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홈이 아닌 대지로 나아가기 - 아트인문학: 틀 밖에서 생각하는 법 [도서]

현대 미술의 흐름에서 배우는 창의와 혁신
글 입력 2021.09.2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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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필수적으로 갖춰야하는 역량이 ‘창의성’과 ‘예술성’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얘기한다. 그런데 그 창의성과 예술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을 정해진 틀 안에서 생각하도록 교육 받아왔다. 대학 입시를 위해 틀에 박힌 방식으로 공부했고, 대기업 입사를 위해 정해진 루트를 탄다. 늘 그래왔다.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번뜩이는 창의성을 가지는 것’은 아마 현대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일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난관에 봉착한 우리에게 혁신과 창조의 노하우를 전달하기 위해 책을 썼음을 밝힌다.

 

저자 ‘김태진’은 특유의 문학적 감성으로 예술에 인문학을 녹여내는 데에 능통하다. 이번에는 그가 현대인들에게 ‘틀 밖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미술사를 통해 제시했다. 예술, 그중에서도 현대 미술의 흐름은 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들의 연속이다. 저자는 미술사에서 발생했던 새로운 예술의 시작점과 예술가들의 혁명적인 발상들을 연속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울 것이다.

 

 

 

점들을 이은 선들: 미술사의 전체의 흐름



‘점들을 이은 선들’은 이 책의 뼈대에 대한 가장 정확한 요약이다. 책은 20세기 예술가들이 이루어낸 혁신적 성과를 다섯 개의 꺾은선으로 표시했다. (지도의 가로축은 시간의 흐름을, 세로축은 중심과 변방을 의미한다. 세로축은 가운데는 주류 예술을, 위쪽은 프랑스와 미국, 아래쪽은 그 외의 국가에서 발생한 예술을 표시했다.) 선들이 지나가는 점은 새로운 미술이 생겨난 순간이며, 점들의 연결은 현대 미술이 거쳐온 경로다.

 

19세기까지의 미술은 원근법에 기반하여 대상을 똑같이, 혹은 더 이상적이고 아름답게 그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 이 재현으로서 미술은 파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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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미술, 홈에서 빠져나오다’에서는 20세기 전반부의 미술을 주로 다루며, 미술이 과거의 홈, 즉 재현 미술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앙리 마티스에서 잭슨 폴록에 이르는 첫 번째 선은 고전 미술을 형식적으로 파괴한 시작점들을 이은 것으로, 원근법이 해체되고 완전한 평면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색채와 형태를 해방시켰고, 이어 오르피즘과 절대주의는 궁극의 추상에 도달했으며, 폴록은 이를 넘어서 순수한 평면을 창조해낸다.

 

에른스트 키르히너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에 이르는 두 번째 선은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들의 고뇌를 보여준다. 각 점들은 지각의 너머를 추구함으로써 재현 미술의 주제를 파괴한 순간들이다. 이로써 재현은 미술의 중심에서 완전히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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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2부, ‘미술, 드넓은 세상에 펼쳐지다’ 에서는 20세기 후반부를 다룬다. 이 시기는 미술 자체가 재정의 되는 과정이다.

 

마르셀 뒤샹에서 플럭서스의 백남준에 이르는 세 번째 선은 규칙을 파괴하고 미술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시도를 통해 탈권위의 미술을 보여준다. 뒤샹, 다다, 미니멀리즘, 플럭서스가 만들어낸 각 점들이 나타내는 것은 기존의 기득권층의 문화 예술을 거부한 순간이다.

 

블라디미르 타틀린에서 비디오아트의 백남준으로 이어지는 네 번째 선은 새로운 방식의 예술과 함께 탈형식으로 나아가는 과정들을 보여준다. 원재료 자체가 형태가 되기도 하며, 더 이상 예술가가 제작자가 아니게 되기도 하며, 전 지구가 예술의 장이 되기도 한다.

 

앨런 카프로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에 이르는 마지막 선은 개념이나 행위가 중시되는 예술이 발생한 사건을 통해, 결과물로서의 작품을 뛰어넘는 탈물질의 경향을 보여준다. 이들은 결과물보다는 착상과 예술 행위를 더 중요하게 보며, 종국에는 착상만이 남기도 한다.

 

그리고 이 방대한 혁신의 흐름에서 인상 깊은 몇 가지 순간을 뽑아 소개한다.

