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심코 내민 물 한 잔의 기적 - 덩케르크 [영화]

글 입력 2021.09.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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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

Dunkirk, 2017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배우 : 핀 화이트 헤드, 해리 스타일스, 톰 하디, 마크 라이런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밀린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프랑스의 해안가 덩케르크에 고립된다. 하늘에선 전투기가, 바다에선 유보트가, 뒤에선 독일군이 시시각각 목숨을 옥죄어 오는 가운데 병사들은 자신들을 데리러 올 구조선을 간절히 기다린다. 한편 영국의 항구 마을에서는 구출 작전을 위해 민간 어선들까지 동원되고, 하늘에서는 그런 그들을 돕기 위해 파일럿들이 비행기를 몰고 덩케르크로 향한다.

 

***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해변에서 볼일을 보고 있던 병사의 눈에 또 다른 병사가 들어왔다. 그는 방금 죽은 듯한 누군가의 시신을 묻어주고 있었다. 병사는 다가가 시신을 묻는 것을 함께 도와준다. 또 다른 병사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목이 말라 보였는지 선뜻 물을 건넨다. 병사는 말없이 그 물을 받아 마신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 장면은 아니다. 그냥 우연히 만나 물을 나눠 마신 평범한 장면이다. 하지만 <덩케르크>를 말할 때 나는 왜 항상 그 장면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바로 거기서부터 였기 때문일까. 어쩌면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기적이 물을 건넸던 그 단순한 호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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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영화다. 명색이 전쟁 영화인데 치열한 전투 장면도, 전투를 앞둔 병사들의 비장함도 없다. 하다못해 그 흔한 신파조차 없다. 마지막 한 장면을 제외하면 독일군의 모습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독일군이 탄 전투기라면 모를까). 톰 하디 정도를 제외하면 유명한 배우가 등장하는 영화도 아니다.

 

하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건 승리가 아니라 후퇴를 다룬 영화니까. 그렇기에도 놀란 감독에게도 이번 영화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들이 전쟁 영화에서 기대하거나 좋아할 법한 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병사들은 철저하게 무기력하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도망치거나 엎드리기 바쁘고(물론 그중 몇몇이 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그들은 무참히 폭사당했다), 어뢰가 나타나면 배에서 뛰어내리기에 바쁘다. 그 외의 시간엔 해변에 앉아 오지 않는 배를 기다리거나 스스로 파도를 향해 뛰어든다. 고립과 절망에 짓눌린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오로지 하나, 바로 살아남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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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덩케르크>는 전쟁 영화라기보다는 재난 영화에 더 가깝다. 전쟁의 목표가 승리라면, 재난 속에서 목표는 생존에 있기 때문이다. <덩케르크> 속 독일군의 공격은 마치 자연재해처럼 철저하게 우연의 속성에 기댄다. 거기엔 예고도, 타깃을 노리는 특별한 규칙도 없다. 그저 느닷없이 나타나 무작위로 죽인다. 첫 번째 폭격에서 토미가 살아남은 건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우연이었다(어쩌면 바로 이것 때문에 감독이 토미 역으로 무명의 배우를 캐스팅했는지도 모른다. 토미가 주인공이 아닌 일반 병사1처럼 보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한편 <덩케르크>는 영화적으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선 3개의 시간축이 등장한다. 해변에서 일주일, 바다에서 하루, 하늘에서 한 시간.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서로 맞물리는데 그 접점을 발견하는 순간 관객의 마음속에서는 기묘한 쾌감이 피어오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구조가 영화의 주제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맞서 싸워 이기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데 목표가 있는 전쟁에서 가장 큰 적은 다른 무엇도 아닌 시간이다. 구출되기만을 기다리며 해변에서 일주일을 보내야 하는 병사들에게 시간은 너무 많아서 문제다. 반면 그들을 돕기 위해 달려가는 하늘과 바다 위의 사람들에게 시간은 너무 모자라서 문제다. 이러한 이유로 서로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은 다르지만 그들 각자가 느끼는 시간의 농도는 동일해진다. 나아가 생존을 다루는 이 영화에서 생존을 향한 사람들의 열망을 더욱 절박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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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에는 생존을 둘러싸고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한쪽은 생존을 서로 뺏고 빼앗는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반면 다른 한쪽은 생존을 논 제로섬 게임의 문제로 바라본다.

 

초반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이야기는 생존을 제로섬 게임에 입각해서 바라보는 사람들에 의해 전개된다. 영화 속에서 처칠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해변에 모인 모든 군인들을 구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를 수행하는 제독과 장교는 영국군부터 먼저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른 영국 군인들 역시 함께 싸우는 프랑스군을 전우보다는 자신들의 배에 무임승차 하려는 무뢰한으로 여긴다.

