술가가 남긴 모든 일은 현재 내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 영향을 준다. 바로 '기록'과 '자아'라는 키워드로 예술은 나의 삶의 일부분이 된 흔적을 남기고 '기록'하는 동기가 되어, 이는 쌓이고 쌓여 나를 나타낼 수 있는 '자아'의 표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직관적인 나의 성향도 한 몫 한다.

 

<예술가의 일>을 읽고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여유를 잃어가는 요즘, 예술은 나에게 버틸 힘을 가져다준다. 버틸만한 힘은 간단하다. 듣기 좋은 음악과 내가 쓰고 싶은 글과 그림을 그리며, 혹은 책을 읽거나 영화를 감상한다. 가끔은 좋은 풍경이 찍힌 사진을 그저 바라만 봐도 행복하다. 하루에 아주 짧은 순간이거나 몇 시간 이상을 차지하는 예술은 나에게 낭만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직장인'이라는 타이틀 가진 나에게 삶을 지속해나가야 하는 이유를 가져다준다. 퇴근 후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그만큼 지친 삶을 환기해준다. 가당치도 않은 낭만이 미래를 그리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비록 날이 갈수록 미래의 규모가 소소하게 변하고 있다. 그마저도 쉽지 않은 현실이지만 철없는 낭만이 긍정적인 정신을 가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문화예술의 감상에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 시간이 부질없다거나 원체 관심이 없는 분야일 수도 있어 꼭 권장하는 것은 아니나, 권유해보고 싶다. 전혀 다른 분야를 접하다 보면 생각해보지도 못한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날지도 모르고 오랫동안 고민해오던 일의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 색다름이 필요하다면 권유해보고 싶다. 그러나 어떤 종류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면 <예술가의 일>을 한번 읽어보자. 각 분야에 특색있는 33인의 예술가의 삶과 작품관을 통해 내 취향의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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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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