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줄 이어폰 어디 있더라 [음악]

카세트 플레이어를 샀다
글 입력 2021.09.2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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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트 플레이어를 샀다. 꽤 충동적인 일이었다. 인스타그램을 뒤져 빈티지 기기들을 판매하는 계정을 찾았고, 바로 메시지를 보내 문의를 드렸다. 내가 몰랐던 세상에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테이프를 즐기고 있었다는 게 새로웠다.

 

사실 턴테이블을 사려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에어팟 사기 전에 키링부터 사고, 노트북 사기 전에 파우치부터 사듯 턴테이블은 아직 없지만 매일같이 LP 판매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그리고 카세트를 만났다. 물론 첫 만남은 아니었다. 지금도 본가에 있는 TV만 한 검정 오디오에 영어 동요가 담긴 카세트를 넣었던 경험, 카세트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빙글빙글 돌려보던 경험이 생생하다. 아빠의 옛 차에는 화면보다 테이프를 넣는 곳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고 할머니 댁에 가는 길이면 그곳을 열었다 닫았다 장난치다가 꾸지람을 듣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손으로, 2021년에 카세트를 사게 될 줄은 몰랐다. 솔직하게 말하면 LP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끌렸고, 그다음은 카세트 플레이어의 독특한 음색에 반했으며, 소박하고 아날로그적인 비주얼에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마치 돈이 있어도 못 산다는 초고가의 명품처럼, 몇십 년 이상의 연식에 흠집 가득한 빈티지 제품들 역시 재고 찾기부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2000년대 초반에 나온 귀엽고 키치한 디자인에 블루투스까지 되는 제품들을 주로 구경했다. 하지만 무채색의 벽돌형 플레이어들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고, 곧 투박하고 단순한 디자인이면서도 귀여운 매력이 있는 플레이어 하나가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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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로만 접하던 파나소닉사의 과거를 엿보는 기분. 나의 첫 카세트 플레이어와 마주한 나의 첫 앨범은 'Boyz II Men - CooleyhighHarmony'. TV 서랍장 아래쪽을 뒤져 찾아낸 엄마의 추억이었다. 1991년에 발매된 음반, 1993년에 제작된 카세트, 2021년의 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플레이어를 열고 카세트를 집어넣었다. 딱 맞춰 들어가는 카세트와 '딱'하며 다소 요란스레 닫히는 소리까지 전부 날 기분 좋은 설렘으로 가득 차게 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몇 초간 테이프가 감기는 소리가 나더니, 곧 Boyz II Men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첫 번째 트랙인 'End Of The Road'를 비롯하여, 몇 곡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듣는 음악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트랙까지 이어 듣고 나자, 평소에도 늘 Boyz II Men의 노래가 흘러나온 것처럼 내가 있던 공간의 공기가 음악과 어우러졌다. 음악 앱이었다면 듣지 않고 넘겼을 느낌의 음악들도 카세트 안에서는 내가 임의로 떼어내지 못하는 한 몸이 되어 자연스레 나에게 닿았다.

 

음악 앱에 저장된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두 가지로 나뉜다. 날씨가 좋은 날 창문을 열고 청소할 때, 친구들과 나들이를 갈 때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노을이 내게 스며들듯 유난히 아름다운 날 집에 돌아올 때, 그리고 잠이 들기 전을 위한 플레이리스트.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로 직접 꾸린 리스트지만 어느샌가 무선 이어폰을 연달아 세 번 눌러 랜덤으로 재생된 곡을 넘겨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분위기가 어울린다 생각해 넣어뒀던 음악도 막상 이어 들으면 깰 때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쉽게 넘기고, 쉽게 질렸다.

 

하지만 빨리 감기를 누르고 있지 않는 이상 음반의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제작자의 의도에 맞게 이어 들어야 하는 카세트는 내가 단일 곡이 아닌 음반 자체에 대한 관심과 매력을 갖게 해 주었고, 음반의 존재 이유에 관해 고민하게 해 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직접 느낀 카세트의 매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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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직접 카세트를 하나 샀다. 평소 즐겨듣던 The 1975의 'A Brief Inquiry into Online Relationships'. 역시 재고가 얼마 남지 않아 제법 힘겹게 구매했다. 이전에 LP가게에서 듣던 느낌과는 달랐다. 기분 탓인지, 플레이어가 내는 자잘한 소음과 함께 들으니 신나는 노래는 더 신나게, 서정적인 노래는 더 서정적으로 들렸다.

 

한 면이 다 재생되면 '탁' 소리와 함께 버튼이 올라오며 티를 내는 것도, 다시 뒤집어 넣고 크고 못생긴 버튼을 누르는 것도 다 좋았다. 음악이 진짜 내 옆에 있는 느낌과, 음악을 내 손에 꽉 쥐어 본 느낌, 소음과 함께 진동이 느껴지는 그 손을 타고 팔을 따라 흘러오는 듯한 노래를 느껴보는 것도 좋았다.

 

왜인지 우리는 자꾸 돌아간다. 편해서 어쩔 줄 모르던 무선 이어폰을 옆에 둔 채 다시 줄 이어폰을 찾고, 가벼운 터치 한 번이면 넘어갈 것을 기다린다. 그 트랙이 나올 때까지.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틀 수 있는 음악인 것을, 플레이어를 열고 카세트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르는 것까지 자꾸 소리를 낸다.

 

카세트가 계속 돌아간다.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소음을 내며 돌아간다. 가만히 듣고, 보고 있자면 내가 조종하던 스마트폰 앞에서와 달리 나는 별로 힘이 없다. 자꾸 돌아가는 테이프를 보고만 있을 뿐. 그래서 나는 계속 돌아가나 보다. 가끔은 가만히 앉아 테이프가 돌아가는대로 나를 맡기고 싶어서. 줄 이어폰을 귀에 꽂은 나는 가만히 앉아 있고, 카세트는 돌고, 돌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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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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