 

이러한 모습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바로 어선에서의 시퀀스다. 토미, 깁슨, 알렉스를 비롯한 몇몇 병사들은 모래톱에 좌초된 배에 숨어 밀물이 되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되면 배가 떠서 집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군의 사격으로 인해 배에는 구멍이 뚫리고, 함께 탑승한 네덜란드인 선원은 배가 뜨기 위해서는 무게를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알렉스는 말이 없는 깁슨을 독일군의 스파이로 의심하며 내보내려 한다. 그러자 깁슨은 불어를 말하며 자신이 프랑스인임을 드러내지만 패닉에 빠진 병사들에게 그런 건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가 되지 못한다. 이에 토미가 그들을 말리며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알렉스는 생존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라며 자신들 사이에 선을 긋고, 두 사람을 희생시키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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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장면만 떼어놓고 본다면 알렉스의 행동은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배가 가라앉는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내가 아닌 다른 이를 내보내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종반부에 이르러 말도 안 되는 덩케르크의 기적을 이뤄낸 건 알렉스처럼 나만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하는 쪽이 아니라 다 같이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했던 토미 같은 사람들이었다.

 

해변에 다다르기 전 독일군에게 쫓기던 토미는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했다. 깁슨은 목이 마른 토미에게 선뜻 물을 건넸고, 후에 토미는 배가 고픈 그에게 통조림을 건넸다. 어부들은 유보트와 폭격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덩케르크로 배를 몰았고, 파리어는 부족한 연료에도 불구하고 배들을 구하기 위해 전투기를 돌렸다. 영국군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말했던 제독 역시 작전이 끝난 후에는 프랑스군을 돕겠다며 스스로 남는 선택을 한다. 말하자면 프랑스군이 영국군을 도우며 시작했던 이야기가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도우며 끝나는 것이다.

 

한편 알렉스조차 그런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첫 번째 구축함이 침몰했을 때 그를 끌어올린 건 토미와 깁슨이었다. 두 번째 구축함이 침몰했을 때 익사 위기에 처한 알렉스를 구한 것도 바로 깁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스가 영국에 도착해 부끄러움을 느낀 건 당연한 일이다. 생존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라는 그의 말이 틀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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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는 영웅담이 아니다. 이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사람들을 구하는 그런 뻔한 영화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독일군의 공격은 마치 자연재해처럼 무차별적이고 무작위적이다. 그것은 우연의 얼굴을 띠고서 자신 앞에 놓인 생명들을 마구 잡아먹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조자와 피구조자의 경계는 자연스레 희미해진다.

 

세 개의 시간축이 합쳐지는 순간 전투기 한 대가 추락한다. 방금까지만 해도 폭격기로부터 배들을 구하기 위해 싸웠던 바로 그 전투기다. 이에 선장은 전투기의 파일럿을 구하기 위해 배를 몬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전투기 조종자는 방금까지만 해도 구조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 하지만 바다에 빠진 순간 그의 위치는 피구조자로 역전된다. 이렇듯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의 차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분을 거두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 어떤 대단한 희생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목이 마른 이에게 선뜻 물을 건네는, 딱 그만큼의 선의만 있으면 된다. 그 작은 선의들이 모여 파도를 이루고, 결국 사람을 구한다. 영화 속에서 파리어가 아닌 소년 조지를 기념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진정한 위기의 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웅이 아닌 이름 모를 수많은 개인들의 선의와 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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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조승연 작가가 TV에 나와 했던 말이 여전히 기억에 선명하다. 그는 앞으로의 세계 흐름은 좌/우 대립이 아닌 개방(Open)과 폐쇄(Close)의 대립으로 이어질 것이라 예측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그의 말은 대부분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외국인과 난민을 향한 시선은 요 몇 년 사이 더욱 차가워졌다. 우리 안에서도 성별, 나이, 학벌, 계층, 세대, 심지어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상대를 비난하고 적대하기 일쑤다. 그에 반해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와 환경오염 등의 문제는 Close가 아닌 Open, 나만 살아남겠다는 이기심이 아닌 서로를 향한 관심과 연대만이 진정한 해결책임을 소리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덩케르크>는 오늘날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토미는 신문에 실린 처칠의 연설을 대신 읽는다. 이는 가장 평범한 사람, 이름 없는 개인이 역사에 목소리를 낸다는 뜻이다(사실 우리는 편의상 주인공을 토미라고 부르고 있긴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 적은 없다. 말하자면 그는 그냥 병사1이다). 결국 기적을 실어 나르는 건, 숭고한 삶의 가치를 전달하는 건 익명의 몫이고 공동체의 역할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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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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