 

 


뉴먼과 색면 회화: 지각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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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보다 느낌에 충실했던 화가가 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와 마주한 느낌, 바넷 뉴먼은 이를 ‘숭고함’이라고 명명했다. 뉴먼의 작품 <하나임 I>에는 묘사도, 표현적 요소도 거의 없다. 우리의 시선은 그저 신비한 색조의 세로선에 머무른다. 그러나 시선이 멈춘 순간, 마음속에서 왠지 낯설고 두려운 느낌이 밀려온다.

 

많은 것을 비워냈더니 오히려 새로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 뉴먼은 이를 일종의 종교적 체험과도 같다고 본다. 따라서 <하나임 I>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영적인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된다. 뉴먼을 시작으로 미술은 ‘감상해야하는 것’이라는 틀에서 벗어난다.

 

그의 방식은 너무나도 주관적이기 때문에 비평가와 동료들, 대중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으나, 실제로 이러한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꽤 많이 존재한다. 작품 앞에서 다리가 풀려 주저앉거나,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내거나, 감정에 못이겨 때때로는 작품에 테러를 하는 경우까지 있다. 아마도 뉴먼은 역사에서 작품에 가장 많은 테러를 당한 예술가일 것이다.

 

 

 

다다: 권위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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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인 스위스는 전쟁에서 비켜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의 성지였다. 자유분방한 인물이었던 극작가 휴고 발은 모여 있는 각국의 예술가들과 뭔가를 작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취리히에서 유럽의 ‘다다’가 탄생했다.

 

그들은 한 주점에 ‘카바레 볼테르’라는 이름을 붙여, 시 낭송, 노래, 짧은 연극을 할 수 있는 공연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당시 부르주아의 탐욕이 전쟁을 낳았다는 것에 굉장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작품의 주된 주제는 부르주아들이 장악한 세상에 대한 조롱과 풍자였다. 그들에게 전통적 취향과 진지한 태도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이들의 공연은 때로는 그냥 말장난 같기도 했으며, 광적인 난장 같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전통적인 미술에 익숙하던 대중들이 이에 열렬히 호응했다는 것이다. 전쟁과 혼란의 상황 가운데에서 다다와 대중들이 함께 분노하고 저항하며,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풍자와 예술을 즐겼다는 것은 기존의 권위를 넘어섰다는 측면에서 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클랭과 신사실주의: 형식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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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파리 예술계의 최고의 스타였던 이브 클랭의 별명은 스캔들의 예술가다. 언젠가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전시를 선보이겠다고 선언했다. 전시를 위해 그는 인맥을 동원해 공화국 수비대원과, 경찰관, 소방대원을 섭외했고, 초대장 3500장에 가짜우표를 붙여 발송했다. 그의 명성 때문에 이른 시간부터 전시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막상 전시장에 들어간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광경에 경악했다. 전시장 안에는 텅 빈 진열장 외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시 제목이 <텅 빔>인 이유였다.

 

그러나 곳곳에 배치된 공권력 덕분에 큰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시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화젯거리는 연이어 생겨났다. 첫날 전시를 보고 돌아간 사람들은 칵테일에 넣은 성분 때문에 모두 파란색 소변을 보기도 했다. 관객들로 하여금 전날의 전시를 다시 상기시키기 위해 클랭이 생각한 장치였다. 미디어는 며칠 내내 이 소란을 보도하느라 바빴다.

 

이 모든 과정은 전부 클랭이 의도한 바였는데, 일부러 관람객이 권력에 억눌린 분위기를 느끼도록 사람들을 배치했고, 예술이 공권력으로부터 탄압받는 장면을 연출했으며, 미디어를 이용해 보도되도록 했다. 클랭의 이러한 도발적 발상들은 항상 대중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발을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이처럼 클랭이 대표하는 신사실주의는 기존의 권력을 파괴하려고 함과 동시에 철저히 자본과 대중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반영한 예술로 평가 받는다. 신사실주의의 도발적 작품활동은 예술의 가치가 ‘사람들의 관심을 강력하게 이끌어 낼 수 있는지’로 새롭게 정의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홈이 아닌 대지로



작가는 우리가 언젠가부터 홈에 빠진 채로 걸어왔다고 언급한다. 많은 이들이 지나간 길에는 깊게 홈이 파이고, 대부분의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좁은 홈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부단히 깎아낸다.

 

그러나 홈에서 나오면 대지가 있다. 그리고 원래 세상의 어디에도, 태초부터 있었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혁신적인 미술사의 사건들을 소개하며, 현대인들이 대지로 나와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참고자료를 건네는 셈이다.

 

“홈에서 나와 대지에 선 이들은 더 이상 줄서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나아가며 스스로 길을 열어갈 뿐이다. 이는 쉽게 말해, 나다움에 집중하는 것이다.”

 

 

[신지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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