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랜만에 풀어 본 추억 꾸러미. [사람]

글 입력 2021.08.2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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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어떤 일을 자세히 들추어 보면 내가 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에게도 내어놓고 싶지 않은 속마음, 뭐 이런 류의 것들이 아니다. 뭐랄까, 문득 기억이 떠올랐을 때 왜 이게 나한테 중요한 기억이 아니지? 하고 나조차 놀라면서 의식적으로 기록해 두는 이야기들이다.


가끔 친구들이 내게 ‘넌 어떤 부분엔 참 예민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참 둔하다’ 고 얘기 하는데, 아마도 이런 부분을 말하는 듯싶다. 그래서, 얘기한 적 없는 이야기들을 오늘의 자리를 빌려 좀 풀어볼까 한다.

 

*


재작년 여름, 우연히 폴란드로 썸머스쿨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나는 흔히 말하는 어학연수를 1달간 다녀오게 되었다. 연수가 끝나고 나서, 나는 연수를 함께한 친구들과 근처 국가들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기대로 가득 차 있던 나는, 한국에서 미리 해외에서 사용이 가능한 유심칩을 구매했고, 첫 여행지였던 독일에서 드디어 야심 차게 유심을 꺼냈다. 하지만 어쩐지 바보처럼 유심칩을 휴대폰에 거꾸로 넣어버렸다.

 

유심을 집어넣는 찰나의 순간 뒤통수가 쎄하며 말 그대로 ‘아뿔싸’ 싶었다. 폰을 아무리 들고 이리저리 움직여도 유심칩은 나오지 않았고, 귀퉁이를 핀셋으로 집어보려고 해도 유심칩만 망가질 뿐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기술적인 결함도 고장도 아닌, ‘단지 유심칩을 거꾸로 끼워버려서 생긴’ 이 부끄럽고 어이없는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것인가. 고민은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다.


다음날, 어찌어찌 인터넷 검색을 해서 숙소 근처에 있는 아울렛을 찾아갔다. 휴대폰을 고치는 코너앞으로 가서 서류를 작성하고 어찌어찌 설명을 하자, 직원은 예상대로 웃음을 내비쳤고,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에는 곤란하다는 미소가 이어졌다. 고민하는 얼굴로 창고로 들어간 그는, 돋보기와 기다란 핀셋을 가져왔다. 그는 한참 동안 나의 휴대폰을 이리저리 기울여 가며 유심칩을 꺼내려고 노력했고, 나는 맞은편에서 두 손을 꼭 모으고 제발 휴대폰에서 유심이 빠져 주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아직도 드디어 성공하셨을 때의 아저씨의 미소를 잊을 수 없다. 물론 유심칩은 귀퉁이가 다 망가져서 한 번도 써 보지 못하고 버려야 했지만, 그때의 안도감과 기쁨은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본 것들이었다. 그 때, 같이 가주었던 친구가 괜찮다, 괜찮다 하며 날 다독여준 것도, 아울렛의 푸드 코너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의 가벼운 발걸음도 모두 새록새록 남아 있다.

 

*


그 여름의 여행에서의 또 한 가지 강렬한 기억은, 이탈리아에서의 보낸 마지막 날이다.

 

우리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이동하기 위해 로마의 도심을 벗어나 공항 근처에 숙소를 예약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그곳은 사람이 몇 살지 않고 차조차 잘 지나다니지 않는 정말로 외진 시골이었다. 호스트는 우리를 태우러 왔고, 짐을 싣고 숙소로 이동하는 길에 우리는 바다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그러자 호스트는 숙소 근처에 바다가 있으니 가서 수영을 하고 올 것을 추천했다. 흔쾌히 자신의 자전거 4대를 빌려준 호스트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구글 지도를 키고 줄을 지어 자전거를 타고 바다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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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바다

 

 

도착한 바닷가에는 호스트의 말처럼 정말이지 동네 사람들 몇몇이 와서 편히 수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동네 주민들은 다들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눈빛을 읽을 틈조차 없었다. 바로 눈앞에 바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조용하고 잠잠했지만 찰랑거렸도 힘찼다. 우리 또한 티셔츠 차림으로 뛰어들어 바다에서 실컷 수영했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모두가 바닷물을 한가득 마시고, 자신 있게 걸음을 내딛다가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해가 질 무렵, 어둡고 그늘진 파도 속에서 넘실거리는 파도에 몸을 맡기면서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수영을 마친 우리는 옷과 신발,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동네에 유일하게 있던 마트에서 장을 보았다. 에너지를 쓴 만큼 배가 고팠기에, 이것저것 집어넣다 보니 구매한 것들은 꽤나 많았고, 우리는 꾸러미들을 양쪽 팔에 끼고서 휘청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의 우리들은 어떤 얼굴이었나, 쨍하고 강렬했던 태양 아래 물장구를 치며 깔깔거리던 우리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바닷물에 젖어버린 서로의 티셔츠와 양말 같은 것을 있는 힘껏 짜주던 기억도. 숙소에 돌아와, 자전거를 타는 동시에 짐도 지느라, 저마다 팔뚝에 세게 눌린 자국들을 보고 웃던 것도 생생하다.


전부를 꺼내서 헤아리지 않고, 물론 그럴 수도 없지만, 몇몇 기억들은 가끔 펼쳤을 때 웃음을 짓게 하는 추억이라는 좋은 장치로 남아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여행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그 여행이 어땠는지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다고 느낀다. 말 그대로, 여행 중에는 여행을 하기 바쁘니까 말이다. 문득 떠오른 기억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저런 일이 있었구나 하며 그때의 나와, 그때의 우리들을 다시금 생각해 내며, 나는 이것들이 내게 꽤나 중요하고 소중한 이야기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것이다.

 

 

[이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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